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보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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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한테 전화가 왔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인데, 필요한 책이 있으면 찾아보겠다고. 아 흑, 이 말을 덧붙였다. 술 못 마시는 사람 앞에 양주를 갖다놓은 꼴이라고. 아 아 아 보수동이 가직했다면 주성(酒聖)을 넘어서 열반주(涅槃酒)에 들어도 좋으련만. 오늘같이 끄느름한 날도 거침없이 신났을 텐데.
보수동 헌책방골목의 역사는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지금의 국제시장 터였나,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 들을 가지고 난전을 벌이면서부터다. 그곳이 개인 소유의 땅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보수동으로 하나둘씩 옮겨졌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가져온 책들을 교수나 학생들 사이에서 팔고 사는 게 늘면서 가건물이 만들어졌고, 지금 같은 골목이 형성됐다. 한창때보다 숙졌다지만 그래도 보물창고를 바장이는 맛이 어디로 가겠어. 몇 년 전에 그린 보수동 헌책방 땅그림은 덤으로, 책들이여 안녕하시길.
상세 그림에서 빨간색은 여러 분야의 책을 고루 갖춘 곳인데, 지금도 남아있을는지.
보수동 헌책방
보수동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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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나들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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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이 있어요. 궁뎅이가 촐싹이며 마음까지 에부수수할 때 몸을 가볍게 하고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죠. 간간이 학교에 갈 때나 일터에 가면서 헌책방을 지나치곤 했지만 ‘오늘은 헌책방에 가야지’라고 미리 다짐을 해두면서는 통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며칠 전부터 헌책방에 가야지하고 곱살지는데, “부깽 돈 없다며?” 라고 그루박아 말하더군요. 네 없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 없는 나까지 슬겁게 대하는 미덕으로 신용카드를 추겼고 어찌하다 보니 빌붙고 있답니다. 뼈 빠지게 일하지는 않지만 달이 바뀌는 게 끌탕하긴 마찬가지예요. 기껏 해봐야 인터넷을 통해 책 몇 권 주문하고 어쩌다 커피 한잔하고, 오질라게 추운 날 자전거 대신 지하철을 이용한 게 다인데도 통장에 잔고가 빠지는 날이면 입질에 걸린 붕어처럼 파다닥 하다가 축 처지고 말아요. 그렇다고 참새가 포수 무서운 거까지 생각하면서 방앗간에 가겠어요. 우선 가고 보는 거죠. 카드가 없다고요? 그럴 땐 영풍이나 교보에 가서 몰래 영구 대출을 하는 게 좋죠. 여기서 ‘몰래’가 중요해요. 자기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쥐구멍에 머리 박고 ‘나 안 보이지’하는 것처럼 했다간 진짜 쥐처럼 하루 죙일 벽보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할걸요. 뭐든지 계획이 중요해요. 목욕재계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고, 괜히 잠바 앞 지퍼랑 열어 두지 말고 나볏하게 심호흡 한 번 하고 책방에 들어가세요. 좋아하는 코너에 가서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직원들의 행동반경을 가늠해두고 시작하는 거죠. 책은 안 보고 게름 게름하며 그들의 좌표범위와 운동량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 대상이 영향을 받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잊어선 안 되겠죠. 그러다 기회다 싶으면 몬창몬창하지 말고 한 번에 휙~~ 참고로 한 번도 못해본 일이에요. 그냥저냥 도서관에서 빌려보겠다고요? 네 반납기일을 지키는 것 잊지 마시고요. 겨울에 때 아니게 비 온다고 우산대용으로 쓰지 말고요, 아무리 리포트가 넘쳐도 밑줄 쫙쫙 그어가며 짜깁기 흔적 남기지 말아 주세요.

씹떡껍떡한 소릴랑 그만하고 아저씨 말로는 1년하고 몇 개월 만에 찾았다는 일산 집현전에 갔어요. 그새는 아니지만 길 건너엔 2층 매장도 생겼네요. 『과거와 미래 사이』 『페미니즘의 도전』 『골렘-과학의 뒷골목』 등등의 책을 샀어요. 요 책들이 벌써 헌책방에 나왔느냐고요? 세상 살다 보면 책깡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 집현전 같은 경우는 예전에도 말했지만 새책들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아주마씨의 동생 되시는 분이 어디 출판사에 다녀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출판단지도 있잖아요. 소문엔 교수들이 일산에 많이 산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증정본이라고 해서 “누구누구 혜존”, 피 튀겨가며 책 사도 쟁여 놓기만 할 때가 있는데 지들이 공짜로 받은 책 다 읽겠어요. 여하튼 요런 이유와 아무런 상관없이 신간도 신간이지만 재고 도서라든지 새책 같은 헌책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가 집현전이랍니다. 직접 들러보세요. 참 b님을 위한 『캐치-22』도 샀어요.
