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민권을 넘어: ‘현존’이라는 분배의 근거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원과 복지는 여전히 임금노동이나 돌봄노동, 혹은 시민권을 기준으로 배분되지만, 전 지구적 불평등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기준은 더는 충분하지 않다. 구조적 대량 실업, 비공식 경제의 팽창, 비시민의 증가 속에서 ‘노동’과 ‘시민권’은 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넘어설 새로운 분배정치의 기반을 찾기 위해 퍼거슨은 남아프리카 연구와 수렵·채집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에 주목하며, 누군가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presence)’이라는 사실 자체가 몫을 요구할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오래된 인류학적 통찰을 다시 소환한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냥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이도 분배의 순간 그 자리에 있으면 몫을 주장할 수 있었듯이, 도시 빈민 지역에서도 ‘지금 함께 있음’은 일종의 사회적 의무를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 “누가 무엇을, 왜 가져야 하는가”(p.29)라는 고전적 정치 질문은 이제 노동이나 생산성보다 “우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p.56)라는 조건을 새롭게 포함해야만 한다.
퍼거슨은 기존 분배 개념이 포착하지 못하는 일상적 관계성에 주목하기 위해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제시한 “분배생계(distributive livelihoods)”(p.37) 개념을 다시 호출한다. 분배생계는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 지원 제도를 통해, 임금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빈곤선을 넘는 생계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여기서 생계는 더 이상 ‘일한 자에게 돌아가는 대가’가 아니라, 공동의 부에 대한 ‘정당한 몫’으로 재정의된다. 그러나 분배생계는 여전히 국가·시민권이라는 틀 안에서만 작동하기 쉽고, 제도가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근거로 도달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을 피할 수 없다. 퍼거슨에게 바로 이 지점을 넘어서는 보다 확실한 근거, “누구에게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말해줄 규범적·사회적 원리가 필요하고, 그가 제시하는 답이 곧 “현존(presence)”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그는 도시 기반시설(학교, 상하수도, 도로, 위생 시스템)이 이미 ‘현존’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도시에 사는 이들이 모두 학교와 위생 시설에 접근할 수 있어야 도시 전체의 안전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 함께 있음’은 이미 분배적 의무를 발생시키는 조건이며, 이는 시민–비시민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한다. 퍼거슨이 아프리카식 미니버스 택시 비유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미 꽉 찬 차량에 새로운 승객이 오르면 그 존재 자체가 불편과 귀찮음, 짜증에 가깝다(p.71). 그 요구는 상호성이나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함께 이 좁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며, 몸의 재조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통합된 유산과 분배의 ‘지분’
퍼거슨은 국가·국적·시민권이라는 전통적 정치 범주를 넘어, 지구에 함께 존재하는 인간 모두를 ‘우리’로 다시 상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라는 감각의 축을 확장하는 것”과 동시에 “‘여기’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는 감각을 확장해야 한다”(p.87)는 그의 말은 이 두 가지 축이 결합될 때 분배정치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퍼거슨은 표트르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전통을 소환하면서, 분배에 관한 보편적인 요구와 분배 정의의 기준은 노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적 성원권, 곧 “우리가 함께 만든 공동의 유산에 대한 상속자”라는 지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친다. 우리의 넘쳐나는 부는 특정 세대가 특별히 더 우월하거나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에 걸친 세대들의 노동과 희생, 발명으로 구축된 거대한 지구적 생산조직”의 결과이며(p.39),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착취와 폭력, 고통을 겪어왔다. 이 거대한 부를 생산하는 조직은 현재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기업의 주주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상상하고 고통받고 피 흘린 모두의 후손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것”이고, 생산체계 전체는 “통합된 유산”(p.39–40)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미비아 기본소득 보조금 논의에서 퍼거슨이 주목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모든 국민이 국가와 광물자원의 실질적 소유자이기에 국가 부에 대한 지분을 갖고, 매달 현금을 지급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 그리고 그 지급은 동정이 아니라 공동 소유자로서 “정당한 지분”을 돌려받는 행위라는 논리는 이 “통합된 유산” 개념의 구체적인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강력한 지분 논리 역시, 궁극적으로는 시민권이라는 경계에 기초한 집단 성원권에 의존하는 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이들을 배제하는 원리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퍼거슨은 다시 묻는다. “시민권에 따른 지분 이외에 무엇을 기반으로 분배의무를 설정해야 하는가? 즉 시민권으로는 정당한 지분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분을 의무화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p.42). 바로 이 질문에서 “지금 여기 함께 있음”이라는 현존의 정치학이 다시 등장한다. 동시에 이 질문은 분배정치에서 “무엇을 나눌 것인가, 사회적 자원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한다. 퍼거슨이 말하는 ‘통합된 유산’이 진정으로 사회 전체의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공공 인프라나 국가 자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 체제가 상층에 집중시킨 막대한 부까지 포함해야 한다. 