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프랑스 남부

359

5.8
글로리아씨네서 하루 더 묵었다. 그간 밀린 사진을 정리하고 메모를 옮겼다. 하고 싶은 것 없이, 스스로 준비하지 않은 일들은 퍽 달갑지 않다. 왜 여기에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거기에서 하지 못한 일들을 여기에서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9
알케니즈(Alcañiz) 근처까지 왔다. 하나의 마음을 이어 달리는 내내 함께였다. 행복했다. 100km를 조금 넘게 달리면서 가장 긴 오르막과 내리막을 만났다. 시인은 ‘간신히’라고 말하고 소설가는 ‘겨우’라고 말한다. 그 사이를 저울질하며 달렸다. 이름씨는 세 번째 넘어졌다. 다친 곳이 반복되면서 상처가 커졌다.
일기예보는 비가 와도 1mm 안팎이라고 했는데 퍽 많이 왔다. 공동묘지 바로 옆 주차장에 텐트를 쳤다. 수많은 죽음을 객들은 애써 외면하고 비바람만이 애도한다. 텐트 안은 아늑하다.
몸을 닦다 지난번에 넘어지면서 생긴 멍을 봤다.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다. 때아니게 김승희 <스무살의 푸른시간>이 떠올랐다. 거기서 시계풀의 편지를 봤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얄팍한 상상은 멍을 보고서 겨우 멍을 말한 책을 떠올리는 정도이다. “하늘이 푸르른 것은 그런 멍든 사람들이 하늘을 등지고 푸른 언덕 위에 가슴을 대고 아아 가만가만 자신의 파아란 상처를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말을 스물을 두 번 엮고서야 이해하게 된다. “못 박힌 사람은 못 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지만 마음은 다시 한번 신기루가 아니고 ‘내 못을 빼는 여행이 돼야지’라고 다짐해본다. 첫 다짐이다.

5.10
몸이 갑자기 아파서 30km 정도만 달리고 말았다. 어제 안장을 높이면서 약간의 무리가 있었나 싶다. 알케니즈는 옛 아라곤의 수도라고 한다.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2.5유로를 내고 성을 관람했다. 어느 호텔이 성을 사용하고 있다. 벽화가 제법 아름다운 곳이다. 성 근처 공원에 텐트를 쳤다. 실라스라는 아프리카 카보베르데(CAbo Verde)에서 온 이민자를 만났다. 5년 정도 됐다고 하는데 스페인은 이민자에게 박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외로워 보였고, ‘쎄나’라는 강아지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처럼 보였다. 함께 바에 가서 다른 이민자들과 잠깐 어울렸다. 처음 실라스는 한 짐 가득 실은 자전거를 보고, 여행자가 아니라 이민자라고 생각했단다. 그게 반가워 기꺼이 아는 척했단다. 낯선 곳, 낯선 사람이지만 스페인에서는 공통으로 별개의 존재들이라서 쉽게 어울렸다. 잠깐이지만 즐거웠다.

5.11
수돗가에서 양치하는데, 개와 고양이가 함께 밥을 먹는다. 노인은 똑 그만큼 나이를 먹은 개와 함께 산책하며 동네 고양이를 챙긴다. 개와 고양이와 노인, 그중 누구라도 없어선 안 될 것 같은 풍경을 만든다.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아파서 병원을 알아봤다. 의사를 만나는 데만 50유로라고 한다. 비싸다.

산타 마리아 성당. 어디에나 산타 마리아 성당이 있나 보다. 지난번 아라곤에서 들렀던 성당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경이롭다. 이곳에 머물면 저절로 신앙이 베일 것만 같다. 성당 앞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셨다. 스페인에서 마신 것 중 가장 좋다. 매니저는 친절이 베인 사람이다. 길가 테라스에 앉아 성당 바깥을 찬찬히 살피는데, 높이와 굴곡마다 다른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황새와 비둘기, 제비, 까마귀가 한데 있다. 성당은 그 모두를 포용하고 그 언저리에 사람의 자리를 남겨둘 만큼 크다. 새들은 분주하고 사람은 여유롭다.

며칠 쉴 요량으로 자전거를 접고 바르셀로나행 렌페를 타기로 했다. 역 뒤편에 버려진 성당이 있다. 벽은 흡사 전쟁의 상흔을 지닌 것처럼 곳곳이 패었고 인적은 간데없고 철탑에만 황새가 둥지를 치고 있을 뿐이다.

밤늦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습한 공기가 무겁게 들이쳤다. 스쾃센터에서 한다는 파티를 찾아서 여차여차 스쾃한 곳에서 머물고 싶다고 했다. 이미 꽉 차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공원을 찾아 들어가 텐트를 쳤다.

5.12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웜샤워를 컨택하려고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터라 번번이 거절당했다. 나 때문에 부랴부랴 하는 일이라 내내 미안했고, 동시에 불편했다. 바로셀로네타 해변(Playa de la Barceloneta)에 갔다가 스쾃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일행을 만났다. 엮여 있는 이들이 모두 친구인가 했는데, 한쪽은 30km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 한쪽은 시내 어딘가에 사는 이, 또 다른 일행은 어제 해변에서 모든 걸 털린 일행이었다. 누가 봐도 태초부터 친구인 양 전혀 위화감 없이 잘 섞여 있다. 해변에서 텐트를 칠 요량이었는데 어제 모든 걸 털린 일행들을 보고 스쾃한 곳에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러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이고, 믿어선 안 된다며 자기 쪽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양 쪽 다 똑 같이 그렇게 말했다. 급기야 주먹질까지. 그곳에 있기 갑자기 불편해져서 내일 낮에 찾아가기로 하고 어제 텐트를 쳤던 곳에서 다시 짐을 풀었다. 퍽 잘 조성된 공원이었는데 이름을 모르겠다.

5.13
시내 근처에 있는 스쾃장소를 찾아갔다. 바벨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곳이고, 상당히 넓은 장소다. 이름답다고 해야 하나 우리만 다른 말을 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중 택해서 말할 정도로 모두 유창하다. 바벨에는 모로코 이민자들과 마드리드 출신의 스페인 사람, 아프리카 기니에서 온 사람, 그리고 우리가 있었다.
낮에 한국 유학생을 만나 광대 결핵약을 받았다. 약이 너무 많아 입국을 거부당할까 수소문해서 보내 놓았다. 그가 자전거를 맡아 준다고 해서 밤 10시께 다시 만났다. 하숙생이고 공간이 좁아서 1대만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내 자전거와 트레일러 짐을 맡겼다.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훨씬 컸다. 바벨까지 40여분 정도를 걸어갔다.

5.14
비가 오락가락한다. 피카소 미술관을 관람했다. 시장에서 냄비를 하나 샀다. 처음 7유로를 불렀는데 5유로에 샀다. 손잡이가 특이해서 ‘팔랑 귀’라고 부르기로 했다.

5.15
종일 비가 내렸다. 구엘 공원을 둘러보고, 플라밍코를 봤다. 비에 흠뻑 젖어서 돌아올 땐 메트로를 탔다. 이름씨한테 바르셀로나에서는 메트로를 안 탈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유럽 전체를 통틀어서라고 한다. 바르셀로나는 어디를 둘러도 카탈루냐 기가 걸려있다. 분리 독립주의자들인가, 카탈루냐 주의 주도여서인가, 표지판도 스페인어와 카탈루냐 어가 같이 적혀있고, 만나는 이들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이 아니라고 한다.