가방에 책이 한 짐 가득이네요. 읽지도 않고 뿌듯해질 때는 요때뿐이죠. 작심하고 나왔으니 홍제동 대양서점에도 들러야죠. 대양서점은 용산 뿌리서점과 더불어서 책값이 참 싼 곳이에요. 아버지는 1매장 아들은 2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1매장은 여타의 동네 헌책방과 별다를 게 없이 이러루한데, 2매장은 헌책뿐만 아니라 오래된 lp와 골동품 얄개 영화포스터 같은 것이 한데 아우러 사뜻한 박물관 같아요. 널치난 몸도 쉬어가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죠. 대양에서 짬뽕을 시켜 주기에 맛나게 먹고, 커피로 입가심하고 인삼차를 후루룩 마시고 슬렁슬렁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몇 권의 책을 뽑았죠. 대양에도 한 코너에 새 책들이 즐비하지만 그보다는 구석구석 숨은 책들을 찾는 즐거움을 택하고, 그냥 보면 뭐하나 노느니 염불한다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여성학 책들을 한데 추렸어요. 누군가에게 한 방의 축복이길 바라요. 대부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겠지만 아예 검색이 안 되는 책들도 더러 있어요. 가지런히 꽂아 뒀으니 다녀와 보세요.

『다른 목소리로』 – 너무나 유명해서 그닥 할 말이 없지만 스타이넘이 요 책을 두고 “인간 사회에 여성의 삶을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사회 자체를 완결한 책”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어요. 여하튼 여성학과 심리학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책이랍니다. 수 세기 동안 남성의 경험이 흡사 인류의 경험인양 사기 치던 기존의 발달 이론에 똥침을 가한 책이죠.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 게센인이 아닌 이상 요걸로 위안 삼으세요.
『내부로부터의 혁명』 – 진즉에 절판인지라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데,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인도에서 요가 배운 뒤에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관련해서 쓴 것입니다. 1,2 권으로 나왔는데, 1권은 어쩌다 헌책방에서 반짝하는데 2권은 잘 안 보여요. 다니다 보면 만날 날이 있겠죠. 저도 몇 년 전 오늘처럼 무작정 다니다 우연히 만났던 책이에요. 요전에 봤던 벨 훅스의 『사랑의 모든 것』에서도 짧게나마 언급을 하고 있어요.
『페미니즘과 문학』 – 출판사에서는 더 못 찍을 테고, 대학 구내 서점 같은 곳에 재고가 남은 걸 본 적은 있어요. 일레인 쇼월터의 ‘페미니스트 비평 황야에 서다(다시 나왔지만)’나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과 폴리스’ ‘중심에 있는 어머니’ 등등 중요한 텍스트들이 실려 있어요.
『페미니즘 이론』 – 페미니즘의 교과서 같은 책이라죠.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 요것은 『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란 제목으로 개정돼서 다시 나왔어요. 안 읽어 봐서 올마나 바뀌었는가는 모르겠네요.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 성 정체성에 대한 ‘nature’냐, ‘nurture’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죠.
외에도 『현대 여성 해방 사상』 『가족은 반사회적인가』 『페미니즘과 종교』 『한국의 여성과 남성』『여성해방의 이론 체계』 등등 다양한 여성학 관련 책이 즐비하더군요.
암암한 기억을 좀 더 쥐어짜 보면 페미니즘 서적 외에도 몇몇 특별한 책들이 있었어요. 가령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1,2,3, 양장케이스 같은 것 말이죠. 찾던 사람에게는 춤출 일인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짐이죠. 9만 얼마였던 책값이 올라서 12만 원이나 하는 책인데, 책값이야 엿장수 맘이라고 1/3 가격 혹은 말 잘하면 1/4에 살 수 있을 거예요 . 상고사를 다루는데 내용도 재미난 것은 물론이고, 만화도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죠.
