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비나스에서 비극이 불가능한 이유.
필립 네모가 "어떻게 사유가 시작되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레비나스는 "이별이나 폭력적 장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의 단조로움에 대한 의식, 이와 같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나 망설임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고통, 비극이 바로 사유의 시작임을, 특히 레비나스적 사유의 시작임을 암시해 준다. 레비나스 고통의 철학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점에서 칸트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1) 변신론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2) 오직 도덕적 악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한계 안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며 (3) 윤리적 맥락에서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4)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 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변신론의 종말은 어떤 논리로 논박되었거나 또는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비합리적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특히 아우슈비츠와 같은 20세기 사건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신론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보고 있다.
변신론의 몰락으로 야기된 것은 (적어도 서양 전통 안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이제 어떠한 의미, 어떠한 유용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결국에는’ 좀 더 나은 선을 이룩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론이 변신론이었고 이것이 무너지자 이제는 고통의 의미, 고통의 유용성 자체가 또다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이렇게 못박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다. 고통, 비극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 비극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레비나스에서 윤리적 사실주의의 한계
레비나스의 핵심적인 윤리관 중의 하나는 "타인을 위한 나의 의로운 고통"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나의’ 고통 또는 ‘너의’ 고통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괴로워한 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한 무의미한 고통이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고통 또는 ‘우리의’ 고통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통을 뒤집어 놓는다. 그의 관심은 내가 받는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받는 고통에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관심은 타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물음에 관련해서 관심의 축을 ‘나’ 또는 ‘우리’로부터 ‘타인’으로 회전시킨 점에서 레비나스의 독창성이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관심 축의 전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받는 고통 중에서, 예컨대 아내나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가운데, 자기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각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발견의 과정은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고통 자체가 아무리 집단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고통 자체로서는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