5.16
사흘 전 맡긴 자전거를 찾아왔다. 이름씨와 광대는 이런저런 일로 나갔고, 나는 내내 바벨에서 다비드 씨한테 아프리카 역사에 대해 들었다. 다비드 씨는 엄청나게 기타를 잘 연주했고, 세세한 역사를 꿰고 있다. 적도 기니(República de Guinea Ecuatorial)에서 왔는데, 아프리카 중 유일하게 스페인 식민지였다고 한다. 바벨 2층에서 하늘을 봤다. 구름이 파란 하늘을 한 움큼 쥐고 간다. 참 빨리도 간다.

5.17
바벨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주구장창 잠만 잤다. 주구장창은 의태어 같고 주야장천은 그냥 한자어 같다. 점심엔 아브델 하디랑 담배를 몇 모금 폈다. 담배 인심이 좋은 곳이다.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린다.

마음에 살던 그리움이 하나둘 제 갈 길을 가면 그리움 머물던 자리마다 움푹 페인 자국들만 남아 한참 들여다본다. 어느 날 소나기 내리고 갠 날, 물이 고이면 비춰오는 얼굴들 떠오르고. 메마른 마음 보다는 북적대던 그리움. 너 그리고 그. 한 뼘쯤 되려나, 무수히 많은 네가 머물다 갔지. 그때 조잘거리던 소리.들. 지붕을 계속 두드리네.

5.18
바르셀로나를 떠나, 바벨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비는 여전하다. 바벨에 살던 이들의 페이스북 주소와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히샴 Hicham, 아브델 하디 Abdel Hadi, 다비드 David , 라몬 Ramon, 다하 Daha,

엽서를 샀다. 엄마의 기대가 멀리 있는 아들한테 엽서를 받는 건가 보다. 전화할 때마다 엽서를 보내라고 하신다.

마타로(Mataró)에 와서 텐트를 쳤다. 아무도 지나지 않을 곳 같다. 멀리 지중해가 벽처럼 서 있다.

5.19
아침 일찍 어느 아저씨가 텐트를 치워달라고 했다. 일하러 퍽 일찍부터 나왔고 하필 텐트 친 곳이 입구였다. 행동이 더딘 게 영 못마땅했던지 텐트 주변 풀들을 성가시다는 듯이 벴다. N11 도로를 타고 헤로나(Girona)까지 왔다. 어느 해변에서 낮잠을 청했다. 버프를 쓰고, 헬멧을 베게 삼아. 지나는 이 중 누군가 닌자냐며 조롱했다.
내내 오르막이었다. 60km 정도를 달렸을 뿐인데 엄청나게 피곤하다. 돌아가면 1년은 빵을 먹지 말아야지 생각하다, 아예 ‘냄새도 맞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해 버렸다.

5.20
피게레스(Figueres)에 도착해서 달리 미술관을 둘러봤다. 월요일은 본래는 휴관일 인데, 스페인 휴일일 때는 문을 연다고 했다. 여하튼 운이 닿아 관람할 수 있었다. 광대와 이름씨가 먼저 관람을 했고, 자전거를 보고 있다가 나중에 들어갔다. 벤치에 앉아 있다, 독일에서 온 노부부를 만났다. 그들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짐이 조촐해서 물었더니, 캠핑카로 여행 중이란다. 편하다고. 캠핑카보다 백발 성성한 그들이 여전히 함께 있는 게 부러웠다. 나중에 독일도 갈 거라고 했더니, 하이델베르크에 꼭 가라며 계속 엄지를 치켜든다. 50km 정도를 달려서 라 홍케라(la jonquera)에 도착했다. 50년 된 전통 있는 식당. 여기에서 스페인 대표 음식이라는 ‘빠에야’를 먹었다. 무려 15.55유로. 너무너무 짠데 물은 따로 돈을 받는 바람에 밖에서 수돗물을 한 대야는 마셨다.

스페인에서 마지막 밤이다. 밖 온도는 섭씨 13도인데 텐트 안은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했다.

5.21
오전에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를 넘었다. 첫 번째 만난 빵 가게에서 빵을 샀다. 엄청나게 맛있다. 국경을 넘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구름이 개고 햇살이 내비쳤다. 페르피냥(Perpignan)까지 오면서 스페인과 가장 큰 차이는 갓길과 자전거 길이 사라졌다. 페르피냥 인근에서 오렌지 텔레콤을 통해 전화기를 개통했다. (아마도 33 – 6 – 3607 – 1112 어쩌면 33 – 06- 3607 – 1112) 통신비가 엄청 비싸다는 절망감에 여권을 두고 나왔다. 밖에서 멍 때리는데 자네들 여권 어딨냐며 친히 가져다줬다. 페르피냥에서 나르본까지 가는 길은 처음과는 달리 최악이다. 태풍처럼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더는 갈 수 없어 일찍 텐트를 쳤다.

5.22
나르본(Narbonne)까지 역풍인지 옆풍인지를 뚫고 왔다. 자전거 길로 조성된 곳을 달렸는데, 오솔길을 중심으로 한쪽엔 강이 한쪽엔 바다가 놓여 있다. 바람 빼고는 장관이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화장실 인심이 박하다. 큰 마트에 가도 화장실이 없다고만 한다.

갓길엔 토끼의 죽음도, 너구리의 죽음도, 찌부러진 콜라 캔도 있고, 어느 구두 한 짝도 있다. 버려져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빠진 기분이다. 가도 가도 갔던 길 갔고, 돌아 다시 그길 같고 아까 봤던 차가 또 보이고. 혹은 긴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깨지 않는 꿈. 아무 준비도 기대도 없던 여행은 너무 바보 같다는 걸 깨달았다. 달리는 동안은 그래도 즐겁다. 자전거가 있어서 다행이다.

5.23
여전히 이상한 나라를 못 빠져나오고 허우적대고 있다. 바람은 일상을 영유할 수 없을 만큼 부는데 이곳 사람들은 내 낯섦이 당연하고 이방인만 당황 속에서 푸념할 뿐이다. 준비 없는 여행은 바보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여행을 일찍 접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답답하다.

빨래방에서 주정뱅이와 시비가 있었다. 너무 참기 어려웠고,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힘들었다. ‘죽여 버려’라는 말과 동시에 ‘참을인을 그려’라는 소리가 들렸다. 참을인은 안 떠오르고 칼도만 그려졌다.

된바람이 사흘째다. 비까지 내리면서 옷이 젖었고, 추웠다. 바람은 해가 져도 그치지 않는다. 한 달을 길 위에서 보내면서 잃은 것은 배려고 는 것은 ‘화’다. 짜증과 달리 화가 나고 있고 내내 참아 내는 게 여간한 게 아니다. 이전에는 화를 어떻게 풀어냈는지 모르겠다. 유달리 화를 참기 어려운 날엔 지허 스님의 ‘사벽의 대화’를 읽는다. 이게 모면인지 푸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 원인조차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전히 답답하다. 다만 여기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온 것도, 고행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뭔가를 해봐야지’ 혹은 ‘해보고 싶다’이런 생각조차 없이 이국에 있다 보니 ‘모든 게 건성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삶도 생각도 말도 건성이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그러니 다스릴 수 있는 게 없다.

코펠에 물을 담아 숲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인지, 풍욕인지, 고양이 욕인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개운해 졌지만, 추위로 한층 더 오그라들었다.

종아리 화상이 하얗게 일며 벗겨졌다. 속살도 이미 까맣게 타서 닦다만 비누거품처럼 보인다.

