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읽기
페미니즘 비평을 큰 틀 안에서 보자면 가부장적인 윤리적/인식론적 가설 토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객관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 ‘객관성’과 ‘권위’가 어떤 전제 위에서 작동해 왔는지를 다시 묻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방식은 페미니스트마다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발전해 왔다.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에서 토릴 모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전통 아래서 영미권 페미니즘 비평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을 교차시킨다. 이 책의 관심은 ‘누가 더 급진적인가’의 판정이 아니라, 비평의 방법과 원리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낳는지에 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선명하다. 페미니즘 비평의 실천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 문학 텍스트의 문제는 페미니즘 정치의 우선순위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영/미 구분에 대해 자넷 토드의 지적대로 사회주의적 전통에 있는 ‘영국 페미니즘’과 ‘미국(백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이가 사용하는 ‘Anglo-American’과 ‘French’는 국적이나 출생지 같은 국가적 표지를 세밀하게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이는 이 이름들이 “순수하게 국가적 구획”이 아니며, 비평가의 출생지와도 무관하다고 명시한다. 이 구분은 각 전통이 텍스트를 읽는 규칙을 통해 정치성을 어떻게 드러내거나 가리는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 책의 한 축을 이루는 영미권 비평은, 신비평이 문학을 현실과 분리된 자율 영역으로 상정하는 ‘형식주의적 환상’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그 환상을 되풀이할 위험을 드러낸다. 모이는 미국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신비평의 비역사성(ahistoricism)을 꾸준히 공격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비판이 신비평의 미학적 이상을 “비판 없이 채택”하는 방식으로 회수되었다고 지적한다. (번역에서 ahistoricism을 ‘무역사주의’로 옮겼지만, 여기서는 통상적 용례에 따라 ‘비역사성’으로 표기한다.)
영미권 페미니즘 비평 내부에서도 모이가 먼저 짚는 것은 ‘텍스트를 무엇으로 보는가’의 차이다. 케이트 밀렛의 작업은 남성 작가 텍스트가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성적 위계에 정면으로 돌입하면서, 작품 속 말하기의 위치들을 섬세하게 가르기보다 텍스트를 곧바로 하나의 ‘발언’으로 읽는 경향을 드러낸다. 서술자와 인물의 말, 작품이 구성하는 아이러니와 거리, 발화의 전략이 충분히 분해되지 않은 채, 텍스트는 곧장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증거로 제시된다. 모이는 이를 단순한 무지로 몰기보다, 밀렛이 문학을 “반영(reflection)”으로 가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그 반영의 매개가 텍스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지 끝내 밀어붙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본다. 밀렛의 독해는 권위주의적 읽기를 흔드는 데에서는 날카롭지만, 여성 텍스트를 같은 방식으로 읽어도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곧바로 멈춘다. 남성 텍스트를 “혐오”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반권위주의가, 여성 텍스트의 장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존경해야 할 여성 작가’라는 형태로 권위를 되살릴 위험이 남는다.
이 문제의식을 다른 결로 끌고 가는 인물이 메어리 엘만이다. 엘만은 “여성을 하나의 현실적 대상이라기보다 말/단어로서의 여성”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며, 여성에 대한 통념이 문학적 수사와 묘사 관습 속에서 어떻게 굳어지는지 파고든다. 모이가 보기엔 엘만의 장점이 여기에 있다. ‘여성 경험’의 진정성을 척도로 삼기 전에, 여성성 자체가 이미 언어적 관습 속에서 만들어지고 반복된다는 사실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세운다. 다만 엘만의 이 출발점은, 가부장제를 문학 바깥의 역사·정치적 관계로 풀어내기보다는 문학적 관습의 분석에 더 오래 머무르게 만들기도 한다.
모이가 ‘영미권 비평’의 핵심 난점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는 지점은, 쇼월터(그리고 패트리샤 스텁스, 마샤 홀리 등)에게서 발견되는 전통적 휴머니즘의 잔존이다. 여기서 정치란 “올바른 내용이 올바른 리얼리즘 형식으로 재현되는가”의 문제로 재정의된다. 울프가 실패한 작가로 판정되는 이유는 ‘여성의 진실한 그림(truthful picture of women)’을 주지 못했고, ‘강한 여성상’으로 독자가 동일시할 이미지가 부족하다는 식의 요구 때문이다. 그 요구는 “형식주의를 버리고 진정성(authenticity)의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선언과 맞물리며, 리얼리즘은 다시 ‘일관된(비모순적) 지각’의 규범으로 굳어진다. 이때 ‘현실’과 ‘경험’을 강조하는 언어는 정치의 토대처럼 보이지만, 곧바로 “무엇이 현실적인가”를 판정하는 권위를 비평가에게 되돌려준다. 비리얼리즘적 형식은 ‘현실 도피’로 밀려나고, 텍스트는 ‘여성의 경험을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는가’의 문제로 축소된다. 모이는 이 흐름 속에서 리얼리즘 요구가 ‘여성 롤모델’ 요구와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 충돌을 덮는 것이 다시 ‘진정성’이라는 규범이라고 짚는다. ‘현실’이 비평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순간, 비평의 문법은 ‘should/demand/requirements’ 같은 처방적 어휘로 기울어지고, 텍스트는 정치가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판정받는 대상으로 바뀐다.
