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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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페미니즘 비평을 큰 틀 안에서 보자면 가부장적인 윤리적/인식론적 가설 토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객관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 ‘객관성’과 ‘권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방법론은 페미니스트마다 제 각각의 입장을 견지하며 발전해 왔다.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에서 토릴 모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전통 아래서 영/미 페미니즘이론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영/미 구분에 대해 자넷 토드의 지적대로 사회주의적 전통에 있는 ‘영국 페미니즘’과 ‘미국(백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릴 모이의 ‘영/미’와 ‘프랑스’ 구분은 그들이 활동하는 지적 전통하에서 텍스트의 접근 방법을 토대로 하니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모이는 경험주의적 전통에 있는 일레인 쇼월터, 케이트 밀렛, 메어리 엘만, 샌드라 길버트&수잔 구바와 이에 대비되는 반본질주의적 특성을 갖는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텍스트 등을 분석하고 있다. 모이는 이들 텍스트의 탈정치화된 독해법에 대립해서 정치화된 독해법을 증명해 내려고 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 비평의 의의를 이론이나 방법론 차원을 넘어 정치성의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완전히 새로운 제3의 태도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담론의 장(싸움의 장)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깝다. 이 책의 역자들은 모이가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이라는 것이 수사적인 의미 외에 어떤 정치적 힘을 지니는지”에 회의를 가지며 거리 두기를 하는데, 모이가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페미니즘들 사이에서 부재한 ‘비판적 논쟁’을 끌어내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의 시간」에서 ‘차이’의 담화와 이에 대립하는 거울의 영상으로서 ‘평등’의 담화 그리고 이 모두를 극복하는 해체와 초월의 ‘제3의 공간(세대)’을 제시한다. 제3공간은-공간인 가운데 욕망을 갖는 정신의 공간으로- 모든 성적 정체성, 이분법적인 대립물, 모든 가부장적인 행태는 ‘형이상학’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토릴 모이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상당히 빚지고 있지만 ‘차이’와 ‘평등’이 단순히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평등’을 필수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했을 때, 차이와 평등의 페미니즘 논리 또한 해체 위기를 맞게 된다. 크리스테바에게 세 가지 페미니즘 공간들은 논리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모이는 크리스테바와는 달리 이 세 가지 입장을 한 공간에 모두 견지하고자 한다. 논쟁적으로 어느 한 가지 입장을 택하는 동시에 차이, 평등, 제3공간 페미니즘의 모순점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다. 가령 스피박이 『다른 세상에서』를 통해 보인 텍스트 전략-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 재생산에 대한 페미니즘적 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식민지 주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이 동시에 불거져 나와 갈등상태에 놓이게 된 것-처럼 “서로를 위기로 몰아 서로를 치명적으로 방해하는” 여러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잇달아 생기는 위기는 선형적인 연속성을 파괴하고 주체와 주체의 담론들이 탈중심화하려는 욕망을 도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존재론의 연막」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어떤 이론이든 한 입장에 서서 모든 영역의 이론을 완전히 포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입장을 택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틀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입장을 제시하고 전략적으로 특정한 주장을 발전시켜 간다는 것은 언제나 경쟁 위치에 있는 다른 입장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부정하며 배제한다는 데에서 페미니즘‘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단 하나의 ‘올바른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덧붙이 –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이론에 대한 개괄서로도 손색이 없는데, 좀 더 쉽게 접하려면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과 라캉(5장)에 관한 보론 격으로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듯싶다. 둘 다 매우 가벼운 책이다. 여기서 ‘가벼운’은 물리적 무게이다. 토릴 모이에 대한 다른 번역으로는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한신』에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문체」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가장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의 『타자인 여성의 반사경』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 하고 있지만 그 첫 장이 『현대문학 비평론/한신』에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마주 향해 바라보기」가 『영미여성 소설론/정우사』에 번역됐을 뿐이다. 더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방에는 없다. 제발 번역 좀 해주면 꼭 “새”책으로 사서 읽으마. 무수히 많은 전공자를 두고, 없는 능력 시간 쏟아가며 원서로 읽기엔 왠지 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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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꼼지락

    2009. 11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공저자 산드라 길버트에게 수학하신 박오복 선생님께서 번역해서 이후출판사에서 출간됐습니다.

  • 너부리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번역중입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이은경선생님(과 임옥희 선생님)이 번역중이지요. 워낙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출판상 약간의 복잡한 상황이 있어서 2년쯤 후에야? 출판될듯. 이리가라이는 스펙큘럼만 쏙 빼놓고 다른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을 텐데

    • 부깽

      해 바뀐 걸 감안해서 2년인가요? 이라가레의 번역도 몇 년 잠잠했으니 '쏙' 빠졌던 반사경을 기대해보지만 요것도 엄청난 분량이니 흐리마리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