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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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프게 비가 내린다.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부슬거린다. 숨책에 자전거를 묶어둔 것을 집으로 가져와야지 싶었다. 아스팔트를 달리는 것은 허벅지에 어떤 무리도 없다. 외려 바퀴에 딸려 발은 내 의지를 벗어나고, 바람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게다가 비까지 한몫하니, 속도는 거칠 게 없다.
‘비가 계속 오면 어쩌나’라고 생각 하는 순간 바퀴가 아스팔트를 엇나갔다. 왼쪽 무릎과 양손바닥이 듬성듬성 패였다. 살 껍질은 어디 있는지 안 보인다. 이거 참, 보고 있자니 아찔한데 그닥 아프진 않다. 상처는 보이지 않으면 이보다 덜 아프다. 피는 ‘아프다’라는 기의를 끌어내는 기표로서 작용한다. 보이는 것이 언제나 사실 그대로는 아니다. 에포케(epoche’)를 사회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 기대하기란 무리지만 보이는 것으로도 훌륭한 은유가 되고 그것은 어떻게든 행동을 유발시키니 그만하면 충분하다. 사실이라고 알던 것을 믿고 따라가면 사실에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알던 ‘사실’과 엄청난 괴리를 가진 ‘사실’이 조우하게 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어차피 병원에 가는 길이었고, 가는 김에 소독을 했다. 간호사는 ‘썩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한다. 내 몸도 확인하지 않으면 곯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고 보이는 상처도 아프지 않은데 하물며 타자를 염두 하면 아찔하다. 당신들도 나처럼 병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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