그리고! 『모피를 입은 비너스』도 있었어요. 요것은 들뢰즈 『매저키즘』에 부록으로 실려 있긴 하지만 ‘인간사랑’보다 ‘과학과사상’의 번역이 더 잘 읽혔어요. 게다가 표지도 더 이쁜걸요! 사드에게 『안방철학』(규방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왔더군요)이 있다면 마조흐에겐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있죠.
당연히 기억 못 하는 책이 훨씬 더 많아서 뭐가 더 있는지는 역시나 직접 나들이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두 책방의 약도는 홍제동/대양서점, 일산/집현전을 참고 하세요.

대양 서점에서는 저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아방가르드 예술이론』과 『아마조네스의 꿈』을 샀어요.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86년에 출간된 것인데 같은 해에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으로도 심설당에서 나왔었죠. 이미 제본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척 어렵게 ‘독해해야’했던 책이었죠. 두 번역을 비교해 보았는데, 적절하게 합치면 잘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기회가 있을랑가는 모르겠네요. 원저의 제목을 그대로 따른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영어를 중역한 것이고,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는 독어를 번역한 것인데, 때로는 중역이 더 훌륭할 때가 있기 마련이죠. 도스또예쁘스끼의 범우사판과 열린책들판을 생각해 보세요.

『아마조네스의 꿈』은 바바라 워커의 소설이에요. 원제는 짐작하신대로 ‘아마존Amazon’이에요. 『흑설공주 이야기』같은 동화 뒤집어 보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아마존’도 일찍 번역이 됐네요. 안티오페라는 여성왕국 아마존의 무사가 20세기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떨어지면서 생기는 일이에요. 이거 내용을 말하기 아쉬울 정도로 옛날 수업 중에 몰래 반찬 집어 먹던 달근달근한 게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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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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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흐리멍텅 춥기는 오질라게 춥고 오랜만에 교보를 향해 활보할까 종각지하도를 나서는데 바람이 휙 하고 으스스 속삭이더라. 따뜻한 지하도와 연결되는 영풍으로 가라고. 나는 왜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더 탈까 아무리 고민해 봤자, 결론은 쿨맥스 액티브 내복밖에 떠오르는 게 없고, 그렇다고 여름에 더위를 안 타는 것도 아니고, 날씨는 사시사철 징글맞게 나와는 멀어져만 간다. 나이 탓을 해보고 싶지만 울 엄니도 안 춥다는데 감히. 나는 한낮의 섭씨 25도 여름과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체감 -1도의 겨울을 좋아할 뿐이다. 여하튼 따신 영풍에서 오랜만에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코너마다 기웃거려본다. 원래는 몇 권 생각해 둔 게 있었는데, 결국 손에 들고 나온 것은 의외의 두 권이다. 롤랑 바르트 『목소리의 결정-원제 Le grain de la voix 목소리의 씨앗』과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랭 핑켈크로가 같이 쓴 『길모퉁이에서의 모험』. 죄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이다. 바르트가 만난 역자들은 들쑥날쑥했지만 외의 두 사람은 동문선에서 나오면서도 지금까지 좋은 역자를 만나는 복 아닌 복을 누렸다. 『목소리의 결정』은 롤랑 바르트의 대담집인데 이전에 『텍스트의 즐거움』에 실렸던 「스티븐 히스와의 대담」과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 「지식인은 무엇에 소용되는가」가 중복되어 있다. 말하기는 그 상대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쓰기보다 좀 더 명확하게 사유를 가로지르곤 한다. 대담집의 장점이라면 여러 대담자가 ‘하나의 목소리’를 적절히 상대화시킴으로써 더욱 객관적인 진실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이 말하는 것처럼 대립하는 다양한 의식이나 목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대화적 관계’를 통해 ‘축제적 다성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심심하지 않을 책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조금 아쉽다면 이 책에서는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에서 진행했던 모리스 나도와의 대담은 들어 있지 않다. 이전에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는데, 바르트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입문서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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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는 색다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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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에 헌책방 앞에서 잠시 앉았는데, 지나는 이가 헌책방은 한 번도 안 가봤다며 옆 사람에게 중고는 너무 더럽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선 들어가 보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팔자에 헌책방이 없는 걸 권한다고 될 일일까 싶어 말았다.
