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카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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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6일 고려대에서 라디카 동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염없이 게을러서(바쁘기도;;;) 이제야 녹취를 풀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서 올립니다. 389일간의 농성이 있었으나, 농성 해단식이후 농성투쟁단이나 이주지부(현 이주노조) 여타의 연대단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막 끝났을 즈음엔 연대단위로써 평가 같은 것을 쓰려고 준비를 하다가, 그보다는 이주 분들의 목소리로 농성에 대해서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라디카 외에 몇 몇 이주동지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냥 목소리만 잘 저장해 두고 있답니다. 😉 그 중 하나를 풀어 올립니다. 편의상 말이 짧습니다.
부깽 : 이주노동자는 남한사회에서 약자이다. 그 앞에 여성이 붙었을 때 이주여성이라고 했을 때, 일상이나 투쟁 중에 더 큰 불편이나 차별은 없었나.
라디카 : 농성 할 때 처음엔 같이 싸우러 왔는데 여성, 남성 느낌이 없었다. 농성하면서부터는 쪼끔 느낌이 있었다. 어디 갈 때나, 집에 갈 때나. 회의 할 때, 세 명이 있었는데 소하나, 링링.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남성들과 한국 사람들만 회의를 했다. 처음엔 그랬다. 우리한테는 한 번도 안 물어보고, 그래서 맘이 많이 다쳤다. 우리도 싸우러 왔다. 그러다 한 달 가까이 소하나하고 우리끼리 얘기했다.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우리는 당신들한테 말도 못하고 그런 얘기를 한 뒤 조금 바뀌었다.
부깽 : 투쟁 현장이라지만 여성과 남성의 독립된 공간이 없었다.
라디카 : 처음엔 우리가 들어갈 때 여성자리 나성자리 구분이 없고 같이 있었다. 그 땐 남자친구 있어서 3번 텐트에 같이 있었고, 링링도 남편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소하나는 링링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힘들었다. 불편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생활했다. 우리가 여러번 말했다. 우리는 여성이니까 우리 자리 따로 만들어야 돼. 그때 문제도 많이 생겼다. 잠 잘 때도. 그때는 머리 아프고 정신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중에는 4번 텐트는 여자텐트가 됐다.
부깽: 4번 텐트를 여성들이 이용하게 된 게 농성 반년이 훨씬 지나서다. 두 달 쯤 지나서 얘기했을 때 한국 활동가나 같이 농성하던 사람들의 배려는 없었나?
라디카 : 우리가 텐트별로 밤에는 회의를 했다. 그때 우리가 얘기했다. 제가 3번 텐트 네팔공동체에, 소하나 링링이 4번에서는 얘기를 하고. 그렇게 하다가 그 얘기가 상황실회의에서 얘기하고 그랬다.
부깽: 그 얘기 후에 바로 됐나?
라디카: 아니다. 그 안에서도 얘기가 많았다. ‘여기 투쟁하러 온 건데 여성 남성이 뭐가 중요하냐’ 그런 얘기가 많았다. 투쟁하는 것은 맞지만 여성들 우리 3명하고 한국 여성들도 같이 있잖아. 다 합쳐서 하면 괜찮을 텐데, 그때는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내가 얘기 하다가하다가 3개월 더 지나서 4번 텐트 여성이 이용하게 됐다.
부깽: 농성 초반에 단식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라디카: 처음 단식을 시작할 때 우리는 민주노총도 다 알고 하는 줄 알았는데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단식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민주노총에 가서 얘기하는데 그때 그분들(민주노총)이 ‘우리는 몰랐다 상황실이 우리에게 안 알려줬다. 그래서 몰랐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었다. 단식 시작 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왜 했냐? 단식하는 이유가 뭐냐?’ 단식하는 이유가 뭔지 선전을 하고 여러 단체에 알려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여러 단위에 알리지 않았고, 그거 알려줘야지 사람들이 관심가지고 연대했을 텐데.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금 그랬다.
부깽: 단식 이후에 몸은 어떤가?
