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ls / 기타노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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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단순한 신체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특히 대상을 열렬히 사모하는 경우에,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다. 또 사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증거하는 힘이기도 하다. – 메를로 퐁티

돌스 (Dolls) / 기타노 다케시 – 타자와 만나기, 사랑하기
영화는 라는 로 시작되고 있다. 이 분라쿠를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보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공연을 담은 영화를 보고 있다. 그보다 바깥에서 나는 이 영화 Dolls를 본다. 메이도노 히캬쿠가 끝나면서 인형극의 두 주인공인 추베에와 우매가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내 시선이 머물게 되는 곳이고, 나와 두 인형 사이의 간극(분라쿠와 그것을 공연장에서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것을 담은 영화를 보는 영화 속 사람들)이 허물어지는 곳이다. 간극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보일 몇 개의 짧고 진부한 이야기들이 영화 ‘속의’, 분라쿠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나도 현실에서는 이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담론은 시작된다. 타인과 만나서 엮이는 것 말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가는 마츠모토, 그는 앞으로 보장된 삶을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정신이 나간 옛애인(사와코)에게로 간다.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뒤 붉은색 끈으로 서로를 묶는다. 사랑을 위한 최초의 준비는 현재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에서부터, 나 ‘이외’의 것을 ‘나’와 묶으면서 시작된다. – 사랑의 관계로 묶인 타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당신에게 결핍된 단 하나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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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속도는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다(dolls). 오직 묶인 끈만이 있다. 감독은 관객에게 당신들의 체험을 끄집어내라고 한다. 얼굴의 빈자리는 관객(사랑의 제3자)을 위한 자리이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무엇보다도 끈으로 엮인 유일한 존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얼굴(표정)을 잃는 것이다. 동시대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친다. 바람개비는 무심히 그러나 격렬히 돈다. 그리고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가면’인가. 교통사고의 상처를 안고 모습을 감춘 아이돌 스타 하루나. 그녀를 몇 년째 흠모하는 소년(누쿠이)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그녀를 찾아간다. 눈을 찌름으로써 소년은 ‘타인’에서 ‘타자’로 위치를 이동하게 된다. – 타인이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이라면 타자는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 감독은 계속해서 당신은 사랑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 사랑은 하루나(타자)와 누쿠이(나) 사이의 불공평에서 출발한다.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내 안에 가둘 수 있는 눈을 잃은 후에, 모든 주도권을 잃은 후에 현현한다. 누쿠이야 말로 하루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소통 가능한 타자이다. 우리는 ‘나’를 온전하게 알아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던가. 상호성이 더는 신기루나 오해 소강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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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들고 30년 동안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료코), 추억은 멈추지 않고 거슬러 오래전 약속을 끄집어 온다. 문득, 자신을 끝까지 기다리겠다던 장소에 도착한 남자(히로) – 기억은 거짓말처럼 옛사랑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서로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랑은 모든 틈을 메우고 망각시킨다(고 믿는다.) 그(그녀) 역시 행복하다. 생애 어느 때보다, 그녀(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만으로 ‘가장’ 행복하다.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한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울림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인 것이다. 엄청난 우연들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구조 자체이어야 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단풍을 들이민다. 단풍은 사랑의 색깔이다. 아픈 시간들, 4월의 바람과 뙤약볕의 여름을 지나고 나서야 얻은 핏빛의 색깔 –  당신은 저 아름다운 단풍을 시들 때까지(시들지 않는 단풍은 없다.) 지켜보겠는가, 가장 붉게 피었을 때 박제시키겠는가? 사랑은 소멸의 시효를 가지고 있다. 소녀(하루나)와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누쿠이)은 사고로 죽는다. 그 죽음은 소년을 계속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지속시켜 준다. 그는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단풍처럼 시들지 않을 것이다. 옛사랑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야쿠자 두목은 킬러의 총에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만을 안고 죽음에 다다른다. 최고의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것이 설사 핏빛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음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킨다. 탐미적 수사 혹은 사의 찬미라고 말하며 ‘이것도 사랑일 수 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감독은 찬물을 쏟아 붙는다. 소년이 자신의 사랑을 동결하며 흘린 핏 자국을 그것이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비누거품으로 쓱쓱 문질러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이돌 스타와, 옛 애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 사랑은 주관적 사유만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관계의 끈으로만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남기마련이다. 그들의 행복만큼 ‘딱 그만큼’의 고통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 사랑의 그림자는 고통으로 – 타자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남는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환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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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끈으로 서로를 묶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츠모토가 사와코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장소, 그들의 추억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장소)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반과거’ 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이다(하루나를 위한 하모니카, 히로를 위한 도시락, 사와코를 위한 목걸이). 사랑의 정경은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처럼 뒤늦게야 만들어진다. 하지만 토스카의 아리아가 울려야 할 시간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구속도 없이 완전하다. 이 사랑은 어떻게 보존되거나 혹은 되돌릴 수 있을까. 그들은 처음으로 손을 맞잡으면서 사랑(사람)의 얼굴(표정)을 되찾는다. – 이것이야말로 기타노 다케시의 대답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달갑지 않은 사명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똑같은’ 생의 무게를 요구한다. 함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아파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그 온전한 사랑은 아무런 목적(표정)없이, 엮었던 관계의 끈이다. 그 끈은 누구도 남아서 더 고통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고통(육체)을 지고 죽음까지 즉시 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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