5.24
달리는 중에 우박과 차가운 비를 만났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시렸다. 더는 달리고 싶지 않았고, 마음까지 지쳐 일찍 쉬기로 했다. 다행히 비를 피하려고 온 마을에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서 머물기로 했다. 생 쿠아트 두드(Saint-Couat-d’Aude)라는 작은 마을이다. 이름씨와 광대는 계속 달리기로 했다. 내일 카르카손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모처럼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면도를 했다. 적당히 몸에 한기가 가신 뒤 마을을 둘러봤다. 그 흔한 빵 가게조차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곳곳의 정원이 잘 꾸며져 있고, 집집이 개와 고양이가 함께 있는 게 예쁘다.


카테고리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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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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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lus.google.com/photos/105539093080476830015/albums/5875713468798105393

5.3
마드리드 출발
임도를 타다 N-320 도로로 나왔다. 도토리나무 아래서 이름씨가 싼 점심을 먹었다. 이런 호화로운 음식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을 듯.

첫 번째 텐트.
이래 봬도 도마뱀도 토끼도 있는 곳. 루친은 이베리아 반도가 토끼의 땅이라고 했다. 사람이 버린 땅이 저들에겐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이 된다.

내내 편하게 있다가 뙤약볕에서야 왜 자전거를 타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5.4
느지막이 텐트를 개고 출발.
중간에 잠시 쉬면서 어디가 정주행일까? 길 위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을 테니, 저것은 역주행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트레일러 무게는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처럼 온다. 수건 한 조각도 버리지 못하면서 마음을 비워야지라고 생각한 게 한심하다. 계속 이고가야 할 것들. 그 한 가운데 마음하나가 있다. 시처럼,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가 아니라, 내가 폐허였다. 왜 여기에 왔을까? 계속 물음만 반복된다. 자전거가 온갖 궁상을 떨어버릴 거라는 기대는 기를 써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상황에서 내 긴 시간을 압축한 것만 같다. 달리면서 내내 그리운 것들은 먼 데 있어도 여전하다.

두 번째 텐트는 공원 언덕에서.
9시나 돼야 해가 진다. 날이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해 졌다.

5.5
초행의 정적을 깨는 것은 헉헉대는 숨소리뿐이다. 그 안에서 먼 곳을 돌아도 그곳에 네가 있기를 바라본다. 바라다, 본다. 보이는 듯하다. 신기루처럼. 사막 여행자에게 신기루는 오아시스였을 것이고, 자전거 여행자에게 신기루는 내리막길일 것이다. 저 앞에 신기루가 있다. 신기루처럼 무언가 있는 게 아니라 앞서 지나는 차들이 물웅덩이 폐인 곳에서 사라진다. 조금만 더 가면 내리막길이구나라는 확신이 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곳에 도착하면 또 오르막이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반복 속에서도 체념하지 못한다. ‘이번엔 제발’ 이런 기대감으로 멈출 수 없다.

오르막이 이렇게 힘들구나. 새삼 깨닫는다. 내 바람도 신기루일까 무섭다. 거기에도 네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무서움. 감정의 옹졸함이 길 위 곳곳으로부터 베인다. 바람(願)은 바람(風)이 아니듯 내 원망은 끝끝내 願望이다.

어제는 악몽을 꿨다. 슬픈 꿈이었다. 마음이 아팠고 몸이 아렸다. 잠을 설칠 때마다 안부가 궁금하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가지 못하는구나.

무게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뒤돌아 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옆에 아무리 근사한 풍경이 있어도, 지나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응원을 던져도 묵묵히 땅을 보며 페달을 굴린다. 광대와 이름씨는 이종이산인냥 멀어져갔다.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아스팔트에 떨어지고 그 위를 바퀴가 지난다. 땅바닥 말고 주위를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싶었다.

종아리에 화상을 입었다. 분명 7부 자전거 바지를 샀는데, 겨우 무릎에 걸쳐진다. 후시딘을 가져왔는데 처방을 읽어보니, 여드름부터 화상까지 흡사 만병통치약 같은 기운을 풍긴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도 통하는 약이면 좋겠다.

스페인 고속도로는 오토비아와 오토피스타가 있다. 오토비아는 자전거가 갈 수 있는 길이라서인지 갓길이 퍽 넓다. 거기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봤다. 로드 킬은 어디서나 매한가지. 길 위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에게 애도를, 드넓은 대지에 묘비조차 없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애도를.

이름씨가 넘어지면서 크게 다쳤다. 부랴부랴 약을 바르고 잠시 쉬는데, 어디선가 고속도로 순찰 오토바이가 온다. 이미 사고가 있다는 걸 알고 온 눈치다. 지나는 차들이 대신 신고를 한 듯. 우리는 그 흔한 전화기조차 없다. 앰뷸런스를 계속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데 됐다고 했다. 비쌀까봐. 옆으로 넘어지면서 광대뼈와 무릎을 다쳤다. 버프위로 피가 스몄다. 일찍 텐트를 쳤다.

이곳은 어디나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아 있다. 구름은 별 수사 없이 그림처럼 있고, 우리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혹은, 지평선 한 자락에 집을 짓는다.

텐트를 친 곳. 곳곳에 개미집이 있다. 멍하니 보다, 개미들의 분주함에 잠깐 경외가 일었다. 움직임 자체가 소명인 듯싶다. 길은 끝이 없고, 목적지는 딱히 없다. 가는 곳 어디에도 반기는 이 없고, 낯섦과 그 감정을 억누르는 이국의 풍경만 있을 뿐이다. 여기는 내내 풍경으로만 온다. 때론 그조차 견뎌야 한다. 이국의 말은 닿지 않고 내 언어의 궁색함으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비로소 책을 들춘다. 마드리드에서 편하게 있을 때는 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장석남의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가지고 왔다. 오래전 처음 집을 떠나면서 챙겼던 책이다. 그때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위로받았던 기억으로 짐 한구석을 차지했다. 이상하게 자꾸 황지우의 시구가 맴돈다.

5.6
12시가 다 돼서 느지막이 출발. A-2 도로에서 N-211로 이동. 구릉 지대를 계속 달렸다. 처음으로 마실 수 있는 물을 발견했다. 물맛이 좋다. 조금 내려와서 해발 1,300미터 지점에 텐트를 쳤다. 안쿠엘라 델 듀카도(Anquela del Ducado). 밖은 추웠지만, 텐트 안은 따뜻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했던 지역이란다. 5월이지만 사람들 옷차림이 마드리드와는 사뭇 다르다.

이름씨와 광대가 만든 김치가 엄청 맛있게 익어서 한 번에 다 해치웠다. 하루 이틀 지나면 더 감칠맛이 돌 텐데 그냥 허겁지겁 먹었다.

5.7
몰리나 데 아라곤(Molina de Aragon)을 지나며 잠시 쉬었다.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산타 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알던 곳과는 다르니 이곳에 있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처음으로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었는 데 잠깐 둘러보고 지났다.

몬레알 델 캄포(MONREAL DEL CAMPO)에 왔다. 웜 샤워를 통해 하루 묵게 됐다. 웜 샤워는 자전거 여행객들이 하루 묶으면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쉬는 데서 시작됐다. 오래전에는 종이로 돌았다고 하던 데 이제는 웹사이트를 갖추고 서로 정보를 나눈다. 몇 명이 얼마나 머물 수 있는지, 어떤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지 미리 알리고 서로 배려한다. 기록상으로 200년 이상 된 집이라는 데 200년 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벽이 두껍다. 아주 편하게 머물며 쉬고 있다.

