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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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무성영화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
누군가 10개로 나눠서 올려놨다. ㅋㅋ 재작년(벌써 재작년이네) 충무로 영화제 개막식 날 한옥마당에서 봤는데, 우하하 좋은 영화다!
야외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보는 영화라니!
게다가 늦여름 바람이 솔솔~~
올린 이에게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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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PFLP: 세계전쟁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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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
   Red army/PFLP: Declaration of World War
   赤軍-PFLP 世界戦争宣言

   아다치 마사오 足立正生
   와카마츠 코지 若松孝二
   1971 | 16mm  | 71min  | 일본

영화와 혁명 특별전을 통해 ‘적군/PFLP – 세계전쟁선언’을 봤다. 영화라기보다는 프로파간다였지만 간혹 문자로만 접하던 적군파의 활동을 영상으로 본다는 것은 퍽 흥미진진한 일이다. 게다가 국보법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남한 땅에서 이런 ‘적군파’를 공개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여러모로 재미난 일이랄 밖에.

69년 일본의 도쿄대와 일본대를 중심으로 했던 전공투 운동이 경찰력에 의해 봉쇄당하면서 무장봉기와 군사적 행동으로 활로를 모색하려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적군파이다. 제목에서와같이 적군파의 슬로건은 세계전쟁선언이다. 그들은 이전의 활동을 혁명적 패배주의로 간주하고 전단계 무장봉기 – 세계 혁명전쟁, 세계 黨 – 세계 적군 – 세계 혁명 전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내건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대로 적군파는 창설 직후 對 권력투쟁으로서 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 69년 10월 국제 반전 시위에서는 쇠 파이프 폭탄으로 신주쿠 역을 습격하는 등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그러나 11월 수상관저 습격을 목적으로 군사훈련을 하던 중 경찰 측에 알려져 53명이 체포되며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사건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적군파는 이후 도쿄 집회를 통해 ‘국제 근거지 건설, 70년 전단계 봉기 관철’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그중 하나가 ‘불사조 작전’이라고 불렸던 일본 항공기 요드호 납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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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3월 31일 9명의 적군파 멤버는 후지 산 상공을 날고 있던 일본 항공 보잉 727기를 납치 북한행을 요구한다. 그 비행기에는 7명의 승무원과 131명이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다. 급유를 요구하며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던 요도호는 환자와 여성, 어린이들 23명을 내려놓은 후 북한을 향해 비행한다. 그런데 wikipedia를 보니 이들이 도착한 곳은 김포공항이다. 처음엔 뭔가 잘못 적혔나 싶어서 먼지 쌓인 책을 뒤져보니 할리우드 영화 같은 상황이 전개됐던 것이다. 요도호는 후쿠오카 공항을 이륙해서 북한으로 가는 중에 남한공군기에 유도되어 김포공항에 착륙한다. 적군파가 마음을 바꿔서 당시 자유민주주의 개발독재 다카키 마사오의 나라에 온 것은 아니고 남한 측이 북한인 척 위장했던 것이다. 남한은 북한군 복장을 하고 가짜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나타났건만 적군파가 이를 알아차리고 대치 상태에 들어간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키득거리면 죄스럽지만, 환영플래카드가 펄럭이고 북한군인 척 행세를 했던 남한군들을 생각하면 좀처럼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ㅋㅋ) 남한 측과의 협상을 결렬되고, 4월 1일 도쿄에서 날아온 야마무라 일본 운수차관이 적군파와 교섭을 재개한다. 기내투쟁을 벌이던 적군파 9명은 야마무라의 인질 맞교환 제안을 수용, 야마무라와 승무원 3명을 제외한 인질 전원을 석방하고 4월 3일 오후 평양으로 향한다. 평양에 도착한 직후 요도호는 다시 야마무라 차관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4일 하네다 공항에 무사히 귀환한다.