중요한 건 헌책방의 책들 대개는 더럽지 않다는 것이다. ‘더럽다’는 것은 손 떼 묻으며 자연스럽게 책이 낡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곱게 나이를 먹은 책과 전 주인에게 함부로 대해진 책은 확연히 모습이 다르다. 찢어지고, 비 맞은 자욱하며 볼펜으로 찍찍 마구잡이로 밑줄이 그어진 책을 상종하고 싶지 않기는 누구나 매한가지일 게다. 그래도 대개는 걸레로 한번 쓱 닦아 주면 새 책처럼 반짝이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 정도 수고는 즐길 수 있어야 헌책방이 훨씬 신나고 재미난 곳이 된다.
책을 애지중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보고 마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 시절 신줏단지 모시듯 책을 대할 때가 있었다. 날마다 책을 보는 게 아니라 닦는 게 일과였는지라 앞의 수사가 그닥 민망하지 않다. 장정일처럼 책에 지문 묻는다며 손을 씻고 책을 읽은 것도, 초판만 고집하는 것도, 책에 볼펜 따윈 절대 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책을 닦을 때만큼은 나도 손을 닦았다. 열심히 닦고 빛나는 책을 보고 있으면 장서가니 애서가니 하는 휘장이 없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헌책방 글을 마무리 지으며 이왕 쓰는 글 알뜰한 도움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다녀 본 곳 중 ‘어디 헌책방이 좋다더라’ 혹은 소개하는 것은 몫이 아니기도 하고 능력도 안 되는지라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말을 주섬주섬 담아 볼 참이다. 그러니깐 이 얘기는 헌책을 새 책처럼 만드는 나름의 노하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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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헤매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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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만나는 ‘우연’이 차츰 쌓이면, 언제고 찾던 책이 눈앞에 있을 때의 떨림과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책이 주는 설렘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흥분된다’로 끝내기엔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오랜 시간 퇴적된 책 냄새, 그 빛바랜 종이에 눌린 시간이 한꺼번에 나를 들이친다. 그러면 몸이 훈훈해지는 게 어째 찬찬히 책을 살필 기운이 난다.
어느 때는 키보다 훌쩍 높아 벽이 되어버린 책들에서도, 구석 먼지에 홀대받던 곳에서도 주인을 기다리는 책은 꼭 있기 마련이다. 연이란 그치지 않고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 돌듯 닿는가 보다. 조우하게 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이전 주인의 밑줄과 메모를 만나게 된다. 그런 메모와 밑줄이 헌책을 사기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책을 유일무이하게 하고 빛나게 한다.
퍽 오래전 헌책방에서 듬성듬성 마음을 잡는 책들을 쫓다가 고정희의 <이 시대의 아벨>을 어루만졌다. 책의 맨 앞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한겨울
1도씩 기울어져 가는
어머니의 허리 노동을
나는 이 시집으로 빼앗았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오래 사십시오.
1984. 3. 25”
나는 시보다 이 메모에 먼저 밑줄을 그었다. 이것은 여느 책에 딸린 유명한 작가들의 덕지덕지 한 찬사보다 훨씬 공명이 크다.
한때는 금서목록을 주욱 적어 놓고 헌책방에서 찾아보는 재미를 가져보기도 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재미이고 책 사냥일 뿐이었다. 지금이야 어느 서점에서라도 구할 수 있다지만 <페다고지> 3년,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2년이란 말이 농처럼 돌았다. 소지하고 있다가 걸리면 구속되고, 검찰의 구형이 각각 3년, 2년이었다는데 까마득한 얘기이다.
그것들을 헌책방에서 본 날이면 책장을 천천히 넘겨가며 메모들을 들춰보곤 했다. 고백건대 항시 비장한 글로 가득했던 그 사회과학서적을 나는 읽어낸 게 거의 없었고, 조금 지나서는 아예 들추지 않았다. 그냥저냥 재미가 없었고, 누렇게 해바랜 책에 유달리 붉고 선명한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금 같았다.