편안함은 금세 화두를 날린다.


카테고리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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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여행 1

378

사진은 다음 인터넷이 되는 곳에서! 🙂
https://plus.google.com/photos/105539093080476830015/albums/5875576903667812545

월 24일 출발 25일 마드리드

당장 몇 시간 후 출발인데, 제 자전거에 문제가 생겨서 부랴부랴 휠셋 교체. 광대는 페니어 연결, 이름씨는 다시 한 번 이것저것 꼼꼼하게 체크 중.

P4240101.JPG
아에로플로트로 모스크바를 거쳐서 마드리드로 들어왔어요. 인천공항까지 1년여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스캥크와 찬성씨가 짐 셔틀을 해줬어요. 셔틀로 맺어진 우정이랄까. 슬아의 제주도 빵 셔틀 이후 최고로 고마운 사람들이에요.(구석에서 비대칭, 말야씨 잊지 않고 있어요!!!) 자전거 박스 4개를 구했고, 개당 23kg으로 맞췄지만, 뭐 오차도 착오도 있기 마련. 공항까지 낑낑대면서 겨우 가져와서 대형 수화물로 보내는데, 대한항공 직원이 트레일러는 자전거가 아니라면서 이번만 보내주겠다고 하네요. 다음부터는 가로세로 길이를 재겠다고. 뭐 여하튼 고마워하면서 통과. 인천공항 탑승동에서 인터넷 면세점에서 산 고글을 찾고, 모스크바로!!!

무엇보다 기대하고 있던 기내식이에요. 이름씨가 미리 주문해 뒀고, 비건을 위한 메뉴랍니다.

두 번째 기내식이에요. 마드리드까지 9시간 걸린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모스크바까지 9시간이었어요. 기내식 놓칠까 잠을 설친 거 빼고 큰 불편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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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 새로 지은 공항이라서 이런저런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중간에 큰 바가 있더군요. 환승하는 데 다시 짐 검사를 하면서 이래저래 30분 정도 보낸 것 같아요. 1시간 연착이어서 마드리드행을 못 타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잘 탑승했어요.

인천-모스크바 때 탔던 비행기보다는 기체가 훨씬 작더군요, 제주도 갈 때 탔던 이스타 항공과 엇비슷하달까요. 세 번째 기내식입니다. 역시 비건을 위한 메뉴.

전반적으로 기내식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는데, 다만 양이 너무 적었네요. 한 번 더 먹고 싶었지만, 말이 안 통하니 사람이 얌전해지더군요. ㅋㅋ

마드리드를 둘러싼 그레도스 산맥(sierra de gredos)이라는 군요.
마드리드에 들어왔어요. 비행기에서 머물 호텔을 알아보고, 친구가 예약해서 예약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입을 맞췄는데, 입국서류 같은 것도 없고 그냥 도장 찍어주고 끝이네요. 뭐 한 마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

수화물 기다리는 데 맨 처음 우리게 나와서 바로 찾았네요. 모두 대체 저건 뭔가 하는 표정들이 압권이었지만 카메라를 함부로 들이댈 수 없어서 말이죠.

도착한 게 마드리드 시간으로 밤 11시 30분이 넘었을 때라서, 아침에 움직이자는 생각으로
공항 구석에 자리 잡고 천천히 자전거 조립을 시작. 갑자기 ‘빌라 리베라시옹’을 들고 어떤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어요. 해방촌 빈집에 잠시 살았던 루친이 애인과 함께 마중을 왔어요. 일면식도 없는데, 광대가 혹 마드리드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직접 공항까지 왔답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

차는 이미 끊겼고 움직일 방법이 없다고 해서 공항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고 다음날 루친네 집 근처인 ‘트레스 깐토스’역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다시 천천히 자전거 조립. 드디어 엄청난 박스 내용물이 제 모습을 다 갖췄네요. 의자에 기대서 모두 잠깐 잔 다음에 드디어 출발. 루친이 찾아오는 법을 가르쳐 준 대로 겨우 메트로 타는 곳까지 갔지만, 역무원이 자전거 탑승이 안 된다면서 오전 10시 이후에 탈 수 있다고 하네요. 혹시 자전거를 타고 갈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고속도로라면서 메트로만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다며 손사래를. 이 뭐 섬도 아니고. 길이 있는 곳은 어디에나 샛길이 있다는 광대의 지론을 따라 겨우 공항을 빠져 나와서 샤마르텡역까지 무사히 도착. 아 그런데 물도 없고, 배는 직살라게 고프고 역안에 있는 것들은 오질라게 비싼데도 먹을 수 있는 건 없고. 날은 예상과 다르게 조금 쌀쌀. 기내식 이후로 아직 음식 사진이 안 나오고 있잖아요. 식도락 여행인데 이렇게 굶주려서야. 여하튼 길에서 쓰러지려는 찰나, 저지를 빼입은 아저씨가 ‘팔로 미 프렌드’하면서 아주 싼 슈퍼로 안내해줬어요. 다들 왜 이렇게 친절 한 거야 ㅠ. 먹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찍었네요. 여하튼 빵집에서 바게트를 과일 가게에서 바나나, 사과, 토마토를 잔뜩 사서 다 해치우고, 너무너무 졸려서 따뜻한 볕이 있는 곳에서 잠시 꿀잠을 잤네요. 이것이 지중해(근처)의 햇살인가.

루친과 만나기로 한 트레스 깐토스로 출발. 인간 내비게이션인 광대를 잘 쫓아 무사히 도착. 마드리드 시내 자전거를 타면서 단 한 번도 차의 경적을 듣지 못했고, 보행자는 차를 보지 않고 그냥 횡단보도를 건너고, 차는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멈추고. 대단히 인상적이었어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가 직접 보니, 감개무량입니다. 마드리드의 첫인상은 맑고, 친절하고, 과일이 싸고, 빵이 맛있고, 등등입니다.

루친네 가는 길에 근처라고 해서 어머님댁에 들러서 인사를 했네요. 엄청 예쁜 집이에요. 특이한 건 엘리베이터 문이 2개라서 바깥문을 직접 여닫아요. 문을 닫으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움직이고, 엘리베이터가 문이 열리면 바깥문을 열고 나가는 구조예요. 루친의 방을 보세요. 한국어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말하기는 어려워하지만, 읽기 쓰기는 아주 좋아요.

다시 루친네 집으로. 지하 주차장에 자전거를 두고 들어왔더니 신선태가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서 봐 준 상입니다. 엄청 복 받고 있어요.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나 봐요. 특히 광대와 이름씨가 많이 했을 거예요. 신선태는 멕시코에서 왔고, 갸토는 콜롬비아에서 왔어요. 우리는 김치, 스페인에서는 ‘빠따따(감자-patata)’라고 하고, 멕시코에서는 데낄라, 콜롬비아에서는 위스키라고 한 다네요. 한 참 다른 말들이지만, 사진 속 모양은 같아요 🙂

muy bueno Madirid (무이 부에노 마드리드)

4월 26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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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자전거는 꽁꽁 묶어두고, 렌페를 타고 누에보 미니스테리오스 역까지 갔어요. 캠핑 장비를 아직 준비 못 한 게 있어서 역 근처에 데카슬론 매장을 찾아서 말이죠. 데카슬론은 아웃도어 용품 할인 매장이에요. 역 앞은 차들이 다니는 모양새도 거리도 청계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데 둘러보면 건물은 바로크 양식인 게 좀 다르다면 다를까요. ㅋ 엄청 큰 국회 같은 곳이었어요. 야심 차게 찾아들어 갔지만, 골프전문 매장이더군요. 캠핑을 위한 버너와 가스 등등을 사려고 했는데, 오늘은 꽝. 외곽에 있는 매장에 캠핑 용품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음에 다시 가기로 하고 통과, 근처에 자이언트 매장이 있어서 타이어를 바꾸려고 들어갔는데, 엄청나게 슈트를 잘 차려입은 매니저가 유창한 영어로 대해줬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했네요. 슬릭 타이어를 달고 왔는데, 몇 번 미끄러질 뻔했어요. 트레일러 무게를 자전거가 감당을 잘 못해서 말이죠. 그래서 그냥 깍두기로 가자고 하고 적당히 싼 타이어를 찾아보려고요.

