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서, 풍경처럼만 자리한다. 조리개 값 1.2, 중앙에 초점을 맞춘 사진에서 맨 구석 희미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반 친구들에게 어쩌다 하고 싶은 말들은 혀끝을 맴돌다 이내 수그러든다. 말이 적은 편이었냐고? 말은 끊이질 않는다. 다만 소리가 되지 않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명동에서 어렵게 더빙해온 일본 판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국어 선생이 신촌 한 여관에 술이 떡이 되어 들어가는 모습도.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혼자서만 앙잘거릴 뿐이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모든 게 안 해도 될 말이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졸업을 한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었다. 그냥 수다를 떨고 싶었다. 필요 없는 말이면 어떠냐고, 그 말에서 다른 마음이 생길 줄 아느냐고, 그렇게 마음이 생기면 또 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어가고 싶었다.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고 어디선가 들려오곤 했다. ‘응, 중요하지 않아’ 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쓸데없다고 믿었던 말들은 성대를 울리지 못했고, 말들이 잊혀 졌고, 기억이 잊히고, 마음을 잃었다.
김종삼과 김민정의 시를 번갈아 읽는다. 김종삼의 시는 소리가 없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았지만, 피아노 반주도 변사도 없는 무성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래도 말은 그림이 된다. 김민정의 시는 끊임없이 조잘대는 말들이 좀처럼 여백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수다는 북적이는 선술집의 성가신 소음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에 무게를 두고 반짝이고 있다. 뻥긋하는 금붕어라니, 천만에 ‘반짝거리는 수다’이다. 이런 수다!
좀처럼 우아하지 않게 그러면서 말하기 거북했던 것들을, 쓸데없다고 믿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토해내고 있다. 옆자리의 통화를 엿듣는 모양새로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아니꼽살스럽다는 듯이, 말들은 확성기를 들이댄 야채장수처럼 소리 지르고 있다. 그의 말들은 가볍지만, 그로 상상력은 경계를 넘어 나긋하다. 겨울 햇살이 일요일 오전을 비추듯이, 손을 뻗으면 눈이 부셔 살짝 찡그리는 나긋함.
거기에서는 언어가 시를 통해서 새롭게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일상의 언어들의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비로소 나부대던 궁상들도 세계의 중심이 되고 더 이상 주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수다는 말로, 말은 마음으로 간다. 그렇게 엮여도 시가 되는 걸 알았다. 17년 전에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을 게다. “국어 선생이 말이지, 술이 떡이 돼서….. ”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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