어느 헌책방에서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은 살아있다. 그 살아있음이 더 빛나게 될지 아니면 사장될지는 다음 주인의 몫일 테고, 책은 끊임없이 소용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닦아주고, 살피고, 손때가 묻어나야지, 책장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만 남는다면 그 책장은 책의 무덤이 되고 만다. 책장은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책이 잠시 머물며 쉬는 곳쯤으로 남아야 한다.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면서도, 고른 책을 셈하면서도, 방 한구석에 책을 놓으면서 여기가 그들의 무덤이 아니길 바란다. 그 바람이 내 책 읽기를 독려하겠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놓아버리면 까마득해지리란 것을 안다. 책을 닦고, 목차를 훑고, 서문을 읽고, 새로 꽂힐 자리를 어림짐작해본다. 이것이 이 책들이 빛을 발하는 시작이기를 기대한다. 내 책장에서 오래 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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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 무협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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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무협학생운동 표지
김영하 무협학생운동

김영하의 등단 작품은 누가 뭐래도 95년에 발표한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어설픈 시뮬라크르와 나르시시즘 그리고 반전을 적절하게 섞여 나온 퓨전 소설. (제목도 그런가? 김이소의 ‘거울 보는 여자’와 ‘칼에 대한 명상’을 싹둑 잘라서 붙여 논 듯한, 김이소 소설이 나중에 나왔을까? 웃자고 한 말이니 패스 ^^)
김영하의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 남진우를 대상으로 한 거 아니냐는 의혹을 남겼던『흡혈귀』? 일그러진 욕망과 판타지가 뒤덮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니면 김영하 스스로 최고로 꼽는 『검은 꽃』? 무엇이어도 좋다. ‘김영하의 소설엔 서사가 없어’라는 평은 『검은 꽃』으로 시들었고, 도시에서 자라서 어릴 적의 경험이나 입담이 부족하다는 소설쓰기의 핸디캡은 도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다. 작가 후기가 소설 전체를 반전시켜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썩 개운하진 않지만, 『아랑은 왜』를 떠올려 봐라.
스스로 김영하의 팬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의 소설 아닌 것도 찾아서 읽어보고 그의 궤적을 쫒고 있겠지. 나름대로 전작주의자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김영하의 첫 번째 소설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등단 작이 첫 소설일까? NO
꽤 오래전 절판 되었고, 김영하의 이름이 한층 부각되면서 다시 찍어내자고 했다지만, 본인이 크게 탐탁지 않았다던 소설이 있다. 『무협 학생운동/ 김영하 / 도서출판 아침 / 1992』
이게 뭐야 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말하자면 80년대 학생운동을 무협소설의 형식으로 극화한 것이다. 그도 가능 하겠다싶은 것이 당시에는 군부독재라는 악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선의 이분법이 들어맞았으니, 즉 적과 아군이 분명했으니 꽤나 재미난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공안부 짜바리들이 그랬단다. “이젠 x발 무협지 읽으면서 니들 잡으러 댕겨야 하냐?”.
73억 꼼쳐뒀다 발각된 전두환은 전두마왕으로 노태우는 노갈, 안기부는 안기마귀, 백골단은 백건단, 주사신공의 그 최고 일절 자주권… 등등 얼핏 보면 아주 흥미롭지만 더도덜도말고 여기까지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도저히 ‘그 김영하가 이 김영하 맞아?‘ 라는 생각을 떨 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김영하는 잘 쓰는 정말 재밌게 말하는 작가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이 소설은 김영하를 통시성안에서 보게 해준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힘들었을 일이 주르륵 멋대로 연상이 되니 말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쓰면 늘기 마련이다’의 최고의 예가 될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
김영하는 진행형일까? 어디로?『무협 학생운동』 작가 후기의 끄트머리를 가져온다.
“…… 그리고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한 때는 같은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하였으니 지금은 자신의 등 뒤에 깔린 쇠사슬을 끌며 최루탄 연기 가득한 하늘로 날아간 영원한 이름, 한열이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
발굴지 : 일산 / 집현전 (약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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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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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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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무때(주방용) – 책 표지를 닦는 게 가장 탁월한 세제 중 하나이며 냄새가 역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세제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닦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동네 ‘무조건 천원 코너’에 가시면 안경 닦는 천 비스름한 거 살 수 있습니다. 안경 닦는 천보다 두껍고 크죠. 이 두 가지가 준비되면 대부분 책을 새책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물파스 – 책 표지에 볼펜이나 사인펜 자국을 지울 때 물파스를 한 번 바르고 닦습니다. 아주 말끔해지죠. 가려운 데나 벌레 물린 데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입니다.
