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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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비가 추적거리는 게 몸이 한없이 늘어진다. 이런 날이면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다. 이따가 걷자며 곱살 진 마음을 달래는데 금세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앉는다. 한적한 길로만 여기던 곳도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번화가 못지않게 오가는 이들이 많아진다. 골목 끝을 돌자마자 헌책방이라는 녹색 간판이 섰다.
퍽 오래 전에는 버스를 타다 ‘헌책방’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면 무작정 내리곤 했다. 그렇게 들어선 곳은 먼지 쌓인 책들만 모로 즐비한 곳도 있는가 하면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들로 붐비는 곳도, 주인장은 책을 닦고 책 손 몇이 멀찍이 선 곳도 있었다.
이 녹색 간판의 책방은 어떨까 싶었다. 우산을 접어 문밖에 내려 둔다. 조금 빡빡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 냄새가 확 덮친다. 구석 백열등이 비추는 곳에 천장까지 빼곡히 누운 책들을 보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헌책방이 먼 데 있는 기억을 친다. 그때도 꼭 백열전구 아래 이런 냄새가 났다.
신촌 근방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사람들에게 치이는 곳보다 우산을 뱅뱅 돌려도 아무도 피해를 받지 않을 만큼 한산한 곳이 좋았다. 지금 홍대에서 신촌 방향의 길은 고작 서너 개 미술학원만 있을 뿐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 길 한쪽께 작은 헌책방이 있었고 학교가 파하면 늘 들르는 곳이었다.
한창 입시로 바쁠 때도 친구와 책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지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책을 뒤적이곤 했다. 세로로 쓰인 글을 따라가며 모르는 한자를 서로 묻고, 큰 소리로 떠들다 핀잔을 듣기도 했다. 책방 아저씨가 문을 닫는다고 말해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 읽은 책에 대해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통에 이바구가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해지나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파트너와 주로 ‘헌책방’에서 만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낡은 책 냄새는 상대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줬고, 좁은 공간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상대의 말을 터치해 가면서 잘 이어갈 줄 몰랐고, 어느 즘에 찾아온 정적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상대가 무슨 말이든 하길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런 내가 끊이지 않게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책’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읽은 책들 중 밑줄 그었던 부분을 기억해 책을 고르고 상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나만큼 그도 기뻐하고 그만큼의 감동으로 벅찰 것이라고 혼자만 믿곤 했다. 아주 나중에 그는 헌책방에서 만나는 게 달갑지 않으며, 책보다 하다못해 천 원짜리 핀이 더 감동적이라고 전했다.
헌책방을 순례하듯 다니던 시절, 인천의 한 헌책방의 주인장이 ‘헌책방이 뭐 같아요?’라고 물었다. 자주 들락거리며 낯이 익자 건 낸 말이지만 좀처럼 가늠할 수 없기도 했다. ‘멀리서 오는 거죠?’라고 되묻고는 ‘헌책방은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무대기 책을 산 날이면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책을 걸레로 닦고는 침대 옆에 두고 표지부터 찬찬히 살핀다. 저자 서문만 읽고 자자며 몇 장 들추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날을 지새운 날도 밤이 짧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낡은 책 한 귀퉁이에 이전 주인의 부스러질 것 같은 메모에 밑줄을 보탠 날은 그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 모든 ‘우연’이 주는 갈래를 헤매는 건, 흡사 시작과 끝이 닿아 끝나지 않는 산책과 같았다. 그 몽상의 시간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숨소리만 가빴을 것이다. 책 읽기가 뭔가 대단한 것을 머리에 꾸역꾸역 넣자는 게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허기진 마음이 채워지는 거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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