루친과 갸토와 함께 사진.

아나키 채식 바에 가기로 하고, 다시 솔 광장까지 왔어요.

레즈비언 집회가 있어서 몇 장 찰칵(얼굴 나온 사람들은 허락받았어요). 스페인은 2005년 동성 간 결혼이 합법화됐음에도, 동성애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고 하네요. 물론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요. 스페인이 아무리 우경화되면서 호모포비아가 덩달아 가시화 되고 있는 것 같아보여도 마포구청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동성간의 간음’ 처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개정안 같은 걸 생각해보면 남한보다는 훨씬 낫죠.

아나키 노동자 연대, 여기서 새삼 놀란 것 중 하나는 흑적기가 여기저기에 널렸다는 거예요. 조만간 바르셀로나에 가면 더 와 닿을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카탈루냐 찬가>에서 그려진 모습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살짝 흥분 돼요. ㅎㅎ 마드리드에 와서야 스페인어를 왜 배우려고 하지 않았는지 무척 부끄럽고 후회돼요. 겨우 부에노스 디아스(Buenos dias)라고 말하는 정도. 아니면 올라 ㅠ

루친이 안내한 곳은 아나키 도서관이에요.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퍽 많이 보유하고 있고, 동물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더군요. 재미난 건 길을 가다 보면 엄청나게 많은 종의 개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름씨 말마따나, 아이들은 부모를 닮았는지 모르겠는데, 개는 부모를 아주 똑 닮았어요.

우리의 여행은 원래는 자전거와 식도락 여행이었으나, 둘이 같이 가지는 못하고 있어요. 자전거는 여전히 주차장 구석에서 누추하게 있어요. 그러나 식도락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에 간 곳은 바 쿠닌! 바쿠닌에서 이름을 딴 바였어요. 나중에 주변 누군가 엄청 부자가 돼서 이런 바를 열면 좋겠어요.

바쿠닌 (아나키 채식 바)
아나키즘과 채식의 연결. 여기서 일하는 분들한테 남한에서 왔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라고 했더니 스페인과 비슷하다며 웃더군요.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그의 딸 카르멘 프랑코때문에?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행하면서 그곳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게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같은 걸 봐도 시야가 좁아서 행간을 놓치게 돼요. 당연히 감탄도 줄 수밖에요. 느는 건 오직 밥! 에스페란토 모임과 바스크 어 포스터. 처음엔 팔레스타인 해방연대의 레일라 카흐레드인가 하며 좋아라했는데, 전혀 아니래요. 물어봤는데, 뭐라 뭐라 스페인어로 당연히 뭔 소린지 못 알아들었어요. 통과.

밥도 먹었고, 바쿠닌 구경도 잘했고, 얼추 11시가 다 돼서 집으로 가나 했지만. 무슨 시 낭송회에 갔어요. 뭔 놈의 시 낭송을 밤에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낮에 루친이 오늘 시 낭송회가 있다고 하더군요. 뭔 시를 낭송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물어봤더니, 얼마 전 작고한 호세 루이스 삼페드로를 기리면서 각자의 시를 읽거나, 그의 글귀 중에서 좋아하는 구절을 읽는다고 하더군요. 한국어로 하나 번역된 게 있어서 읽어 봤다고 했더니, 엄청 놀라워하면서 반가워하더군요. <레즈비언을 사랑한 남자>라고 2006년 인가 번역된 게 있었고, 사실 큰 감흥이 없었던지라 고만고만하게 작가와 제목만 겨우 기억하는 정도예요. 그런데 그에 대한 감상을 말하라고 해서 엄청나게 손사래, 루친이 시를 발표하고 나서 수르 꼬레아에서 온 친구가 샘페르도를 알고 기린다고 소개를 했나 봐요, 사람들이 계속 손뼉을 치더군요. ^^;;;; 앞으로 좋아할게요.

4월 27일

아침 먹고!

박물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하고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 방문
다시 렌페를 타고, 자전거는 고이 주차장에 묶여 있을 거예요! 이름씨가 공들여 준비한 미술관 일정이었어요.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가, 티켓 줄이 엄청나게 길어서 티센-보르네미서로 옮겼는데 무려 12유로. 여기는 스트로보만 금지고 사진 찍는 걸 허용하더군요. 오만 신기한 사진들을 찍었어요. 나중엔 배터리 방전으로 스마트하지 못한 폰으로 몇 장 찍었네요. 점심은 주먹밥. 아침에 먹은 밥에 김만 한 장 말았어요.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워서 사진이 없어요. 이름씨의 박식한 그림 설명과 눈에 익은 화가들 덕에 겨우 볼 수 있었는데, 의외로 듣도보도 못한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이 와 닿는 게 상당했어요.

티센-보르네미서를 구경하고 나서 허기를 참아가며 오만 빵 가게를 기웃 두유와 빵을 사서 탑골공원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에서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배가 차니 다시 구경할 기운이 조금 생겨서 레이나 소피아로 고고.

이름씨 광대와 함께 길을 걷다가 이름씨가 이쯤 되는 곳에 어떻게 자전거 샵이 하나 없냐고 말하면 자전거 샵이 나타나곤 해요. ‘우리 말고 동양인이 없어’, 그러면 동양인이 바로 보이는 식. 여하튼 우연히 만난 자전거 샵에서 할인하는 타이어 두 짝을 샀네요. 물론 우리 자전거는 지하 주차장에 있어요.

7시부터 무료라서 한 참 서 있다가 들어갔어요. 긴 줄은 무료 관람객들. 달리 전시도 하고 있는데, 고것은 못 봤어요. 무엇보다, 레이나 소피아엔 피카소 게르니카가 있어요. 세로 3.5미터 가로 7.76미터! 무지 크더군요. 맨날 엽서 쪼가리만 한 그림으로 보다가 실물을 보게 되니, 게르니카의 참상이 공포로 오네요. 그리고 무수히 많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자료와 아나키즘에 자료들, 바르셀로나 전체가 들썩였다는 두루티 장례식 영상도 있더군요. 얼마 전에 갔던 제주 4.3박물관에서는 친절하게도 김구와 이승만을 한데 묶어서 ‘우익’이라고 표기해 놓았던 데 그에 비하면 얼마나 세세하게 자료를 나누고 보관하고 있는지 놀라워요.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엔첸스 베르거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에서 봤던 두루티의 모습은 감개무량이었어요. 책에서 글로만 보던 것들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 같아서 엄청 신 났어요. 레이나 소피아는 사진 금지. 몇 장 찍었는데, 방마다 있는 안내원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한 번 웃고 사진은 안 된다고 하네요. 다시 렌페를 타고 루친네 집으로. 아마도 자전거는 주차장에!

