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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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검정 노트북은 젊은 날 작가로서 안나 울프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보며,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원주민의 갈등, 작가로서 안나와 한 개인이자 여성인 안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검정 노트북이 끝날 때 안나는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젊은 날에 수치심에 찬 냉소를 보낸다.

“이건 향수로 가득 차있다. 단어마다 향수가 서려 있다. 쓸 때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무엇에 대한 향수란 거지? 알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다시 경험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안나’는 적, 아니면 너무나 잘 알아서 보고 싶지 않은 옛 친구와 같은데.”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기록한 빨간 노트북은 정치 참여에 대한 좌절과 실패를, 노란 노트북은 안나와 마이클의 연애와 결혼을 토대로 남녀관계의 갈등과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제3의 그림자’라는 소설로 그려낸다.
파란 노트북은 안나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소설로 허구화 하는 것이 현실도피라 여긴 안나가 ‘일기’를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토미와 몰리가 다투는 곳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즉시 그 장면을 단편소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 -모든 것을 허구로 변형시키는 것- 은 일종의 도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나는 결코 단순히 일어나는 일만을 기록하지 않는 걸까?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모든 것을 허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일종의 수단임이 명백하다. (…) 이제부터는 일기를 쓸 테다.”

안나는 일기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주변에 의도적으로 방관해 왔거나 혹은 기억에서 억제해 왔던 경험의 조각들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네 권의 노트북들은 전부 사라지고 내부의 황금 노트북이 등장한다. 이 노트북은 파편화된 안나들 간에 내재하고 있던 긴장들을 해결하는 위치에 자리하면서 네 권의 노트북을 한 권으로 통합하고 있다.
또 다른 내부 소설로써 전체 소설을 감싸는 ‘자유로운 여성’에서 안나는 객관적인 서술자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를 사는 안나는 삶의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과거의 이상적인 안나와는 달리 더는 사람의 ‘유일한’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내부와 주변의 혼돈을 포용하며 이야기를 쓴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며 기대하는 역할 간의 갈등, 예술가로서 안나와 개인으로서 안나의 갈등, 이성과 감정의 괴리들로부터 안나가 획득하는 비전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으로 사회 이념과 신화, 가치체계가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고 테두리가 둘리기 이전의 상태’이다.
“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어디나 우리가 바라보는 구름처럼 변하지 않거나 해체되지 않는 생활 방식은 없다.”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은 안나의 비전을 이어간다. 여성과 남성 등의 성별 구분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분법적 원리를 벗어나,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삶의 실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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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소설로 일컬어지는 『황금 노트북』은 1962년 출간된 후부터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여겨졌다.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1973년 판 『황금 노트북』 서문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을 위한 트럼펫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논의를 일축한다.

“『황금 노트북』이 수많은 여성적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 나는 이 책이 페미니즘 운동 이후 창조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태도들이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쓰고 있다. (……) 이 책의 핵심, 그것의 구조,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이것저것으로 분리시키고 구분 지어서는 안 된다.”

『황금 노트북』은 1950년대 여성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레싱 역시 여성 권리를 명확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인데도, 서문을 들며 ‘작가는 페미니즘과 연계를 거부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리스 레싱은 당대 여성운동의 움직임과 그 과정 그리고 성과를 주시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서문을 통해 반대한 ‘분리’와 ‘구분’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페미니즘 진영의 큰 축이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경계로 해석될 수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남성도 적으로 간주하며 여성만의 자율적인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찬미하며 어느 정도 분리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여/남 구분에 따른 계층적이고 이중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도리스 레싱은 『황금 노트북』이 여/남 간의 투쟁으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이 국지적이라며 무조건 지지하기를 거부한다. 『황금 노트북』이 형식이나 주제에서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작품이 결코 ‘페미니스트 선언서’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에서 남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간의 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을 아우르며 여성문제를 ‘분리된 여성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이란 차원까지 확대한다.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서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들어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할 때, 도리스 레싱이야말로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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