라디카: 단식 있을 때 여기 골반부분이 이상하게 아팠다. 단식 시작하기 이주일 전부터 아팠다. 단식해서 약 먹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약 안 먹고 30일까지 단식하고, 한 달 동안 단식하고, 단식 끝나고 일주일 있다가 너무 많이 아파서 약 먹었다. 단식 할 때는 너무 아파도 참았다. 동지들 석방 할라고 약도 안 먹고 그냥 했는데. 근데 딱 끝나고 너무 힘들고 아파서 예전에 그때 의사가 준 약을 먹었다. 그때는 너무 늦었다. 단식 끝나고 안양에 가서 병원에 다니고 집에 왔는데 많이 아팠다. 한 달 넘어서 병원에 갔다. 여기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도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아프고, 내가 혼자 스스로 했다. 병원에 다니는 거,
부깽: 단식 2주 때 몸이 아프다는 것을 농성장에 알리지 않았나.
라디카: 텐트에 얘기 했다. 그때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근데 그 때는 내가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부깽: 단식 중단하라는 말은 안했나?
라디카: 그 말을 했다. 자주했다. 근데 아무 이유 없이 단식 풀어라 그런 얘기 많이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목적이 있는데 아무 결과 없이 어떻게 단식을 그만 두냐며 상황실장과 많이 싸웠다.
부깽: 처음에 단식 시작했을 때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말을 안했다 알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걸 단식하는 동지들이 알게 된 게 얼마나 지나서였나?
라디카: 아마 15일 넘어서 인거 같다. 보름이 지나서 민주노총에 갔었는데 말을 안 해서 우리가 단식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하는 말이 “너희들 언제부터 하는지 몰랐다. 안 말해줘서 몰랐다.”
부깽: 단식 날짜가 며칠이었나? 기간?
라디카: 2월 17일부터 3월18일까지 30일 가까이 했다.
부깽: 단식을 푸는 과정에서 식사는 어땠나?
라디카: 따로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농성장에서 식당에 나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돈 아까워서 어떻게 밖에 나가서 먹나, 나는 단식 풀고 안양 이주여성 센터에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치료 받았다. 시실라 언니가 많이 도와주고 그 뒤에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알아서 돈 달라고 해서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부깽: 농성장에서 따로 챙기지는 않았나?
라디카: 말을 했는데, 해준다고 했는데, 하루 이틀 정도만 챙기고 이후엔 안했다. 우리도 무서웠다. 단식이 처음이고 어떻게 식단을 챙겨야 하는지 몰랐다. 돈이 아까워서 농성장에 돈이 없어서 하루에 두 번 세 번 (챙겨) 먹어야 하는데, 돈 문제로 바깥에 나가서 먹을 수 없었다. 다른 동지들한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깽: 실은 이때 농성장에서 단식하셨던 분들이 편의점에서 혼자 죽 사먹는 걸 계속 봤다.
라디카: 농성장에 돈이 없었다. 우리가 미안해서 돈 달라는 소리도 못했다. 그래서 혼자 해결했다. 거기서 알아서 했어야 하는데, 우리도 말을 하다가 말았다.
부깽: 치료는 어떻게 했나?
라디카: 농성장에 있을 때는 의사들이 자주 와서 병원도 데려가고 그랬다, 그리고 몸에 병 있다고 약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단식하고 있어서 약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단식 끝나고 이후에 두 달 있다가 더 아팠다. 계속 참았다. 단식 풀고 일주일 있다가 약 먹었다. 먹을 때는 안 아프고, 그 담에는 조그만 염증이 생겼는데 그 뒤에 커져서 많이 아팠다.
부깽: 단식에 대해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라디카: 단식 끝나가지고 농성장에서, 솔직히 얘기하면은, 우리 단식했던 사람들 생각은 우리 병원에 데려가서 건강검진을 받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안했다. 상황실에서 준비한 게 아니라 연대단위에서 와서 텐트 안에서 (건강검진을) 한 게 다였다. 상황실에서는 여기서 하니깐 신경 쓴 것 같지는 않다. 거기서(상황실)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나하고 단식했던 사람들 화가 많이 나고 너무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때부터는 농성에 대한 희망이 많이 줄었다. 농성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단식 때 염증이 커져서 이렇게 된 거다. 지금까지 약을 먹고 있다. 일은 계속 못 하고 있다. 약은 3개월 정도 더 먹으면 된다. (라디카는 지금도 여전히 일주일에 3번씩 병원에 가고 있다.)