4월 28일

아침 먹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어요. 유럽 최대라는 엘 라스뜨로(El Rastro) 벼룩시장이 일요일마다 서거든요. 무려 500년 역사라고 하네요. 별 의미 없지만 루친이 다닌 중학교는 750년이 됐다고 하더군요. 이름씨 지령에 따라 가방을 앞으로 메고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어요. 다만 너무너무너무 추워서 건성으로 찍고 쳐다도 안 봤더니 다 이상해요. 여하튼 본격 관광! 이름씨 광대와 함께 여행 중에 각별한 사람을 만나면 뭘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부채를 준비했거든요. 흐흐 부채가 널렸더군요. 여기도 저기도 다 부채야.

루친과 만나서 오후에 꼭 가봤으면 하는 모임이 있다고 하더군요. 소르코 이 소르코라고 일요일마다 모여서 채식을 하고 시 모임을 연다네요. 날도 추운데 밖에서 뭔 시인가 했어요. 여기 사람들은 밤에도 낮에도 시인가 했는데, 씨였어요. 스페인 종자를 보호하면서 씨앗을 나눠주더라고요. 소르코(surco)는 밭의 이랑이라는 뜻이래요.

요 장소는 원래 상점이었고 재개발 예정이었지만 소르코가 스쾃을 했고, 가족 단위 시민의 참여가 꾸준해서 그냥저냥 계속해서 쓰게 됐다고 하네요.

걷다 보니, 마요르 광장(마요르가 뭔가요? 곳곳마다 있던데)이에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라는데 왜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 딱하니 있더군요. 필리핀이 펠리페 2세에서 유래했다고 하네요. 끔찍한 제국의 역사.

드디어 흑적찬란한 CNT(전국노동자연맹) 에 도착! 대단한 걸 하려고 온 건 아니고 채식으로 밥을 먹는다고 해서요. ^^:
스페인 내전 동안 CNT 가입 수가 200만에 달했던 게 80년이 지나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모양새였어요. 엄청 큰 문을 가지고 있는데, 예전에는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해요. 루친이 CNT 주요 강령은 노동자 자주관리, 연방제, 상호부조 경제의 실현이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뭔가 크게 경도되어서 말이죠.

아나코 생디칼리즘 상징인 흑적기 위에 CNT라고 잘 박혀있어요. AIT는 국제 노동자 협회의 스페인어 약칭이고요. 여기서는 회의를 마치고 채식하는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어요. 값은 낼 수 있는 만큼. 우리가 들어갔을 때, 저 동양인 3명은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더군요. 게다가 뭐 카메라로 이것저것 신 난 아이처럼 사진을 찍어 댔으니 ^^; 한참 지나고 나서, 루친과 갸토의 일행인 걸 알고 경계를 풀더군요. 물론 처음부터 친절한 루시아 씨도 있었어요. 말도 걸어주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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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여기 밀고기는 고기보다 더 고기 같고 맛났어요! 광대는 지금까지 먹어본 밀/콩고기 중 최고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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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스 깐토스 역 앞 슈퍼에서 장을 보려는데 굳게 닫힌 문. 근처 까르푸로 가서 가장 싼 먹거리를 잔뜩 사서 들어왔어요. 가장 싼 먹거리는 까르푸에서 만든 것들. 결론은 싼 게 비지떡이라고 다음부터 이보다 한 단계 위로 사자였어요.

4월 29일

아침을 먹고!!!

지난번에 못 봤던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했어요. 어마어마하더군요. 거의 모든 시기의 고야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보쉬는 말할 것도 없고요. 4시간 정도 둘러보다 다시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에, 미술관 밖에서 점심 바게뜨를 먹었네요. 이름씨가 강조한 핵심은 콩고기. 두어 시간 정도 더 있다가 몸이 안 좋아서 저는 먼저 자전거가 있긴 있는 집으로 들어왔어요. 몸이 안 좋은 건 엄청나게 추워서예요. 지중해(근처)의 햇살은 어디로 가고 비만 주룩주룩 뭔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지.

한 참 후에 이름씨와 광대가 김칫거리와 저를 위한 장을 봐서 들어 왔어요. 후무스(hummus)를 강조하면서 맛을 보라고 했는데, 짠 콩비지 같다고 했더니, 광대와 이름씨 눈에 섭섭함이 가득하더군요. 🙂 계속 먹어봐도 짠 콩비지 같은데 말이죠.

미술관 얘기는 나중에 따로 먹는 것도 아니니 뭐.

4월 30일
오전 고추장 국 / 밥
오후 – 오전에 먹었던 것 / 콘플레이크

루친과 스쾃센터에 가기로 했는데, 루친 일정이 꼬여서 오전 내내 빈둥거렸네요. 오후 느지막이 드디어 우리 여행이 자전거 여행이었음을 깨닫고 곰팡내 나는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꺼냈어요. 나오자마자 비가 주룩주룩! 여기 날씨는 지 멋대로 인지라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이왕 나온 거 가보자는 결정으로 데카슬론 가는데 금세 해가 나더군요. 추워서 청바지 입고 자전거를 탔더니 엉덩이 살이 보여서 바지 한 벌 사고, 추운 스페인의 4월을 견디기 위해서 두꺼운 티셔츠도 하나 샀어요. 엥 4월은 끝났고 5월도 추울 거라는 예상에 말이죠. 광대는 바람막이를, 그 외에 자전거 앞에 달 자전거 가방과, 버너, 사관절 락을 보조할 열쇠 등등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샀어요. 스쾃 센터에 찾아가기로 하고 샤마르텡 역까지 가는 중에 훌쩍 10시가 넘어서 그냥 돌아섰네요. 오는 길에 마을 축제가 있어서 잠시 구경.

11시 반쯤 루친네 집에 돌아와서 신선태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네요. 메뉴는 된장국! 두부까지 들어갔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이름씨는 있는 재료만을 가지고 최고의 맛을 뽑아내는 요리사에요. 어디서 수학했느냐고 물으면 ‘꼴메나 비오’에서 했다고 하기로! 🙂

콘플레이크 / 저녁은 데카슬론 다녀와서 1시 정도에. 된장국

5월 1일
11시 30분에 샤마르텡 역 근처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제가 늑장을 부려서 한참 늦었어요. 노동절이라 렌페가 한 시간에 두어 대 정도 있다고 들어서 역까지 엄청 달렸어요. 이름씨가 제일 잘 달리고, 그리고 광대 저는 처져서 겨우 따라갔어요! 소싯적에 육상 했었는데 ㅠ 시간을 잘 못 알아서 결국 뛰면서 느긋하게 걷던 사람들과 트레스 깐토스 역에서 다시 조우. 집회 장소에는, 이미 행진을 시작했는지 텅 비어 있더군요. 물어물어 천천히 행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또 겁나 뛰었네요. 이번엔 광대가 제일 잘 달리고 이름씨 그리고 저. 집회에 간다고 이렇게 뛰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어요.