무사히 귀환? 그렇다면, 영화에서 폭발한 비행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후 적군파가 또다시 하이재킹을 시도한 것은 73년 7월 20일 마루오카와 팔레스타인 4명이 파리 발 하네다 행 일본 항공 점보 404기를 납치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과 팔레스타인 혁명을 결합하는 세계 혁명전쟁’이라 부르며 3일간에 걸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공항, 다마스커스 공항 등을 거쳐 리비아의 벵가지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인질 141명을 풀어주고 항공기를 폭파한다. 영화는 71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리되면 또 아귀가 맞질 않는다. 누가 알려다오, 더는 엄한 나라말들 찾아다니기 지친다.

세계전쟁선언

영화는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사상을 그대로 승계하며 무장봉기와 하이재킹을 선동하고 있다. 중간부터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활동(혁명에서 ‘개인’은 반동일 뿐이다. 그들의 일상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날마다 총검술을 한다거나 총구분해 조립 등등의 반복이다.)을 주로 보여주는데, 감독 중 아다치 마사오는 74년 PFLP에 직접 투신 영화처럼 살았단다.(또 다른 감독 와카마츠 코지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면 여기를). 인터내셔널가가 3번 울린 것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시오니즘 반제국주의 반미 등등으로 덧칠한 비행기를 폭파하는 영상인데, 대체 그게 어떤 사건이었는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이제는 빛바랜 혁명전사들인데, 그게 또 불편하기도 했는데, 하이텍알씨디 고공농성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를 보면 적군파처럼 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단 말이지. ‘Coup pour Coup! 주먹에는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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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여인들 / 프랑스와 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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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되기

대개의 신화 기술과는 달리 ‘고르고’는 추악하고 무서운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메두사는 고르고 세 자매 중 막내의 이름이다. 고르고들은 여신들과 마찬가지로 불멸하고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메두사만은 죽을 운명이었다. 불멸의 종족에서 왜 하필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이었을까? 왜 신화 기술자들은 메두사를 죽이고자 했을까? ‘메두사’라는 어원을 찾아보면 ‘여성 지배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글쓰기는(신화를 기술하는 것은) 위대한 자들, ‘위대한 남자들’에게 국한 된 것이었다. 그 남자들에게 ‘여성’과 ‘지배자’는 껄끄러운 조합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메두사에게 ‘여성 지배자’의 의미를 거두고 죽을 운명을 부여하며 추악한 마녀로 탈바꿈시켰다.