이 흐름에서 영미권 내부에서 시작된 “이론적 성찰”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아네트 콜로드니는 “페미니즘 비평”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아직 없다는 사실을 전면에 놓고, 여성 글쓰기의 고유성을 말할 때 곧장 자연/본성 논쟁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경계한다. ‘여성적 양식’을 찾겠다는 욕망이 곧 ‘남성적 양식’의 대칭항을 발명해야 하는 의무로 이어질 때, 비평은 비교의 틀 자체를 다시 자연화할 수 있다. 콜로드니는 각 작품의 특수성을 먼저 존중하는 귀납적 방법을 제시하지만, 이 방법이 곧바로 또 다른 모순(개별성의 존중과 ‘반복되는 여성성’의 추출 사이)을 안게 된다는 점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모이가 예고하는 대안이 ‘정치화된 독해’다. 책의 서두에서 호출하는 버지니아 울프 사례는, 그 독해가 실제로 무엇을 겨누는지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모이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면서, 영미권 페미니스트 비평이 울프를 불편해했던 이유를 먼저 드러낸다. 특히 엘레인 쇼월터가 울프의 양성성(androgyny)을 ‘도피’로 규정하고, 『자기만의 방』의 문체적 장치들(유희, 과장, 반복, 시점의 이동, 인칭의 가면)을 ‘진지함의 결여’로 판독하는 방식은, “페미니즘적 텍스트는 이래야 한다”라는 규범적 기대가 독해를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는지 노출한다. 쇼월터가 울프를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서사 전략에서 ‘거리를 두어야(detach)’ 한다고 말하는 순간, 텍스트의 형식과 전략은 정치적 의미를 생산하는 장이 아니라, 정치에 도달하기 위해 벗겨내야 할 ‘표면’으로 격하된다.
모이가 옹호하는 울프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울프의 양성성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통일된 자아와 단일한 관점이 가능하다는 가부장적 환상을 흔드는 글쓰기의 전략으로 읽힌다. 『자기만의 방』이 끊임없이 주체 위치를 이동시키고, 경험을 한 번에 ‘투명하게’ 고백하지 않으며, 자신을 패러디하거나 위장하는 방식은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장난이 아니라, “정체성”과 “경험”이 곧바로 정치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의심하게 만든다. 울프의 텍스트가 독자를 하나의 ‘안전한’ 위치에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모이가 말하는 정치성의 한 양식이 된다. 정치화된 독해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텍스트가 아니라 ‘통일된 자아, 단일한 시점, 리얼리즘과 진정성의 규범’ 과 같은 독해의 전제를 문제 삼는다.
울프를 둘러싼 판정의 언어를 한 번 거꾸로 세워보면, ‘정치화된 독해’가 무엇인지 비로소 선명해진다. 정치화된 독해는 텍스트에 정치적 메시지를 덧붙이는 일이 아니다. 텍스트가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 그 의미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유통되는 조건, 비평이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가르는 과정 자체가 성별화된 전제와 결합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문학이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형식주의적 환상을 지워내는 것이 페미니스트 비평의 한 정의가 될 수 있다면, 정치화된 독해는 바로 그 ‘분리’를 가능하게 했던 권위의 장치들을 겨냥해야 한다.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고 어떤 기준으로 판정하는지, 그 기준이 누구를 배제하며 무엇을 자연화하는지까지 드러내는 것, 그 과정이 정치의 자리를 비평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
반대로 프랑스 이론 계열은 본질주의를 압박하는 데서 강한 힘을 보여주면서도, 정치성을 다른 방식으로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 언어·욕망·주체의 분열을 통해 가부장적 인식론을 흔드는 순간들이 있는 반면, 그 흔들림이 역사성과 물질성의 장에 닿지 못하면 비판은 초역사적 구조로 고정되기 쉽다. 모이는 이 문제를 ‘난해함’이나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이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는가의 문제로 취급한다. 그래서 모이의 구분은 두 전통을 서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비판적 논쟁의 장을 여는 데 있다.