여기 집회의 특이점은 청소차와 경찰이 한 조를 이뤄요. 사람들이 행진하면 뒤에서 경찰과 청소차가 따라오면서 거리를 확 휩쓸더군요. 청소라기보다는 뭔가 위협하는 기세랄까. CNT 주최 집회여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는데, 연주도 구호도 훌륭했어요. 구호는 국가를 죽여라! 아나키 만세! 무에르떼 알 에스따도! 비바 라 아나뀌아! muerte al estado, viva la anarquia!
집회에는 개도 있고, 부모를 똑 닮은 개가 있고, 주정뱅이도 있고, 펑크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노인도 있고, 동양인도 셋 있었네요. 크게 다를 바 없는 집회였어요. 다만 여기선 바이올린을 켜고 플롯을 불어요.

다섯 시에는 나찌 집회 장소에 가서 대치한다고 하더군요. 친절한 루시아씨가 위험한데 갈거냐고 묻더군요. 아마도 가게 될 거라고 얘기 했는데, 어리버리 하는 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루친, 갸토와 함께 나찌 반대 집회에 가겠다고 한참을 걸었는데, 도착한 곳은 채식 뷔체,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됐어요! 여하튼 겁나 짠 중국 채식뷔페에서 밥을 먹고 물어물어 다시 집회 장소인 추에카 광장으로 이동.

가는 길에 스쾃센터에 들렀는데, 저녁 7시에 문을 연다네요. 집회 끝나고 들르기로 했어요.

가는 길에 만난 공식 덕후 모임. ㅋㅋ 어디에나 덕후는 있어요! 세상의 모든 덕후들이여 단결하라! 루챠! Lucha!

나찌 집회는 겁나서 멀리서 한 장 찍은 게 다예요. 인종주의자들이라서 가까이 가지 말라는 무지막지한 경고 때문에 무서워서요. ㅎ

가까이 가면 경찰들이 마구마구 꺼지라는 듯 손짓해요. 나름 자전거 여행이고, 아직 자전거는 제대로 타지도 못했는데 쫓겨날까 봐 안으로는 못 들어갔어요(자전거는 아직 지하 주차장에 있어요.). 기자증을 찬 사람들만 별 제지 없이 들락거리더군요. 이곳에서의 구호는 나찌 반대였어요. 경찰 바리케이트에 막힌 CNT 사람들과 광장에 모인 군중이 서로서로 구호를 외쳐가며 응원하더군요.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흑적기!

추에카 광장! 추에카 역은 LGBT거리래요. 거의 대다수의 바가 게이 바거나 레즈비언 바라고 하네요.

스페인과 남한이 닮았다는 말을 경찰의 행태를 보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네요. 저 총은 뭔가 했는데, 공포탄을 발사하더군요. 그리고 공포탄 발사하면서 몰이하듯 집회 군중을 향해 달려가고요. 불심검문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데, 심지어는 누가 봐도 액세서리인데 그걸 문제 삼아 검문하더군요.

마드리드는 9시나 돼야 해가 져요. 계속 경찰과 CNT가 대치하고 있다가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우리는 스쾃 센터로.

노동절이라서 파티가 열렸는데,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도 보이고, 어떻게 봐도 쟁이인 사람, 그리고 침낭 메고 온 사람들이 퍽 많더군요. 자전거 공방도 따로 있고요. 평시에는 이곳에서 요가도 하고 뭐 이런저런 일정으로 꽉 차 있는데 오늘은 빠르띠도(partido)!
광대의 얼굴이 오늘 내내 엄청 환하더군요. 피크는 여기 스쾃센터! 이름씨는 어떤 아줌마와 얘기를 하더니, 그 아줌마가 데려온 친구랑, 또 그 친구의 친구랑 끊임없는 대화를! 저는 담배 한 모금 빨고 죽을 것 같아서 내내 밖에 있고. 뭔 담배가 이리 독한지 죽다 살아났어요.

렌페는 끊겼고, 자전거는 루친에 집 지하 주차장에 있으려나. 1시간 10분 정도를 경보하듯 걸어서 버스 정류소까지 갔어요. 그리고 한 시간에 한 대 있다는 심야버스. 아저씨 운전이 청룡열차인가 했는데 내릴 즘에는 바이킹으로 바뀌더군요. 기사님이 다른데 내려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여차여차해서 무사히 도착했어요. 광대가 지피에스를 켜고 우리 목적지에서 멀어지는지 가까워지는지 계속 확인. 숙소에 도착하니 4시더군요. 바로 누웠는데, 괜히 담배는 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네요.

5월2일
계획상 내일이 마드리드를 떠나는 날이에요. 아침에 루친과 어머니 신선태, 갸토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어요. 모두들 굳어 있는 표정. 그러나 우리에게는 김치, 빠따따, 위스키, 데낄라가 있어요.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루트를 세 가지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어요. 사라고사를 들르느냐, 발렌시아로 가느냐, 그냥 산을 가로지르느냐. 결국, 최단거리인 산을 가로지르기로 결정!

일주일 정도는 전기도 물도 없을 거라는 예상에 우선은 3일 치 먹거리 장을 보고, 물건들을 다시 한 번 정리중이에요.

제 자전거 휠셋은 급하게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문제가 있네요. 로터가 휘어서 손으로 대강 펴고 쓱쓱 거리는 소음은 무시. 바퀴가 브레이크에 철석같이 붙어서 안 떨어졌는데 그래도 좀 굴러가는 것 같아요. 내일부터는 드디어 자전거 여행이 시작돼요. 곰팡내 나는 주차장에서 나와서 한 것 없이 정비 중!

마지막 밥을 먹고 부랴부랴 글만 써서 올리고 출발!
엄청나게 맥이 끊기지만 나중에 사진을 기대하세요! ^^;; 원래는 사진에 대한 설명글이었는데, 스페인에서도 게을러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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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프레스로 갈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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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와 관련한 몇 가지 테스트로 한없이 완벽했던 무버블타입에서 워드프레스로 왔다. 새삼 퍼머링크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아 그냥 다 되네 🙂

워드프레스 기본 퍼머링크 생성에서 dash(-)를 underbar(_)로 바꿨다. 별문제 없는데, IE에서 링크가 %인코딩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테마를 살짝 수정했다.
워드프레스의 플러그인은 정말 플러그만 꽂으면 뭔가 다 되는 모양새다. 좋구나, 그렇지만 워드프레스 함수를 찾아보고 ‘대강’ 이렇구나 아는 데만도 소비한 시간이 만만치 않다.

