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 어슐러 르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고,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변하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이분은 뿌리째 뒤흔들린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온다.
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두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실수를 하곤 한다.
제1차 에큐멘 조사원 보고서는 겐리 아이 같은 사절단을 위해 충고를 남겨 놓는다.
게센 행성은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야? 여자야?’ 같은 질문이 아예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어슐러 르귄은 인간의 성별화 변용을 통해 사회구조와 개개인들이 그들의 많은 부분을 성별 구분을 통한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더불어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에큐멘 조사단원의 보고는 계속된다.
어슐러 르귄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를 통해서 상대방을 성에 상관없이 한 인간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아홉 생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마틴’과 ‘퓨’는 ‘라이브라’ 행성 실험 기지에 파견되어 있다. 그 둘의 임무를 지원하고자 ‘10클론’이라는 한 사람의 창자 세포로부터 만들어진 10명의 복제인간이 기지를 방문한다.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복제 인간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그들 모두가 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퓨’가 10클론 중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하는 것을 보고 근친상간인지 자위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자가 개별적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머리와 10개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론의 특성으로 그들은 주어진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해내지만, 결국 사고로 아홉의 클론은 죽고 ‘카프’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카프는 생애 처음으로 ‘다중 자아’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서서히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아홉 생명」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실렸는데, 어슐러 르귄이 보낸 원본 원고에서 ‘사소한’ 부분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필명 또한 ‘어슐러 K. 르귄’이 아니라 ‘U. K. 르귄’으로 표기됐다. 어슐러 르귄은 이에 대해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자신을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며 성적 편견을 보였던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말한다. 비록 「플레이보이」를 통해 SF가 대중적으로 크게 전파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들의 수준은 소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플레이보이」가 바꿨다는 ‘사소한’ 부분은 ‘마틴’과 ‘퓨’ 두 남성에 관한 부분이다. 어슐러 르귄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나타내지만, 플레이보이는 이를 흡사 우정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살아남은 카프가 퓨에게 던진 “마틴을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플레이보이」는 “마틴을 좋아하나요?”라고 바꾸어 놓았고, 퓨의 “그래, 사랑해”라는 대답을 삭제했다.
어술러 르귄은 퓨의 “… 우린 서로 외로웠어.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라는 말에서 동성애를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성애로 묘사한다.
어슐러 르귄의 SF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 곳곳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아나키즘의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상상하라’고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고와 직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