도서관 인장이 찍힌 책
– 책 위에 아래에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도서관 인장이 찍혀 있는 책을 만나면 아찔하죠. 유한락스를 이용합니다. 초보자에게 약간의 무리가 있어서 처음에 할 때는 두 명이 함께 하는 게 좋습니다. 우선 물러터진 칫솔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마른 헝겊. 유한락스를 콜라 뚜껑만큼 콜라 뚜껑에 담은 다음, 동생이나 집에서 노는 사람 아무나 데리고 와서 책을 꽈악 누르라고 하면서 칫솔에 유한락스를 발라 한번 살짝 쓰으윽 칠해줍니다. 바로 마른 수건으로 유한락스를 닦아 냅니다. 아주 적은 양을 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책이 울어버릴 수 있습니다.
책 첫 장에 도서관 인장을 도저히 ‘못 참겠다‘하시면, 그 뒤에 안 쓰는 종이를 데고 유한락스로 살짝 문질러 주면 됩니다. 종이를 대는 이유는 뒷장이 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등에 스카치테이프 자국
책이 삐까뻔쩍하다가, 한 부분만 누렇게 뜬 경우가 있죠. 안은 한번 펴보지도 않아서 새 책인데, 겉에 그 누런 자국 때문에 이걸 살까 말까 망설이는 분을 위해서 특별한 세제를 소개합니다. 홈스타(욕실용)을 사용해서 닦아주면 그 누렇게 오래된 절대 지워질 것 같지 않은 때가 가십니다. 홈스타 같은 경우는 책 전반에 사용하는 것은 안 됩니다. 세제 자체에 돌가루 같은 게 있는지 책이 긁힐 수 있습니다. 여하튼 누런 부분만 살짝!
사포 – 흔히 빼빠라고 하죠. 잘 이용해야 합니다. 잘 못하면 책 전체가 뚱뚱해지고 보기 싫어지거든요. 두 가지를 준비합니다. 알이 고운 것과 중간 정도를 이용합니다. 책 위아래의 먼지를 털어 낼 때 쓰는 게 좋습니다. 글씨 지우려고 하다간 책이 망가지기 십상이니, 어지간하면 먼지 정도만 털어내는 데 이용하세요. 먼지가 10년쯤 묶은 외서 하드커버에 아주 적격입니다. 종이의 원래 색깔을 찾아 주죠. 한 30장 정도를 단위로 사포 질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한꺼번에 하면 책이 싫어하겠죠.
막강파워 절단기
누가 쓰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지만 가끔 실뜨기하듯 책을 깎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신집중하고 수양을 오래해야지 가능하죠. 책장에 묻은 오래된, 묶은 남모르는 자국, 누가 지거 아니랄까 봐, ‘94211-.. 어쩌고’하며 이름과 학번을 매직으로 써 놓은 책에 최고의 효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학교 앞 제본소 같은 곳에서 잘라달라고 하세요.
주의! – 대개의 책은 겉표지에 살짝 코팅이 됐습니다, 코팅이 안 된 책들도 있죠, 코팅 안 된 표지를 위의 세제를 썼다가는 아작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 있던데, 조심하시길. 코팅 안 된 책은 지우개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때를 끈질기게 지우개로 지워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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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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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비가 추적거리는 게 몸이 한없이 늘어진다. 이런 날이면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다. 이따가 걷자며 곱살 진 마음을 달래는데 금세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앉는다. 한적한 길로만 여기던 곳도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번화가 못지않게 오가는 이들이 많아진다. 골목 끝을 돌자마자 헌책방이라는 녹색 간판이 섰다.
퍽 오래 전에는 버스를 타다 ‘헌책방’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면 무작정 내리곤 했다. 그렇게 들어선 곳은 먼지 쌓인 책들만 모로 즐비한 곳도 있는가 하면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들로 붐비는 곳도, 주인장은 책을 닦고 책 손 몇이 멀찍이 선 곳도 있었다.
이 녹색 간판의 책방은 어떨까 싶었다. 우산을 접어 문밖에 내려 둔다. 조금 빡빡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 냄새가 확 덮친다. 구석 백열등이 비추는 곳에 천장까지 빼곡히 누운 책들을 보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헌책방이 먼 데 있는 기억을 친다. 그때도 꼭 백열전구 아래 이런 냄새가 났다.
