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나들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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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이 있어요. 궁뎅이가 촐싹이며 마음까지 에부수수할 때 몸을 가볍게 하고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죠. 간간이 학교에 갈 때나 일터에 가면서 헌책방을 지나치곤 했지만 ‘오늘은 헌책방에 가야지’라고 미리 다짐을 해두면서는 통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며칠 전부터 헌책방에 가야지하고 곱살지는데, “부깽 돈 없다며?” 라고 그루박아 말하더군요. 네 없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 없는 나까지 슬겁게 대하는 미덕으로 신용카드를 추겼고 어찌하다 보니 빌붙고 있답니다. 뼈 빠지게 일하지는 않지만 달이 바뀌는 게 끌탕하긴 마찬가지예요. 기껏 해봐야 인터넷을 통해 책 몇 권 주문하고 어쩌다 커피 한잔하고, 오질라게 추운 날 자전거 대신 지하철을 이용한 게 다인데도 통장에 잔고가 빠지는 날이면 입질에 걸린 붕어처럼 파다닥 하다가 축 처지고 말아요. 그렇다고 참새가 포수 무서운 거까지 생각하면서 방앗간에 가겠어요. 우선 가고 보는 거죠. 카드가 없다고요? 그럴 땐 영풍이나 교보에 가서 몰래 영구 대출을 하는 게 좋죠. 여기서 ‘몰래’가 중요해요. 자기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쥐구멍에 머리 박고 ‘나 안 보이지’하는 것처럼 했다간 진짜 쥐처럼 하루 죙일 벽보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할걸요. 뭐든지 계획이 중요해요. 목욕재계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고, 괜히 잠바 앞 지퍼랑 열어 두지 말고 나볏하게 심호흡 한 번 하고 책방에 들어가세요. 좋아하는 코너에 가서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직원들의 행동반경을 가늠해두고 시작하는 거죠. 책은 안 보고 게름 게름하며 그들의 좌표범위와 운동량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 대상이 영향을 받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잊어선 안 되겠죠. 그러다 기회다 싶으면 몬창몬창하지 말고 한 번에 휙~~ 참고로 한 번도 못해본 일이에요. 그냥저냥 도서관에서 빌려보겠다고요? 네 반납기일을 지키는 것 잊지 마시고요. 겨울에 때 아니게 비 온다고 우산대용으로 쓰지 말고요, 아무리 리포트가 넘쳐도 밑줄 쫙쫙 그어가며 짜깁기 흔적 남기지 말아 주세요.

씹떡껍떡한 소릴랑 그만하고 아저씨 말로는 1년하고 몇 개월 만에 찾았다는 일산 집현전에 갔어요. 그새는 아니지만 길 건너엔 2층 매장도 생겼네요. 『과거와 미래 사이』 『페미니즘의 도전』 『골렘-과학의 뒷골목』 등등의 책을 샀어요. 요 책들이 벌써 헌책방에 나왔느냐고요? 세상 살다 보면 책깡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 집현전 같은 경우는 예전에도 말했지만 새책들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아주마씨의 동생 되시는 분이 어디 출판사에 다녀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출판단지도 있잖아요. 소문엔 교수들이 일산에 많이 산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증정본이라고 해서 “누구누구 혜존”, 피 튀겨가며 책 사도 쟁여 놓기만 할 때가 있는데 지들이 공짜로 받은 책 다 읽겠어요. 여하튼 요런 이유와 아무런 상관없이 신간도 신간이지만 재고 도서라든지 새책 같은 헌책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가 집현전이랍니다. 직접 들러보세요. 참 b님을 위한 『캐치-22』도 샀어요.
가방에 책이 한 짐 가득이네요. 읽지도 않고 뿌듯해질 때는 요때뿐이죠. 작심하고 나왔으니 홍제동 대양서점에도 들러야죠. 대양서점은 용산 뿌리서점과 더불어서 책값이 참 싼 곳이에요. 아버지는 1매장 아들은 2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1매장은 여타의 동네 헌책방과 별다를 게 없이 이러루한데, 2매장은 헌책뿐만 아니라 오래된 lp와 골동품 얄개 영화포스터 같은 것이 한데 아우러 사뜻한 박물관 같아요. 널치난 몸도 쉬어가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죠. 대양에서 짬뽕을 시켜 주기에 맛나게 먹고, 커피로 입가심하고 인삼차를 후루룩 마시고 슬렁슬렁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몇 권의 책을 뽑았죠. 대양에도 한 코너에 새 책들이 즐비하지만 그보다는 구석구석 숨은 책들을 찾는 즐거움을 택하고, 그냥 보면 뭐하나 노느니 염불한다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여성학 책들을 한데 추렸어요. 누군가에게 한 방의 축복이길 바라요. 대부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겠지만 아예 검색이 안 되는 책들도 더러 있어요. 가지런히 꽂아 뒀으니 다녀와 보세요.

