하루 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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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고려대 학생회관식당에서 “수도권 노조” 기금 마련을 위한 이주노동자 후원 주점이 있다. “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이하 지지모임)“에서는 ‘자히드 후원’을 위한 부스를 차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배지를 팔고 모금함과 유인물 대자보 피켓 등등을 준비하고 다른 단위와 함께 할 수 있는 수익 사업을 찾고 있었다. 부랴부랴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와중에 상당히 당황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부스는 차리되 모금함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연대단위에서 CD판매를 하겠다는 계획을 주최 측에 전달했더니 이주지부의 설명은 ‘근 몇 달간 여러 단체에서 이주문제를 가지고 주점을 열었다. 주점에 참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외부의 시선은 그 단체를 구분 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이주지부로 인식한다. 이주지부는 이렇게 자주 주점을 여는데 그 수익금으로 대체 뭘 하냐는 구설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모금함이 주점 내에서 돌 때 주점에 있는 사람들이 부담을 갖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부터 기가 찬다. 분명히 다른 단체에서 다른 타이틀을 가지고 주점을 열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주점으로 얼마의 수익이 생겼고, 그 사용 내역이 어떻다는 것을 공개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그런 구설수가 두려 울리도 없고 애초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모금함이 주점 내에서 도는 것이 부담스럽다? 주점 티켓을 팔거나 물건을 파는 것은 부담이 아니고 모금함은 부담스럽다는 말인가? 주점 티켓부터 시작해서 어느 것도 강제적이지 않다. 부담되면 물건을 안사고 모금함에 돈을 안 넣으면 그만인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돕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연대하듯 우리는 자발적 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활동가중 누군가는 “지지모임에서 ‘자히드 후원’을 타이틀로 부스를 차린다는데, 여러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자히드 문제”에 대한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을 전했단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들이 의견을 통일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그 갈등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헷갈려하는 동지들도 있을 테고, 형평성을 들며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하냐는 문제로 고민하는 동지들도 있을 것이다. 자히드는 분명 이주지부의 조합원이다. 조합원이 강제추방 당하고 그로 고통 받고 있다면 이주지부 차원에서 먼저 나서서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돕고 싶지만 ”개인의 일“인지라 조직차원에서 끌고 가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된다기에 지지모임과 다른 연대단위가 ‘자히드 후원 사업‘을 계획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지모임이나 다른 연대단위가 왜 자히드 돕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동의는 어렵더라도 이해를 구한다고 하면 될 것을 동지들의 입장이 아직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형평성의 문제도 그렇다. 애초 누구는 돕지 않았으니 끝까지 돕지 말자는 말인가? 그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형평인가? 우리는 늦었더라도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까지일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중 누구든 자히드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 때 우리는 혼자여야 하는가?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고 노조를 만들고 모임을 꾸린 이유는 어려울 때 함께 하자는 더디더라도 서로의 고통을 맞들며 가자는 뜻이지 않던가.
우리는 언제나 추상과 싸워 와서 구체적인 현실이 닥쳐서는 이게 저건지 그것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등등의 말은 한 없이 추상적이다. 우리가 바꾸자는 것은 바로 개개인들의 삶이 아니던가. 고통은 바로 그 개인들의 삶속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우리가 말하는 연대하자는 개인적 고통이란 ‘사랑의 열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숨 쉬는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는 언제나 개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트라 켈리의 말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압축하고 있다. 투쟁은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는 데에서 비로소 시작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 질기게 간다는 것을, 그래야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가? 대체 사적과 공적의 구분은 어디서 어디까지이며 누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당신들은 정말로 사적 영역에서는 고통을 받고 그와 분리된 공적인 영역에서 운동을 한다는 말인가?
이런 소모적 언쟁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느 단위에서 함께 한다는 소리에 탄성을 질렀어야했을 밤이다. 주점 전날 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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