메두사를 먼저 끄집어 낸 것은 8명의 여인에게서, 그들 각자에게서 메두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는, 아버지라는 상징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 각자가 남성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영화를 본지 꽤 오래인지라 내게 남은 것은 앙상한 뼈대의 이야기뿐이지만 상상은 재현되기 마련이고 또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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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아침, 카트린느(뤼디빈 사니에 Ludivine Sagnier)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숨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없고 밤새 개도 짖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전화선은 끊어져 있고 자동차는 시동이 안 걸리고 게다가 엄청난 폭설로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 두 명의 하녀, 언니 스종, 그리고 뒤늦게 들어온 고모까지 8명의 여인은 집 안에 고립되고 만다. 이들은 아버지를 죽인 자가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각자가 무죄를 증명하려 애쓴다. 단순히 시놉시스만을 보자면  폐쇄된 공간과 한정된 용의자 안에서 범인을 추리해내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연상하고 말겠지만 영화를 한 발짝만 떨어져 본다면 스릴러라는 장르는 영화에서 가벼운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친구의 애를 가진 언니 스종(비에르지니 르도엔 Virginie Ledoyen), 엄마 게비(까트린 드뇌브 Catherine Deneuve)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형부를 사랑하는 노처녀 이모 오귀스틴(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피에르트 고모(패니 아당뜨 Fanny Ardant)는 애인과의 여행비용으로 돈을 요구하고, 고모를 사랑하는 레즈비언 하녀 샤넬(삐어미네 리샤르 Firmine Richard), 하녀를 가장한 아버지의 정부 루이즈(엠마뉴엘 베아르 Emmanuelle Beart), 자신의 남편을 독살하고 유산을 가로챈 외할머니 마미(다니엘 다리우 Danielle Darrieux), 각자의 무죄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이 8명 여인에게서 드러난 진실은 추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선에 함몰되지 않는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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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여인이 아버지의 시선 밖에서 낱낱의 억눌렸던 욕망을 실어내는 각개가무는 시종일관 즐겁다.  이 각개가무는 재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영화서술에서 서술의 힘을 쥔 이들은 항상 남성이었다. 그러나 ‘8명의 여인들’에서 중간 중간 펼쳐지는 춤과 노래는 영화에서 여성이 드러나는 재현의 구조 즉, 관습적(남성적) 시선을 깨뜨리고 있다.  영화의 형식은 시선의 형식에 상응하기 마련이며 이 상응하는 시선은 다시 가부장적 지배구조에 상응하기 마련이다. 8명의 여인은 서술의 힘을 관객의 몫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8명의 여인 각자에게 주어짐으로써 관객 일반에게 제시되는 남성적 입장(시선)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펼치는 노래와 춤은 있는 그대로 여성들의 욕망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를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욕망하는 대상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인간다운 속성인지를 여성이 그 인간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밝혀지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실은 막내딸과 아버지의 자작극이었다. 아버지는 죽음을 위장해서 한집안에 같이 사는 여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들의 욕망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아버지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8명 여인들 모두가 아버지를 죽인 공범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영화 내내 즐겁기만 했던 여인들의 욕망이 아버지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는 관객 일반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가지지 않은 여성은 자연스럽다’를 내재화한 인물이다.(관객 일반은 관습적 시선과 상응하는데 젠더로서의 남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 시선이 내재화된 여성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 아버지는 다름 아닌 ‘여성의 종신성을 운명 안에 틀 지움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남성들의 다른 이름이고 그 상징에 다름 아니다. 영화 내내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는 현실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가부장제와 흡사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여성들을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저울질하는.

8명의 여인은 그 모두가 메두사이다. 다른 이들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욕망을 드러내며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지배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재현의 과정에서 여성은 항시 주체보다는 객체로서, 주체성과 힘을 상실한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8명의 여인들>은 변화 자체이다. 여성들이 타자로만 머물러야 했던 과거의 운명을 주체로 되돌리는 공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상징을 돌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아버지의 눈으로 여인들을 바라보기를 멈추게 하고 있다. 욕망이 재현되는 곳은 더는 아버지의 눈이 아니다. 욕망을 가진 여성은 비로소 자연스럽다!

<8명의 여인들>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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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ls / 기타노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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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ls

사랑은 단순한 신체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특히 대상을 열렬히 사모하는 경우에,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다. 또 사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증거하는 힘이기도 하다. – 메를로 퐁티