『다른 목소리로』 – 너무나 유명해서 그닥 할 말이 없지만 스타이넘이 요 책을 두고 “인간 사회에 여성의 삶을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사회 자체를 완결한 책”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어요. 여하튼 여성학과 심리학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책이랍니다. 수 세기 동안 남성의 경험이 흡사 인류의 경험인양 사기 치던 기존의 발달 이론에 똥침을 가한 책이죠.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 게센인이 아닌 이상 요걸로 위안 삼으세요.
『내부로부터의 혁명』 – 진즉에 절판인지라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데,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인도에서 요가 배운 뒤에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관련해서 쓴 것입니다. 1,2 권으로 나왔는데, 1권은 어쩌다 헌책방에서 반짝하는데 2권은 잘 안 보여요. 다니다 보면 만날 날이 있겠죠. 저도 몇 년 전 오늘처럼 무작정 다니다 우연히 만났던 책이에요. 요전에 봤던 벨 훅스의 『사랑의 모든 것』에서도 짧게나마 언급을 하고 있어요.
『페미니즘과 문학』 – 출판사에서는 더 못 찍을 테고, 대학 구내 서점 같은 곳에 재고가 남은 걸 본 적은 있어요. 일레인 쇼월터의 ‘페미니스트 비평 황야에 서다(다시 나왔지만)’나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과 폴리스’ ‘중심에 있는 어머니’ 등등 중요한 텍스트들이 실려 있어요.
『페미니즘 이론』 – 페미니즘의 교과서 같은 책이라죠.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 요것은 『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란 제목으로 개정돼서 다시 나왔어요. 안 읽어 봐서 올마나 바뀌었는가는 모르겠네요.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 성 정체성에 대한 ‘nature’냐, ‘nurture’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죠.
외에도 『현대 여성 해방 사상』 『가족은 반사회적인가』 『페미니즘과 종교』 『한국의 여성과 남성』『여성해방의 이론 체계』 등등 다양한 여성학 관련 책이 즐비하더군요.
암암한 기억을 좀 더 쥐어짜 보면 페미니즘 서적 외에도 몇몇 특별한 책들이 있었어요. 가령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1,2,3, 양장케이스 같은 것 말이죠. 찾던 사람에게는 춤출 일인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짐이죠. 9만 얼마였던 책값이 올라서 12만 원이나 하는 책인데, 책값이야 엿장수 맘이라고 1/3 가격 혹은 말 잘하면 1/4에 살 수 있을 거예요 . 상고사를 다루는데 내용도 재미난 것은 물론이고, 만화도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죠.
그리고! 『모피를 입은 비너스』도 있었어요. 요것은 들뢰즈 『매저키즘』에 부록으로 실려 있긴 하지만 ‘인간사랑’보다 ‘과학과사상’의 번역이 더 잘 읽혔어요. 게다가 표지도 더 이쁜걸요! 사드에게 『안방철학』(규방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왔더군요)이 있다면 마조흐에겐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있죠.
당연히 기억 못 하는 책이 훨씬 더 많아서 뭐가 더 있는지는 역시나 직접 나들이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두 책방의 약도는 홍제동/대양서점, 일산/집현전을 참고 하세요.

대양 서점에서는 저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아방가르드 예술이론』과 『아마조네스의 꿈』을 샀어요.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86년에 출간된 것인데 같은 해에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으로도 심설당에서 나왔었죠. 이미 제본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척 어렵게 ‘독해해야’했던 책이었죠. 두 번역을 비교해 보았는데, 적절하게 합치면 잘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기회가 있을랑가는 모르겠네요. 원저의 제목을 그대로 따른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영어를 중역한 것이고,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는 독어를 번역한 것인데, 때로는 중역이 더 훌륭할 때가 있기 마련이죠. 도스또예쁘스끼의 범우사판과 열린책들판을 생각해 보세요.

『아마조네스의 꿈』은 바바라 워커의 소설이에요. 원제는 짐작하신대로 ‘아마존Amazon’이에요. 『흑설공주 이야기』같은 동화 뒤집어 보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아마존’도 일찍 번역이 됐네요. 안티오페라는 여성왕국 아마존의 무사가 20세기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떨어지면서 생기는 일이에요. 이거 내용을 말하기 아쉬울 정도로 옛날 수업 중에 몰래 반찬 집어 먹던 달근달근한 게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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