신촌 근방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사람들에게 치이는 곳보다 우산을 뱅뱅 돌려도 아무도 피해를 받지 않을 만큼 한산한 곳이 좋았다. 지금 홍대에서 신촌 방향의 길은 고작 서너 개 미술학원만 있을 뿐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 길 한쪽께 작은 헌책방이 있었고 학교가 파하면 늘 들르는 곳이었다.
한창 입시로 바쁠 때도 친구와 책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지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책을 뒤적이곤 했다. 세로로 쓰인 글을 따라가며 모르는 한자를 서로 묻고, 큰 소리로 떠들다 핀잔을 듣기도 했다. 책방 아저씨가 문을 닫는다고 말해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 읽은 책에 대해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통에 이바구가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해지나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파트너와 주로 ‘헌책방’에서 만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낡은 책 냄새는 상대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줬고, 좁은 공간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상대의 말을 터치해 가면서 잘 이어갈 줄 몰랐고, 어느 즘에 찾아온 정적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상대가 무슨 말이든 하길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런 내가 끊이지 않게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책’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읽은 책들 중 밑줄 그었던 부분을 기억해 책을 고르고 상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나만큼 그도 기뻐하고 그만큼의 감동으로 벅찰 것이라고 혼자만 믿곤 했다. 아주 나중에 그는 헌책방에서 만나는 게 달갑지 않으며, 책보다 하다못해 천 원짜리 핀이 더 감동적이라고 전했다.
헌책방을 순례하듯 다니던 시절, 인천의 한 헌책방의 주인장이 ‘헌책방이 뭐 같아요?’라고 물었다. 자주 들락거리며 낯이 익자 건 낸 말이지만 좀처럼 가늠할 수 없기도 했다. ‘멀리서 오는 거죠?’라고 되묻고는 ‘헌책방은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무대기 책을 산 날이면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책을 걸레로 닦고는 침대 옆에 두고 표지부터 찬찬히 살핀다. 저자 서문만 읽고 자자며 몇 장 들추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날을 지새운 날도 밤이 짧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낡은 책 한 귀퉁이에 이전 주인의 부스러질 것 같은 메모에 밑줄을 보탠 날은 그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 모든 ‘우연’이 주는 갈래를 헤매는 건, 흡사 시작과 끝이 닿아 끝나지 않는 산책과 같았다. 그 몽상의 시간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숨소리만 가빴을 것이다. 책 읽기가 뭔가 대단한 것을 머리에 꾸역꾸역 넣자는 게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허기진 마음이 채워지는 거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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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컬리지언총서를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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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만난 출판사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까. 아직 동네서점 한 귀퉁이나 인터넷, 대형서점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출판사부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재미난 출판사까지. 책을 읽는 이들 나름대로 자신에게 특별한 출판사가 있을 텐데, 책의 내용을 떠나서 출판사가 책 구석에 슬쩍 적어놓은 글만으로도 정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걸 찾아 읽는 맛도 쏠쏠하다.
[새와물고기]는 헌책방의 끝간데없는 베스트셀러일 것이다. 물론 시집이나, 유머집 같은 다소 엉뚱한 걸 낸 적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 선이다. 보네거트와 코진스키, 마가랫 애트우드를 만날 수 있는 출판사였으니 말이다.
보네거트의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봐』의 첫 장 “새와 물고기는 힘들면 다시 보이는 요지경입니다”를 시작으로, 『고양이 요람』에서는 “새와 물고기는 전자파의 세상에 생긴 아주 작은 대피소입니다”, 『죽음과 추는 억지춤 또는 어린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서는 “새와 물고기는 둥근 것, 굽은 것, 물렁물렁한 것입니다”라는 짧은 글귀 들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풀린다.