프랑스 이론을 말할 때 ‘보봐르를 버리고 차이를 택했다’는 도식이 자주 호출된다. 모이는 이 도식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프랑스 페미니즘의 “새 세대”가 보봐르의 ‘평등’ 욕망을 거부하고 ‘차이’를 옹호했다는 통설을 소개한 뒤, 그 그림이 훨씬 복잡하다고 말한다. 보봐르는 여전히 프랑스 페미니즘의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남아 있고, 그의 상징적 지지와 사회주의·반본질주의 계열의 공존은 ‘평등/차이’의 단순 대립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모이가 강조하는 것은 ‘누가 더 프랑스적인가’가 아니라, 보봐르의 ‘타자’ 분석이 이후 이론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서술되고 이동하는가 하는 문제다. 크리스테바의 관심사들(계급과 젠더를 함께 사유하려는 욕망, 여성성의 구성)을 보봐르와 나란히 놓고, 이리가레의 비판이 때로 보봐르의 타자론을 포스트구조주의적으로 다시 쓰는 것처럼 읽힌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모이는 보봐르가 정신분석을 거부한 지점이 프랑스 여성운동의 맥락에서 『제2의 성』을 “가장 낡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식수·이리가레·크리스테바가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에 크게 빚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읽기 위해서는 라캉의 핵심 개념들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 따라온다. 라캉의 상상계/상징계 구분, 언어의 획득과 ‘아버지의 법’이 주체를 분열시키는 과정, 주체가 결핍의 기호 아래에서만 ‘말하는 존재’로 서게 된다는 설명은, 단지 난해한 이론의 요약이 아니다. 이 장치는 ‘정체성’과 ‘경험’을 투명한 출발점으로 삼아 정치성을 확정하려는 욕망에 제동을 건다. 프랑스 이론의 급진성은 그 제동 자체에 있다. 문제는 그 급진성이 어떤 사회적 관계의 장으로 이어지는가, 어디에서 멈추는가다. 모이가 “프랑스 이론”을 ‘차이의 찬미’로만 읽지 말라고 요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열린다.
이 책에서 모이는 프랑스 이론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호출한다.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이는 그 차이를 따라가면서, 프랑스 이론이 흔히 ‘차이’의 찬미로 요약될 때 놓쳐지는 정치적 쟁점을 되살린다.
엘렌 식수: 이항대립의 전장과 ‘여성적 글쓰기’의 양가성
식수에게 서구 철학과 문학은 끝없는 위계적 이항대립의 연쇄로 얽혀 있다. 자연/역사, 자연/예술, 자연/정신, 정념/행동 같은 대립쌍은 결국 남성/여성이라는 근본적 ‘쌍’으로 되돌아간다. 식수는 이 대립이 단순히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항이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다른 항을 파괴해야 하는 전장이라고 말한다. 승리는 활동성과 결합되고 패배는 수동성과 결합되며,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은 언제나 승자의 자리에 놓인다. “여성은 수동적이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수의 유명한 진술은, 여성에게 ‘긍정적 공간’이 부여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고발이다.
이 고발을 밀어붙이며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를 제안한다. 그것은 ‘여성 저자’의 생물학적 성과 직결되는 표지가 아니라, 이항대립의 폐쇄를 갈라 열고, 기표의 유희와 텍스트성의 개방성을 통해 남근-로고스 중심 논리를 흔드는 글쓰기의 방향이다. 모이가 식수를 읽을 때 핵심은 여기서 생기는 양가성이다. 한편으로 식수는 가부장제의 인식론을 텍스트의 형식과 언어의 층위에서 공격한다. 다른 한편으로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명명 자체를 혐오한다고 말하며, 남성/여성이라는 이름이 이미 이항대립의 감옥이라고 경고한다.
모이가 붙잡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가 어떻게 생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름에 걸리지 말라”는 명령은 분명 해방적이지만, 전선을 세우고 연대를 조직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이름과 범주가 불가피하게 요구되기도 한다. 식수의 급진성은 언어를 흔드는 힘을 갖지만, 그 흔들림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변형시키는지에 대한 문장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모이는 이를 ‘식수의 약점’이라기보다, 프랑스 이론이 빈번히 겪는 탈정치화의 경향으로 진단한다. 언어의 전복이 사회적 전복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뤼스 이리가레: ‘동일자’의 체계와 모방의 전술
이리가레는 남근중심 담론이 자신을 보편으로 정립하는 방식을 ‘동일자(the Same)’의 논리로 추적한다. 여성은 독자적 주체라기보다 남성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한 거울로 배치되고, 여성성은 언제나 타자의 자리에서 정의된다. 이리가레의 글쓰기가 고대 철학, 정신분석, 수학적 도식, 알파벳의 변주를 끈질기게 호출하는 이유는, 남성 중심의 기원 서사와 진리 담론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방법’의 층위에서 이미 여성 배제를 내장하고 있음을 폭로하기 위해서다.