1월만 되면 무슨 지랄처럼 블로그에 들러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는 병은 실은 서버 호스팅과 관련이 있다. 호스팅 기간 만료입니다. 라는 메시지가 잊었던 곳을 생각나게 한다.
동기는 낚싯대에 미끼로 걸린 귤과 같다. 얼토당토않지만 그로 생경한 일들이 널어지는 게 결국은 낯설지 않다. 1월은 회귀의 달이다. ㅋㅋ 다만 올해도 똑같이 반복된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다는 게 조금 씁쓸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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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면 못써 담배는 독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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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할아버지
어느 날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 계훈제 선생
세 분의 통일 운동가가 거리를 걷고 있었어요
골목 모퉁이에서 중고생 세넷이
담배 피웠어요
에익 이놈들!
백 선생이 호통쳤습니다
하늘이 찌르릉 울렸어요
아이 깜짝이야!
문 목사가 껄껄 웃고
계 선생이 아이들한테 다가가
담배 피우면 못써, 담배는 독약이야!
타일렀어요
아이들은 달아났어요
백 선생이 탄식처럼 한마디 했어요
저 녀석들 시대에는 통일이 와야 할 텐데.
김규동 / 창비어린이 2010 여름
—————
세 선생이 저리 함께 걸을 때면 내가 꼭 저 중고생만 했을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어렸을까. 그날 그러면 그 골목에서 그 꼰대들. ‘담배 피우면 못써 담배는 독약이야!’ 선생님 어떡해요. 그때도 아직도 독약을 물고 있어요. ‘저 녀석들 시대에는 통일이 와야 할 텐데’에서 빵 터졌는데, 발화와 쓰기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것을 자판을 두드리면서 깨닫는다. ‘저 녀석들 시대’는 여전히 변함없네. 선생께서 통일 담론을 녹차 우리듯 우리는 게 아니었다니. 선생님 문득 죄송해요.
그나저나 오늘은 6•15공동선언 10돌인데, 21년 만에 화생방 대비 민방위 훈련한다며? ㅋㅋ
3월 15일 날 점심 무렵 일어나서 눈곱 떼고 어기 적 택배 부치러 가는데, 글쎄 차들이 죄다 멈춰 있는 거야. 버스도 택시도 자가용도, 심지어는 신호등에 사람들도 꼼짝 않기에, 아 뭔가 큰 사고가 났나 했지. 근데 조용한 거야. 이쯤 되면 빵빵거리는 차가 있을 법한데, 대낮인데 그 큰 거리가 고요한 거야. 그 사거리에서 민방위 훈련한다고 사람도 못 움직이게 통제하더만. 횡단보도 건너는 데 막아서다라고, 지금 훈련 중이니깐 움직이면 안 된다고. 못 간다고. 지랄. 도저히 니들 장단에 못 놀아주겠다며 건넜지. 천천히 느리게 볕에 취한 듯. 나를 제지하러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달려오는 당신이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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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저냥

224

시 하나 읽고.
옮겨 써야지 했는데, 외우질 못했네.
책을 안 가져왔다는 말.
이번 창비 어린이에 김규동의 신작 두 편 실렸다.
좋더라.
문학 이란 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짝사랑이나 해야지. 안에 있자니 답답하고, 멀어지면 그립고. 밤마다 방안에서는 책을 숙주로 기생하는 말들이 짖는다.
진실은 트위터 테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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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ㅠㅠ

215

hrnet에 스팸을 돌려버렸다. ㅠㅠ
linkedin에 가입하면서 분명히 뭐 메일함에 있는 친구들에게 어쩌고 하기에 스킵했는데,
떡 하니 메일이 돌았다.
hrnet만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메일을 주고받은 사람한테는 다 간 것 같아서 엄청나게 민망할 뿐이다.
아 아 아 고의가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조금 다행스러운 건 자기 소개란에 최성만 개새끼라고 쓰려다 말았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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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표준과 웹 접근성에 대한 몇 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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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인 부분은 논외로 합니다. 조만간 홈페이지 빌더와 함께 다룰까 합니다.
웹은 실제로 정보 격차를 줄이고 소통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전제가 되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국내 상황에 한정해서 보자면 시각장애가 없을 것, 마우스를 이용하는 데 불편이 없을 것 등등이 있겠습니다. 조금 사소한(?) 부분을 생각하자면, IE6 외의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을 것 정도랄까요. 전제에서 중요한 건, 비장애인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웹을 사용하는 이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환경에 처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읽을 수 없고, 누구네는 이미지 파일이 안 보이고, 엄청나게 느린 전화선으로 연결하고, 자바스크립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를 사용하고 있고. css가 안 먹히고, 플래시를 지원하지 않고(제 경우는 Adblock을 사용하기 전에는 광고의 쓰나미를 벗어나고자 플래시를 아예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마우스를 고양이가 깔고 앉아 있고(어떻게 비키라고 할 수….), 색맹이고, 색약이고, 음성 낭독기가 꼭 필요하고. 등등.
이런 예기치 못한 사용자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강제추방당한 이주자가 홈페이지에 연대의 글을 볼 수 없다며 이메일로 그 내용을 보내달라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요? 웹에서조차 국경을 뛰어넘지 못하다니요. 그 웹페이지의 스타일은 즐기지 못해도 최소한 읽고 쓸 수는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주로 파이어폭스 3.xx를 이용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닙니다. 단체든 개인이든 홈페이지 레이아웃이 깨지는 건 빈번해서 그러려니 합니다. 파이어폭스를 쓰다 정 안 되겠으면 IE로 봅니다. 얼마 전 어느 홈페이지에 갔는데, 상담게시판에 “상담내용은 철저한 비밀을 보장합니다.”라고 이미지로 쓰여있더군요. 무심결에 클릭했는데, 내담자가 쓴 글이 훤히 보입니다. 혹시나 싶어서 IE6에서 봤더니,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며 안 보입니다. 우하 이런 게 기술인가! 이런 상황은 아마도 관리자조차 모르고 있을 거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가 IE6 외의 브라우저를 쓰다가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면 어떻게 상담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홈페이지를 운영하는데, 지금까지 이런저런 불평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면, 사용자가 감수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모질라에서 레이아웃이 깨지면, IE로 접속해서 보고, 아쉬운 건 사용자인데 어쩌겠어요. 아쉬운 사람이 감수해라! 이거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문제는 감수할 만큼 해도 정보에 아예 접근조차 못하는 경우입니다. 바깥에서 이렇게 했다간 질타당하기 십상이지요. 어떤 단체, 어떤 활동이 그럽니까. 그런데 웹에선,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갑니다.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 기존의 웹 개발 풍토가 큰 몫을 했다지만, 그걸 그대로 수용한 단체에 면죄부를 준다고 더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어떤 환경에서도 구동될 수 있는 홈페이지가 가장 좋다고 봅니다.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사용자 배제를 최소한으로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을 걸로 봅니다. 배제를 하나씩 줄여가야지요. 아마도 대개는 몰라서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웹 표준, 웹 접근성이란 거 말이 어렵지, 기술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생각보다’에 방점을 둡니다. 구석구석 단체 사이트 퍽 많이 가봤지만, 웹 표준이나 웹 접근성을 지키면서 포기해야만 하는 기능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백지에 텍스트만 제공하라는 게 아니라, 충분히 꾸미면서도 기능을 살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웹 접근성과 웹 자보에 대한 생각.
웹 자보는 대체로 그림 파일로 만들어 올리곤 합니다. 간단하게 올릴 수 있어서일까요? 글이 들어간다고 더 수고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복사해서 올리는 형편이니까요. 가장 좋은 예는 그림이나 동영상과 함께 텍스트를 제공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림이나 동영상을 제공하는 이유는 글을 제대로 해독할 수 없을 때, 내용 전달을 쉽게 하기 위한 정도입니다. 그냥 글과 무의미한 그림으로만 가득 찬 웹 자보, 혹은 이미지와 음악만 있는 동영상은 안 좋은 형태라고 봅니다. 그럴 거면 텍스트로 만들고, 그 텍스트에 서식을 넣는 게 훨씬 좋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읽을 수 있는 형태여서가 아니라, 한 명이라도 배제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활동이든 바깥과 웹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웹 표준과 웹 접근성은 웹에서의 장애인 이동권과 같습니다. 다만, 차이라면 이동권을 확대하고자 대정부 투쟁을 힘들게 할 것 없이 의지와 약간의 기술로 이뤄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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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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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무성영화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
누군가 10개로 나눠서 올려놨다. ㅋㅋ 재작년(벌써 재작년이네) 충무로 영화제 개막식 날 한옥마당에서 봤는데, 우하하 좋은 영화다!
야외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보는 영화라니!
게다가 늦여름 바람이 솔솔~~
올린 이에게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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