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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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라는 것을 감지한다고 했다. 이응준의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처음 “추억의 속도”라는 말을 만났다. ‘보았다’나 ‘읽었다’가 아니라, 만났다. 그 말에서 ‘사랑’ 역시도 낯설고 큰 우연에 둘려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그 시작이 종국에는 추억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실점 뒤는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애써 떨친 추억의 속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나희덕의 시 ‘기억의 자리’에서였다.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기억의 자리 – 나희덕

나는 퍽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걸었다. 점점 덮쳐오는 추억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어서 추억이 마음과 기억의 자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며 안도했을 때, 무심코 앞을 보았다. 그 앞에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돌고 한참을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발자국마다 하나의 기억들이 움푹 패 있었다. 조금씩 깊이가 다른 걸로 봐서 기억이라는 것도 무게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말의 무게였다. 기억의 자리마다 말들이 스미어 사과나무가 싹을 피우듯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지불한 말들이 발자국 언저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길은 반복되어도 다시 낯선 풍경으로 펼쳐졌다. 그 길에서 ‘사랑’이, 무수한 ‘우연’이 ‘또’ 시작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 오는 것일까’, 거스름돈 같은 것이 사랑이다. 무언가를 계속 지불하고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며 ‘아프게 나를 깨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 그리고 추억이 속도를 더할 때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아프게 귓가를 찌른다.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라는데, 사랑은 그렇게 항상 결핍된 존재로만 오나 보다. 그 추억 어디쯤에 말들은 이제 무성해져 사과 한 알은 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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