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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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마드리드 출발
임도를 타다 N-320 도로로 나왔다. 도토리나무 아래서 이름씨가 싼 점심을 먹었다. 이런 호화로운 음식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을 듯.

첫 번째 텐트.
이래 봬도 도마뱀도 토끼도 있는 곳. 루친은 이베리아 반도가 토끼의 땅이라고 했다. 사람이 버린 땅이 저들에겐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이 된다.

내내 편하게 있다가 뙤약볕에서야 왜 자전거를 타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5.4
느지막이 텐트를 개고 출발.
중간에 잠시 쉬면서 어디가 정주행일까? 길 위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을 테니, 저것은 역주행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트레일러 무게는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처럼 온다. 수건 한 조각도 버리지 못하면서 마음을 비워야지라고 생각한 게 한심하다. 계속 이고가야 할 것들. 그 한 가운데 마음하나가 있다. 시처럼,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가 아니라, 내가 폐허였다. 왜 여기에 왔을까? 계속 물음만 반복된다. 자전거가 온갖 궁상을 떨어버릴 거라는 기대는 기를 써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상황에서 내 긴 시간을 압축한 것만 같다. 달리면서 내내 그리운 것들은 먼 데 있어도 여전하다.

두 번째 텐트는 공원 언덕에서.
9시나 돼야 해가 진다. 날이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해 졌다.

5.5
초행의 정적을 깨는 것은 헉헉대는 숨소리뿐이다. 그 안에서 먼 곳을 돌아도 그곳에 네가 있기를 바라본다. 바라다, 본다. 보이는 듯하다. 신기루처럼. 사막 여행자에게 신기루는 오아시스였을 것이고, 자전거 여행자에게 신기루는 내리막길일 것이다. 저 앞에 신기루가 있다. 신기루처럼 무언가 있는 게 아니라 앞서 지나는 차들이 물웅덩이 폐인 곳에서 사라진다. 조금만 더 가면 내리막길이구나라는 확신이 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곳에 도착하면 또 오르막이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반복 속에서도 체념하지 못한다. ‘이번엔 제발’ 이런 기대감으로 멈출 수 없다.

오르막이 이렇게 힘들구나. 새삼 깨닫는다. 내 바람도 신기루일까 무섭다. 거기에도 네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무서움. 감정의 옹졸함이 길 위 곳곳으로부터 베인다. 바람(願)은 바람(風)이 아니듯 내 원망은 끝끝내 願望이다.

어제는 악몽을 꿨다. 슬픈 꿈이었다. 마음이 아팠고 몸이 아렸다. 잠을 설칠 때마다 안부가 궁금하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가지 못하는구나.

무게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뒤돌아 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옆에 아무리 근사한 풍경이 있어도, 지나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응원을 던져도 묵묵히 땅을 보며 페달을 굴린다. 광대와 이름씨는 이종이산인냥 멀어져갔다.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아스팔트에 떨어지고 그 위를 바퀴가 지난다. 땅바닥 말고 주위를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싶었다.

종아리에 화상을 입었다. 분명 7부 자전거 바지를 샀는데, 겨우 무릎에 걸쳐진다. 후시딘을 가져왔는데 처방을 읽어보니, 여드름부터 화상까지 흡사 만병통치약 같은 기운을 풍긴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도 통하는 약이면 좋겠다.

스페인 고속도로는 오토비아와 오토피스타가 있다. 오토비아는 자전거가 갈 수 있는 길이라서인지 갓길이 퍽 넓다. 거기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봤다. 로드 킬은 어디서나 매한가지. 길 위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에게 애도를, 드넓은 대지에 묘비조차 없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애도를.

이름씨가 넘어지면서 크게 다쳤다. 부랴부랴 약을 바르고 잠시 쉬는데, 어디선가 고속도로 순찰 오토바이가 온다. 이미 사고가 있다는 걸 알고 온 눈치다. 지나는 차들이 대신 신고를 한 듯. 우리는 그 흔한 전화기조차 없다. 앰뷸런스를 계속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데 됐다고 했다. 비쌀까봐. 옆으로 넘어지면서 광대뼈와 무릎을 다쳤다. 버프위로 피가 스몄다. 일찍 텐트를 쳤다.

이곳은 어디나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아 있다. 구름은 별 수사 없이 그림처럼 있고, 우리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혹은, 지평선 한 자락에 집을 짓는다.

텐트를 친 곳. 곳곳에 개미집이 있다. 멍하니 보다, 개미들의 분주함에 잠깐 경외가 일었다. 움직임 자체가 소명인 듯싶다. 길은 끝이 없고, 목적지는 딱히 없다. 가는 곳 어디에도 반기는 이 없고, 낯섦과 그 감정을 억누르는 이국의 풍경만 있을 뿐이다. 여기는 내내 풍경으로만 온다. 때론 그조차 견뎌야 한다. 이국의 말은 닿지 않고 내 언어의 궁색함으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비로소 책을 들춘다. 마드리드에서 편하게 있을 때는 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장석남의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가지고 왔다. 오래전 처음 집을 떠나면서 챙겼던 책이다. 그때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위로받았던 기억으로 짐 한구석을 차지했다. 이상하게 자꾸 황지우의 시구가 맴돈다.

5.6
12시가 다 돼서 느지막이 출발. A-2 도로에서 N-211로 이동. 구릉 지대를 계속 달렸다. 처음으로 마실 수 있는 물을 발견했다. 물맛이 좋다. 조금 내려와서 해발 1,300미터 지점에 텐트를 쳤다. 안쿠엘라 델 듀카도(Anquela del Ducado). 밖은 추웠지만, 텐트 안은 따뜻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했던 지역이란다. 5월이지만 사람들 옷차림이 마드리드와는 사뭇 다르다.

이름씨와 광대가 만든 김치가 엄청 맛있게 익어서 한 번에 다 해치웠다. 하루 이틀 지나면 더 감칠맛이 돌 텐데 그냥 허겁지겁 먹었다.

5.7
몰리나 데 아라곤(Molina de Aragon)을 지나며 잠시 쉬었다.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산타 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알던 곳과는 다르니 이곳에 있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처음으로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었는 데 잠깐 둘러보고 지났다.

몬레알 델 캄포(MONREAL DEL CAMPO)에 왔다. 웜 샤워를 통해 하루 묵게 됐다. 웜 샤워는 자전거 여행객들이 하루 묶으면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쉬는 데서 시작됐다. 오래전에는 종이로 돌았다고 하던 데 이제는 웹사이트를 갖추고 서로 정보를 나눈다. 몇 명이 얼마나 머물 수 있는지, 어떤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지 미리 알리고 서로 배려한다. 기록상으로 200년 이상 된 집이라는 데 200년 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벽이 두껍다. 아주 편하게 머물며 쉬고 있다.

편안함은 금세 화두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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