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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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토 로살도의 <문화와 진리> 서문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로 시작한다.

 

예컨대 선생님이라는 권위를 가진 어떤 사람이 <이것이 바로 세계다>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순간 심리적인 불균형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때와 같다. 

-애드리언 리치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도서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 <Blood, Bread, and Poetry>를 빌려서 읽는 김에 겸사 번역해 봤다.

 

학계에서의 보이지 않음(Invisibility in Academe)

북미 사회에서 백인 지배 아래의 레즈비언 역사는 1656년 코네티컷 뉴헤이븐에서 레즈비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서 시작된다. 300년 후인 1950년대에도 레즈비언들은 거리에서 구타당하거나 부모의 강요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정신 수술을 강제당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80년대 중반, 여성 해방 운동과 게이 해방 운동의 투쟁과 비전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공격받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여자 대학 인근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도 지난해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행동 교정과 의학적 처벌을 강요당하고,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하며, 인종·종교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한다. 직장을 유지하거나 자녀 양육권을 얻고, 집을 빌리며, 공적인 자리에서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인 척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에 비하면, ‘보이지 않음’은 감내할 만한 작은 대가처럼 보일 수 있다(‘개인 생활은 비공개로 하라’거나 ‘그 단어만은 쓰지 마라’는 요구처럼). 그러나 보이지 않음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이며, 레즈비언들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이름을 붙이고 사회적 현실을 구성할 권력을 가진 이들이 당신을 보지도 듣지도 않기로 선택할 때—당신이 피부가 검거나,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거나, 여성이거나, 그들과 다른 억양이나 방언을 쓰는 사람일 때—예를 들어 교사의 권위로 세상을 설명하면서 그 설명 안에 당신을 포함하지 않을 때, 당신은 마치 거울을 봤는데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 같은 정신적 불균형을 느낀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으며, 당신과 같은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는 거울을 이용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 공허함, 이 비존재 상태에 저항하고 일어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혼의 힘이 필요하다—개인의 힘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며, 당신의 경험이 다른 이들의 경험만큼이나 현실적이고 규범적이며, 역사학자 블랑쉬 쿡의 말처럼 ‘도덕적이고 평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신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억압자의 일을 대신해, 스스로의 벽장을 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19세기 여성들—모든 여성들—이 공개 모임에서 발언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그들의 침묵에 의존했다. 하지만 몇몇 여성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침묵을 거부하고 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10년 동안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다. 나는 스스로 레즈비언임을 밝혀왔고, 다른 이들의 출판물에서도 레즈비언으로 명시되어 왔다. 나는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운동에서 활동해 왔다. 여기 클레어몬트에서 나는 많은 따뜻함과 환대를 받았지만, 레즈비언으로서는 종종 보이지 않는 존재로 느껴졌다. 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이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환영받았다.  그러나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은 많은 이들이 알기를 꺼렸다. 이 경험은 내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보이지 않음은 단순히 ‘개인 생활은 비공개로 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이는 당신을 파편화하고, 사랑과 노동, 감정과 사상을 통합하여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내적 힘을 방해하려는 시도다.

 

나는 이 공동체에만 국한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 프로그램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이러한 파편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화와 논의의 기본은 여전히 이성애 중심이고, 레즈비언의 경험과 사상은 독서 목록의 일부나 단일 수업 시간으로만 ‘포함’될 뿐이다.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유색인종 여성들의 경험과 사상도 별도의 섹션으로 밀려나거나, 뒤늦게 생각난 듯 추가되는 반면, 중심 담론은 여전히 한결같이 백인 중심이며, 주로 중산층적 사고방식과 우선순위를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 장벽의 이름은 인종차별이고, 첫 번째는 이성애주의(heterosexism)다. 흑인 정치학자 글로리아 I. 조셉(Gloria I. Joseph)은 ‘제3세계 여성과 페미니즘’ 강연에서, 호모포비아(homophobia)라는 용어가 통제할 수 없는 정신적 공황을 암시하기 때문에 부정확하다고 지적했다. 이성애주의(heterosexism)가 더 적합한 용어이며, 인종주의, 성차별, 계급주의와 유사한 뿌리 깊은 편견—정치적 세뇌—을 더 정확히 나타낸다고 제안했다. 이는 반드시 인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재교육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남성 중심의 성별화된 사회에서 자란 어떤 여성도, 여성을 감정적·에로틱한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다양한 여성들의 존재, 실재, 그리고 현실을 모른 채로는, 이성애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고정관념과 금기 속에서 20대에 접어드는 젊은 여성은 자신의 감정, 선택 가능성, 남성 또는 여성과의 관계를 제대로 성찰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이 무지와 불안은 레즈비언과 이성애자로 정체화된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침묵, 이 전체 인구의 부재, 이 보이지 않음은 모든 여성의 사회적 권한을 약화시킨다. 레즈비언 학생들만이 자신들의 역사와 존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현재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정확히 이해하며, 사회적 관계의 미래를 상상하려는 모든 여성이 함께 요구해야 한다.

 

여기 모인 우리 레즈비언들은 느끼고 있다. 우리를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온전한 존재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우리를 알려고 하지 않고 도망치며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다른 주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포함해, 온갖 우회적이고 예의 바른 척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침묵시키려 한다. 이 공동체에는 레즈비언뿐만 아니라 이성애주의의 지적·도덕적 빈곤을 인식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회의가 끝난 후에도 논의가 지속되길 바라며,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 집단적 이해를 더욱 공고히 해나가길 바란다.

 

스크립스 칼리지 컨퍼런스에서의 발언,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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