부깽: 농성장 내에서 갈등이 있었나? 사안에 대한 결정들이나 그 결정과정에 대해 이주동지들의 참여 문제를 들어보고 싶다. 다시 농성을 한다면 꼭 이건 준비하고서 하자고 생각한 거나, 이건 미흡했다고 생각한 게 있나?
라디카: 그때 우리는 농성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냥 ‘우리 권리 때문에 싸워야 돼’라고만 생각했고, ‘한 달 정도만 싸우겠지’라고 생각했다. ‘한 달 까지는 싸울 거야’ 그러면 우리 문제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농성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싶다. 여성동지들이 너무 힘들었다. 여성 남성 따로 독립된 공간이 있을 거라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소하나에게 농성에 함께 참여하자고 말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링링도 참여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농성을 다시 한다면 여성 공간을 따로 만들고 시작해야한다. 그걸로 많이 싸웠다. 소하나는 특히 많이 싸웠다. 혼자 힘들게 싸웠다. 나와 링링씨는 애인이 있었는데 소하나는 혼자였다. 소하나는 너무 힘들었다. 다시 농성을 하면은 이주노동자 말이 우선 됐으면 좋겠다. 지난 농성처럼 한국 활동가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가 돼야 한다.
부깽: 해단식 이후에 농성장을 떠나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때 어려운 점이 있었나?
라디카: 나도 다른 동지들처럼 방세 줄 돈도 없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도 못하고 너무 어려운 상태였다. 어려운데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래서 액세서리 만들어서 학생들이나 친구들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살았다. 나는 그렇게 했지만 나보다도 같이 농성했던 다른 동지들이 방도 없이 갈데없이 더 힘들었다.
부깽: 이런 생계 문제로 민주노총이나 상황실에 건의 하지는 않았나.
라디카: 얘기가 나왔지만 나는 너무 열받아서 회의에 가지 않았다. 방도 없고 갈 데도 없는데 어떻게 해주세요. 이런저런 요구를 했는데 안 해줬다.
부깽: 제작년부터 작년까지 1년 넘게 농성투쟁을 했다. 다시 이렇게 하라면 할 수 있겠나?
라디카: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 농성할 때 부족한 것들 이주노동자들이 몰랐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많이 배웠다. 이 배운 것들로 새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깽: 농성투쟁 이전에도 투쟁 경험이 있나?
라디카: 아니 처음이다. 농성 시작할 쯤 집에 가려고 했었다. 단속이 너무 심해서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회의가 있었는데, 샤말타파를 만났다. 샤말타파의 말을 듣고, 회의에서 나온 얘기를 듣고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깽: 별 얘기 안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다음엔 진짜 맛있는 커피를 사겠다.
라디카 :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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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근방에 아는 데라곤 보헤미안 하나였는데, 문이 닫힌 바람에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곳을 찾아 30여분을 헤매다 결국 다시 고대과학도서관(?)으로 돌아가서 자판기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눴다. 이후에도 라디카 동지를 여러 번 만났지만 아직까지 맛난 커피를 대접하진 못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녹취를 풀면서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라디카는 단식 얘기를 하면서 내내 울었다. 4명의 동지들이 단식투쟁을 했었는데, 라디카 외에 마숨과 단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까지만동지는 단식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대신했다.
한참 지난 뒷얘기 – 라니카는 그간 잠시 일을 했지만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지금은 피자매연대에 달거리대를 만들어 파는 것과, 비즈공예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가는데, 지금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는 상황이다. 가장 치열한 투쟁은 아주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것들,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들과 싸우게 된다. 우리의 구호와 연대는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또한 우리들의 사적 영역을 바꾸자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들, 사적 영역이 모인 것들, 그게 바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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