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22

전화로 메일 좀 확인하라는 소리를 끈질기게 듣다 지쳤다. 그래 확인 하마. 덕분에 몇 달간 몰라라 하던 것들을 뒤적이다가 ‘도메인 연장신청’에 관한 메일을 봤다. ‘아, 내게도 홈페이지가 있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궁금해졌고 와봤다, 그간 변한 게 없구나. 사시나무 떨듯 기지개를 켜고 담배를 물었다.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날이면 부러 몸을 아프게 하고 눕곤 했다. 긴 잠 동안에 밖은 벌써 겨울이고 바깥 창문을 열고 모기장을 걷어냈다. ‘토스카’의 아리아에서처럼 별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밤 오래된 별들은 나를 지나 먼 미래로 가버렸다. 눈이 왔다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 보니 수많은 발자국이 길을 따라 걸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아직 나지 않은 길에 발을 디뎠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걷어내고 맨발로 걸었다. 발이 시렸고 한기가 머리끝까지 서렸다. 나는 생각이 그치는 줄도 모르고 걷다가 벽 앞에 서서야 뒤돌아보았다. 내 발자국 아래 희미하게 아스팔트가 드러나 있었다. 거기선 시처럼 꽃이 피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오가는 길만을 바라봤는데, 내가 저만큼의 보폭으로 세상을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보폭 사이마다 내가 놓친 세상엔 얼마나 많은 눈이 쌓여 있을까. 거기 어디에서는 아스팔트를 깨고 꽃이 필 것만 같다.
집에 돌아와 발을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가 좋아하는 겨울은 바람이 불지 않는 영하 1도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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