오늘날 전 세계 상위 1%가 전체 부의 엄청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많은 보고들이 보여주듯, 자본주의는 이미 “공동의 유산”을 사적인 자산 포트폴리오 안으로 흡수해 버렸고, 하위 다수는 그 유산의 그림자만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배정치가 함께 있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남은 것을 나누는 기술로만 이해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상층에 집중시켜 놓은 부를 그대로 둔 채, 아래에서만 미세 조정하는 제로섬 게임에 머물 위험이 있다. 퍼거슨의 분배정치가 던지는 진짜 급진적인 질문은, “누구에게 나눌 것인가”뿐 아니라 “무엇을 나눌 것인가”를 다시 묻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적 자원은 이미 자본으로 전화된 과거 세대의 노동과 희생, 국가 인프라, 식민적 약탈과 환경 파괴의 산물까지를 포함하는 “확장된 공동 유산”이며, 그렇다면 분배정치는 그 유산이 집중된 자본주의 상층으로부터 부를 다시 거둬오는 문제—세금, 소유 구조, 토지와 자원의 재공유 등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라투르 비판과 비인간 행위자, 그리고 공존적 현존
퍼거슨은 라투르, 데리다, 아렌트, 버틀러 등 여러 이론가들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구분하려 한다. 그는 ‘현존(presence)’을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복지·인프라·도시정책 같은 제도적 언어 속에 자리 잡게 하는 데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학제 간 이론적 개입이나 사변적 논쟁에는 신중하게 거리를 두며, 자신의 개념이 오해되거나 불필요하게 확장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은 ‘현존’을 인간 중심의 제도 내부에 고정시키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급진적 확장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하나의 제한점이 될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은 ‘사회’를 배후에서 작동하는 실체나 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간·비인간 행위자들이 실제로 어떤 연결을 이루며 관계망을 형성하는지를 추적하는 데 초점을 둔다. 퍼거슨은 이러한 접근이 사회적 연대나 분배적 의무를 설명하는 언어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는 없다, 오직 연합만 있다”는 라투르적 태도는 퍼거슨의 시각에서 보면 “공동체적 의무를 정당화할 안정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그가 구축하려는 ‘현존 기반의 분배정치’와 충돌한다. 퍼거슨이 ANT를 위험한 이론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퍼거슨이 이해한 ANT의 모습에 근거한 것이다. 라투르는 사회적 의무를 부정하기 위해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무가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물질·기술·인간의 구체적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다시 추적하자고 제안한다. ANT는 도덕을 제거하는 이론이 아니라, 책임·의무·연대가 실제로 어떤 물질적·기술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한 방법론으로 읽을 수 있다. 퍼거슨이 라투르를 비판하는 이유는 분배정치의 작동 조건과 직접 맞닿아 있다. 그는 분배정치의 규범적 기반이 “지금 여기 함께 있음”이라는 인간적 현존에서 비롯되며, 이 현존이 사회적 책임감을 만들어 복지·안전·도시 인프라 같은 제도들이 작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감을 형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ANT는 이러한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고 인간·비인간의 연합만을 추적하므로, 퍼거슨에게는 규범적 의무를 뒷받침하는 공통 기반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지점에서 ANT가 “함께 있음이 의무를 낳는다”는 분배정치의 핵심 명제를 약화시키거나 무력화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퍼거슨의 ‘현존’ 개념은 더 넓게 확장될 가능성을 갖는다. 퍼거슨이 말하는 ‘주민(denizen)’은 이미 시민권의 경계를 넘어서는 존재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도시·환경·삶은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 속에서 구성되는 거대한 하이브리드 집합체다. 도시의 안전과 건강은 인간 주민뿐 아니라 하수관 속 미생물, 나무와 잡초, 토양과 물, 기후와 날씨 같은 비인간 요소들에 의존한다. 퍼거슨이 강조한 “세대를 거친 노동·희생·발명으로 구축된 지구적 생산체계” 역시 인간의 노동만이 아니라 광물·에너지·토양·해양과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의 물질적 동원과 파괴 위에서 성립한 체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기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는 퍼거슨의 현존 개념이 인간에게만 적용된다면, 그 설명력과 정치적 힘은 근본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크로포트킨이 『상호부조』에서 밝혔듯 협동과 상호부조는 인간 사회만의 것이 아니라 동물과 비인간 존재들의 세계에서도 나타나는 생존 방식이며, 해러웨이가 자연문화(natureculture)라고 말했듯 사회는 본래부터 인간/비인간의 혼종적 결사체다. 라투르가 말한 “집합체(collective)”는 퍼거슨이 인간 중심으로 제한한 현존 개념을 생태적·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denizen’은 인간뿐만 아니라 서직자, 거주자를 통칭해야 한다.
크로포트킨의 “공동의 유산과 지분”이라는 언어를 비인간 행위성의 관점에서 다시 보면, 그 유산의 수혜자는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적 생산체계 속에서 동원되고 피해를 입은 비인간 세계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때 분배정치는 인간 내부의 재분배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 자체가 만들어낸 비용·손실·파괴의 책임까지 포함하는 훨씬 더 넓은 정의의 문제로 재구성된다. 따라서 분배정치의 새로운 지평은 인간의 “함께 있음”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이미 속해 있었던 비인간적 동반자들과의 “공존적 현존”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퍼거슨의 작업은 이 지점에서 멈추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라투르의 집합체 개념과 해러웨이의 자연문화를 불러오는 보다 초학제적 접근을 통해 확장될 때, 비로소 오늘날의 생태적·도시적·지구적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분배정치로 재구성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