돌스 (Dolls) / 기타노 다케시 – 타자와 만나기, 사랑하기
영화는 라는 로 시작되고 있다. 이 분라쿠를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보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공연을 담은 영화를 보고 있다. 그보다 바깥에서 나는 이 영화 Dolls를 본다. 메이도노 히캬쿠가 끝나면서 인형극의 두 주인공인 추베에와 우매가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내 시선이 머물게 되는 곳이고, 나와 두 인형 사이의 간극(분라쿠와 그것을 공연장에서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것을 담은 영화를 보는 영화 속 사람들)이 허물어지는 곳이다. 간극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보일 몇 개의 짧고 진부한 이야기들이 영화 ‘속의’, 분라쿠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나도 현실에서는 이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담론은 시작된다. 타인과 만나서 엮이는 것 말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가는 마츠모토, 그는 앞으로 보장된 삶을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정신이 나간 옛애인(사와코)에게로 간다.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뒤 붉은색 끈으로 서로를 묶는다. 사랑을 위한 최초의 준비는 현재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에서부터, 나 ‘이외’의 것을 ‘나’와 묶으면서 시작된다. – 사랑의 관계로 묶인 타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당신에게 결핍된 단 하나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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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속도는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다(dolls). 오직 묶인 끈만이 있다. 감독은 관객에게 당신들의 체험을 끄집어내라고 한다. 얼굴의 빈자리는 관객(사랑의 제3자)을 위한 자리이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무엇보다도 끈으로 엮인 유일한 존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얼굴(표정)을 잃는 것이다. 동시대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친다. 바람개비는 무심히 그러나 격렬히 돈다. 그리고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가면’인가. 교통사고의 상처를 안고 모습을 감춘 아이돌 스타 하루나. 그녀를 몇 년째 흠모하는 소년(누쿠이)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그녀를 찾아간다. 눈을 찌름으로써 소년은 ‘타인’에서 ‘타자’로 위치를 이동하게 된다. – 타인이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이라면 타자는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 감독은 계속해서 당신은 사랑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 사랑은 하루나(타자)와 누쿠이(나) 사이의 불공평에서 출발한다.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내 안에 가둘 수 있는 눈을 잃은 후에, 모든 주도권을 잃은 후에 현현한다. 누쿠이야 말로 하루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소통 가능한 타자이다. 우리는 ‘나’를 온전하게 알아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던가. 상호성이 더는 신기루나 오해 소강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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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들고 30년 동안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료코), 추억은 멈추지 않고 거슬러 오래전 약속을 끄집어 온다. 문득, 자신을 끝까지 기다리겠다던 장소에 도착한 남자(히로) – 기억은 거짓말처럼 옛사랑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서로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랑은 모든 틈을 메우고 망각시킨다(고 믿는다.) 그(그녀) 역시 행복하다. 생애 어느 때보다, 그녀(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만으로 ‘가장’ 행복하다.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한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울림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인 것이다. 엄청난 우연들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구조 자체이어야 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단풍을 들이민다. 단풍은 사랑의 색깔이다. 아픈 시간들, 4월의 바람과 뙤약볕의 여름을 지나고 나서야 얻은 핏빛의 색깔 –  당신은 저 아름다운 단풍을 시들 때까지(시들지 않는 단풍은 없다.) 지켜보겠는가, 가장 붉게 피었을 때 박제시키겠는가? 사랑은 소멸의 시효를 가지고 있다. 소녀(하루나)와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누쿠이)은 사고로 죽는다. 그 죽음은 소년을 계속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지속시켜 준다. 그는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단풍처럼 시들지 않을 것이다. 옛사랑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야쿠자 두목은 킬러의 총에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만을 안고 죽음에 다다른다. 최고의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것이 설사 핏빛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음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킨다. 탐미적 수사 혹은 사의 찬미라고 말하며 ‘이것도 사랑일 수 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감독은 찬물을 쏟아 붙는다. 소년이 자신의 사랑을 동결하며 흘린 핏 자국을 그것이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비누거품으로 쓱쓱 문질러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이돌 스타와, 옛 애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 사랑은 주관적 사유만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관계의 끈으로만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남기마련이다. 그들의 행복만큼 ‘딱 그만큼’의 고통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 사랑의 그림자는 고통으로 – 타자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남는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환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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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끈으로 서로를 묶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츠모토가 사와코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장소, 그들의 추억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장소)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반과거’ 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이다(하루나를 위한 하모니카, 히로를 위한 도시락, 사와코를 위한 목걸이). 사랑의 정경은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처럼 뒤늦게야 만들어진다. 하지만 토스카의 아리아가 울려야 할 시간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구속도 없이 완전하다. 이 사랑은 어떻게 보존되거나 혹은 되돌릴 수 있을까. 그들은 처음으로 손을 맞잡으면서 사랑(사람)의 얼굴(표정)을 되찾는다. – 이것이야말로 기타노 다케시의 대답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달갑지 않은 사명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똑같은’ 생의 무게를 요구한다. 함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아파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그 온전한 사랑은 아무런 목적(표정)없이, 엮었던 관계의 끈이다. 그 끈은 누구도 남아서 더 고통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고통(육체)을 지고 죽음까지 즉시 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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