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소설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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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운동의 성서로 불렸던 『여성과 노동』의 작가 올리브 슈라이너(1855~1920)는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한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다. 그가 21세기를 살았더라도 저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디스토피아로만 단정 짓고 미리부터 끔찍해 할 필요는 없다.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Science Fiction)가 지향하는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현 사회와 인간을 되돌아보는 데 방점을 둔다. 실제로 SpeculativeFiction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에 꼭 다다르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새로운 말과 새로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때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F는 아직 오지 않은, 혹은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근간으로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놓친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이 말을 만드는 작업에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시간적, 공간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새로운 언어로 펼쳐진다. 이 말은 기존 언어 체계에 갇혀 있던 상상력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SF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고, 1960년대 뉴 웨이브와 함께 좌파 남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인종과 계급, 반전을 다루는 작품이 늘었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종속적이었다. 그 남성 작가들의 세계관을 통해 여성과 젠더가 드러나는 방식은 사회의 시선과 일반 남성에게 내재된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뉴 웨이브’의 기치를 두고 ‘페미니즘SF’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뉴 웨이브’는 SF에서 드러나는 테크놀로지의 상상력만큼,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언어와 사회적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엮이면서 소설의 언어나 서술 상의 변화를 통해 정치와 생활양식에 대한 급진적인 양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서서히 발표됐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고전적 소재였던 시간여행, 우주, 사이버 펑크 등에서 벗어나 새롭고 실험적인 주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기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와 성차를 규정짓는 방식에 균열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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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 러스의 말마따나, ‘SF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남녀 역할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될 필요가 없’었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뒤엎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조 속에 미묘하게 녹아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문제를 구호와 선언을 뛰어넘어 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제시했다.
페미니즘과 SF의 매혹적인 조합에 빠져들고자 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1994년 여성사에서 출간된 『세계여성소설걸작선』은 비록 SF라는 말은 빠져있지만, 훌륭한 페미니즘 SF의 길잡이다. 15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선집은 ‘뭘 읽어야 성에 차지?’ 하고 갈증에 탔던 이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다. 달근달근하며 서서히 아드레날린이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소설들로 꽉 차있어,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이 술술 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 오르내리던 조안나 러스나 『페미니즘 사전』으로 잘 알려진 리사 터틀의 단편들을 만날 수도 있다.

리사 터틀의 「남자의 여자」(The Wound)나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When It Changed), 존 발리의 「레오와 클레오」(Options),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등은 남녀 이외의 성별이 존재하는 사회, 생물학적 성징이 없던 인간이 특별한 계기로 성이 분화되는 사회, 한 가지 성만 남은 사회에 다른 성이 나타난다거나, 성전환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사회 등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 사회의 차별적인 성역할 분담이나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관이 실제로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페미니즘 SF는 성별 구획에 갇혀 살아가던 사회의 젠더 구조를 흐트러뜨리며,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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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출간 당시 엄청난 논쟁에 휘말렸다. 최소 8백 년 동안 남성이라고는 없었던 ‘와일어웨이'(Whileaway), 천 년 후의 지구를 무대로 하는 소설은 그 세계에 “그들이 돌아왔어요! 진짜 지구 남자들이요!”라는 외침과 함께 남성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치자면,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하던 ‘여성들의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라’는 주장들로 가득하다. 이런 이유로 당시 조안나 러스의 작품을 실어 주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갈 곳을 못 찾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후에 SF 역사상 가장 큰 획으로 일컬어지는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앤솔러지 『다시, 위험한 상상력』(Again, Dangerous Visions 1972)에 실리게 된다. 그 직후 SF에서 휴고상과 더불어 가장 권위 있는 네뷸러 상을 받는다. ‘와일어웨이’는 1975년 페미니즘 SF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피메일 맨』(The Female Man)으로 이어진다.
극으로 치달은 가정폭력을 다루는 팻 머피의 「식물 아내」(His Vegetable Wife)와 「나뭇잎 사이의 여인들」(Women in the trees) 그리고 코니 윌리스의 「섹스 또는 배설」(All My Darling Daughters), 수젯 헤이든 엘긴의 「그레이스 고모를 위하여」(For the Sake of Grace) 등은 SF만의 형식으로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행여나 끌어온 미래마저 우울해진다면, 이 책의 마지막을 어슐러 k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Sur)로 마무리 짓기 바란다. 딱 그만큼의 관용으로 남성들의 세계를 내려보며 ‘애쓴다’라고 한마디 되뇌면 충분한 위로가 될 것이다. 외에도 15편의 페미니즘 SF가 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맞닥뜨린 세계를 조롱하고, 분노하고, 때론 헤집으며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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