이때 이리가레의 핵심 전술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모방(mimesis)이다. 남성 담론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 말하면서 그 과잉을 통해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모방은 굴종이 아니라 전복의 전략이며, “보편”이 사실은 특수한 위치의 자기 찬양이라는 사실을 노출시키는 장치가 된다. 정치화된 독해는 여기서 이리가레의 ‘난해함’을 미학적 취향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난해함이 겨누는 권력의 구조, 곧 여성이 의미 생산의 자리에서 어떻게 배제되는가를 구체적 문제로 되돌린다.
다만 모이가 이리가레에게서 강하게 지적하는 약점은, 이러한 비판이 역사적 특수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할 때 ‘초역사적’ 구조 비판으로 고정된다는 점이다. 모이는 이리가레의 『반사경(Spéculum)』이 “비역사적이며(ahistorical)” 역사적 특수성을 다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성의 위치를 거울로 만드는 장치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 계급·국가·가족·노동 같은 구체적 장에서 벌어지는 변형 가능성은 희미해진다. 이리가레의 급진성은 철학적 중심을 흔들지만, 그 흔들림을 물질적 관계의 분석으로 연결하는 문장이 약해질 때 정치성은 관념적 층위에 머물게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주변성의 이론, 정체성에 대한 의심, 그리고 ‘동질화’의 위험
크리스테바는 여성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보다, ‘주변적인 것’에 속한 부정성과 거부를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전략적으로 배치하려 한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주변으로 규정하는 바로 그 논리를 뒤집어, 주변의 부정성을 통해 남근중심 질서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다.
크리스테바의 핵심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심이다. “정체성, 심지어 ‘성적 정체성’이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이론을 이끈다. 이 의심은 ‘여성적 글쓰기’나 ‘여성의 말하기’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일 수 있다는 주장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성/여성됨’의 이론을 갖기보다, 주변성·전복·이탈(dissidence)의 이론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은 강력한 반본질주의를 제공한다. 동시에 모이는 이 반본질주의가 특정 방식으로 정치적 약점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여성, 지식인 이탈자, 전위 작가, 노동계급의 투쟁을 “중심화된 권력 구조에 대한 투쟁”이라는 동일한 언어로 설명한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투쟁이 지나치게 쉽게 동질화될 위험이 생긴다. 모이가 “서로 다른 구체적 투쟁들의 다소 경솔한 동질화(glib homologization)”를 약점으로 지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화된 독해는 이 지점에서 크리스테바의 급진성을 찬양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주변성”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서로 다른 위치들을 한데 묶고 그 차이를 지워버릴 수 있는지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이 모든 논의는 어떤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페미니즘 비평이 스스로의 규칙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에 가깝다. 영미권 비평은 신비평의 비역사성(ahistoricism)을 비판하면서도, ‘현실’과 ‘경험’을 진정성의 척도로 세우는 순간 다시 처방적 어휘를 호출하게 된다. 프랑스 이론은 주체와 의미의 중심을 흔드는 힘을 갖지만, 그 흔들림이 역사적·물질적 특수성을 충분히 통과하지 못하면 비판은 초역사적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 모이가 겨누는 것은 어느 한 진영의 승리가 아니다. 서로 다른 독해의 장치들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가리는지 드러내고, 그 긴장 속에서만 페미니즘 비평이 자기 전제를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책의 매력은 이 긴장을 ‘조정’하거나 ‘봉합’하지 않는 데 있다. 정치성을 말하면서도 하나의 방법을 규범으로 세우지 않고, 개입을 말하면서도 개입의 언어가 스스로 새로운 권위가 되는 순간을 경계한다. 모이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무엇을 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고, 그 읽기가 누구를 배제하며, 무엇을 자연화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이 남기는 마무리는 선언이 아니라 과제에 가깝다. 비평은 결론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가능하게 했던 과정을 다시 드러내고 흔드는 자리에서만 정치가 된다.
덧붙이 –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비평의 서로 다른 전통을 교차시키며, 그 이론의 지형을 한 권 안에서 훑게 해주는 개괄서로도 손색이 없다. 좀 더 쉽게 접하려면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과 라캉(5장)에 관한 보론 격으로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듯싶다. 둘 다 매우 가벼운 책이다. 여기서 ‘가벼운’은 물리적 무게이다. 토릴 모이에 대한 다른 번역으로는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한신』에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문체」가 실려 있다. 함께 읽으면, 모이가 말하는 ‘정치화된 독해’가 단지 내용의 정치성이 아니라 문체와 방법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이 더 또렷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가장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의 『타자인 여성의 반사경』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 하고 있지만 그 첫 장이 『현대문학 비평론/한신』에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마주 향해 바라보기」가 『영미여성 소설론/정우사』에 번역됐을 뿐이다. 더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방에는 없다. 제발 번역 좀 해주면 꼭 “새”책으로 사서 읽으마. 무수히 많은 전공자를 두고, 없는 능력 시간 쏟아가며 원서로 읽기엔 왠지 좀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