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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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홍이와 북한산에 다녀왔다. 구기터널 방면으로 올라서 비봉을 지나고 승가사 쪽으로 내려왔다. 좀 더 긴 산행을 즐기고 싶었는데, 아이젠을 미처 준비 못 해서 아쉽지만 일찍 맺음을 한다. 오늘 산행 코스는 처음이었는데, 한강과 일산이 훤하게 들어온다. 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먼 미래의 도시 같다. 그것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를 결정하는 것이 도시의 외양은 아닐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신촌에 들렀고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비터문』과 프랑코 페루치의『내가 신이다』를 샀다. 브뤼크네르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고 있자면 숨이 가빠오며 귀 아래 맥박이 한없이 두근거리곤 한다. 그는 단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로만 폴란스키의 “비터문”의 원작이 브뤼크네르의 소설이다. “영화는 고교시절에 봤었는데, 역시 재홍과 함께였다.”고 십몇 년이 넘게 믿고 있었다. 소설을 훑어보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라 내가 정말 이 영화를 봤던 것일까? 갑자기 내가 알고 경험했다고 믿던 사실이 불안해진다. 재홍아 우린 정말 이 영화를 봤었니? 아니면 영화가 원작에서 많이 각색된 것일까?
『내가 신이다』는 ‘나는 종종 내가 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나는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기억은 제멋대로 왔다가 가버린다.’로 시작하고 있다. 단 두 줄 만 가지고도 마구 설렌다. 마저 읽기를 마쳐야 하는 것들을 끝내자마자 『비터문』과 『내가 신이다』를 볼 셈이다.
집에 돌아오니 5시 30분쯤 됐었나? 스터디 준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중간에 몇 번 깼던 것도 같은데 모르겠다. 일어나니 3시를 지나고 있다. 무언가 꿈인지 생신지 도통 구분을 못하겠어 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혹시 내 문자 보낸 거 받았어? 나는 분명 문자를 보냈다. 이건 너무도 생생하다. 문자가 온 적이 없단다. 이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문자가 단지 어떤 이유로 안 갔을 뿐일까? 내가 그 잠깐 머물던 곳은 어디일까? 기억은 제멋대로 왔다가 가버린다? 이 기억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중학교 때였다. 시험기간이라 날 새며 벼락치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와 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쓰윽 눈인사만 하고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내 어깨를 두어 번 치면서 ‘열심히 하렴’ 이라는 말을 하고 방을 나가는 것이었다. 아침께 어머님께서 밥을 챙기시는데 ‘아빠는요?“라고 물었다. 어머님은 어젯밤에 아빠가 집에 안 들어왔다고 말씀하신다. 그건 단순히 꿈이었을까? 나는 졸지도 않았고 잠을 자지도 않았고, 내내 멀쩡했는데 말이다. 대체 내게 기억이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어쩌면 기억이란 결정불가능의 영역에서 그 경계의 틈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아닐까? 제멋대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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