코진스키의 『거꾸로 선 나무 – The Devil Tree』의 “새와물고기는 가장 처음에 있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입니다.”와 『눈먼 데이트』에서 “새와물고기는 세계로 향한 독자의 창입니다”는 조금 식상한 감이 있지만, 마가랫 애트우드의 『케잌을 굽는 여자 – The Edible woman』는 그 진부함을 뒤엎기에 충분하다. 갓 구워낸 케이크가 풍기는 신선함. “새와물고기는 이 세상에서 없어진 새들과 물고기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새와물고기]에 심심한 조의를 표할 따름이다. 참고로 보네거트는 모조리 절판되는 불운을 딛고 얼마 전부터 ‘금문’에서 새로운 역자를 만나 재출간 되고 있다. 나로선 좋은 소설이니 환영이지만 왜 그렇게 비싼 건지. : (
[프로젝트 409]출판사는 장석남의 『별의 감옥』이라는 시선을 낸 적이 있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 수록된 시와 별 차이는 없지만, 특이한 것은 매 페이지 요코(Yoko)의 삽화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빨간색 양장의 표지에 별의 감옥이라고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이 여간 촌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장석남의 시는 표지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반역이다. 의아한 것은 발행인이 이광호인 것인데(언제 출판까지 손을 뻗쳤단 말인가? 물론 더는 없으니 망한 거겠지? 😐 ), 그보다 더 재미난 것은 책의 맨 마지막의 카피다. “개와 JAZZ를 사랑하는, 휴머니즘과 프로페셔널을 추구하는 그룹-409!” 엽기 내지는 컬트랄 밖에.
[동문선]‘ 성종 때, 서거정이 편찬한 명문 선집(選集)’이라는 생각보다, ‘내 취향에 ‘딱’인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출판사‘라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혹자는 출판사 이름을 불문선으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농을 던지기도 하는데 여하튼 양서를 끊이지 않고 찍어내는 출판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문선이 가진 판권의 화려함과는 정반대로 번역의 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처음엔 짜증스럽던 것이 이제는 무서워지려고 한다. 과연 편집자가 있기는 있는 것인지.
오래전 동문선의 책을 샀을 때, 그 안에 덤으로 들어 있던 도서목록 같은 게 있었다. 책과 출판문화에 대한 여러 얘기가 있었는데, 그중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백과사전을 찢자’는 글귀였다. 대강의 요지가 찬장에 백과사전 꽂아두지 말고, 유용하게 쓰자는 말이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은 아직도 선명하다. “때 묻고 찢어지고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백과사전 한 번 구경해 봤으면 좋겠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바라 건데 처음의 반만이라도 닮아라. 책값도 따라서 닮으면 좋고 : ) 
[까치], 방안의 책장을 쭈욱 둘러보면 여기저기 분야별로 몇 권씩 꽂혀있다. 가장 이쁜 장정을 한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 2, 3』2쇄 이다. 1권은 노란색, 2권은 밝은 갈색, 3권은 파란색. 1쇄 때의 그 밋밋한 하얀색 표지에 색을 입히니 책꽂이에서 유달리 빛난다. 누가 까치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까치도 이제는 시류(?)를 쫓아 『아르센 뤼팽』 전집 이후에는 표지가 알록달록해지고 있지만. [새물결]의 출판사 카피가 “長江의 앞 물결이 뒷물결을 밀어낸다”라면 모든 [까치]책에 그들만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는 카피! “값/뒤표지에 쓰여 있음”
[이후]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게다. 헌책방보다는 큰 대형서점에 더 많이 꽂혀있는, 그보다는 학교 앞 작은 사회과학 서점 한 칸이 더 잘 어울리는 책들. 99년 여름이었나 보다 [공덕동/굴다리서점]에서 『신좌파의 상상력』을 샀다. 다 읽어낼 자신이 퍼뜩 들지 않았음에도 몇 장을 넘기다 책을 덮고 큰 숨을 들이쉰 것은 “컬리지언 총서를 펴내면서”라는 짧은 글을 읽으면서였다. 기형도의 ‘대학시절’로 시작되고 있었다. (내 군대 이등병 시절, 화장실벽 틈에 숨겨두고 틈틈이 보던 게 기형도의 수화였다.)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 그러다 난데없이 다른 시가 머리를 쳤다. (그 이등병 시절, 막 울음이 났던)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그러다가 [이후]의 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청년입니까? 들어본 지 오래된 말이라구요. 저도 불러본 지 오랜만입니다. 저희는 당신을 앞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쑥스럽다구요? 아닙니다….” 나는 듣고 싶었다.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해도 듣고 싶었고, 그날로 책을 다 읽어냈다.
한 권의 책을 통틀은 것보다 단 몇 줄로 더 큰 공명이 일 때가 있다. 이후가 이후에도 나날이 번창하기를 !
to be continued
2000-02-02 05:38:43 posted by anti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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