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 어슐러 르 귄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1986  (옮긴이 부깽 antimine@snu.ac.kr)

 

초기 인류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 온대와 열대 지역에서는, 그 종(種)의 주된 식량이 식물이었을 것이다. 구석기, 신석기, 그리고 선사 시대에 이 지역에서 인간이 먹은 것의 65~80%는 채집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오직 극지방의 북극권에서만 고기가 주식이었다. 매머드 사냥꾼들은 동굴 벽화와 우리의 상상 속을 화려하게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남고 배를 불리기 위해 했던 일은 씨앗, 뿌리, 새싹, 줄기, 잎, 견과, 열매, 과일, 곡식을 모으는 일이었다. 거기에 단백질을 늘리기 위해 벌레와 연체동물을 더하고, 그물이나 올가미로 새, 물고기, 쥐, 토끼, 그리고 다른 엄니 없는 잔챙이들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그리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농업이 발명된 이후 남의 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농민보다 훨씬 덜 일했고, 문명이 발명된 이후 임금 노동자보다도 훨씬 덜 일했다. 보통의 선사시대 사람은 일주일에 약 15시간 정도만 일해도 꽤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15시간만 생계를 위해 일한다면, 다른 일들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서, 아마도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아기도 없고, 만들거나 요리하거나 노래하는 솜씨도 없고, 생각할 만한 흥미로운 거리도 없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매머드 사냥을 나섰을 것이다. 솜씨 좋은 사냥꾼들은 고기 덩어리와 상아 더미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돌아왔고, 그리고 이야기를 가져왔다. 차이를 만든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이야기였다.

내가 들판에서 야생 귀리 낱알 하나를 껍질에서 씨름하듯 빼내고,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를 그렇게 빼냈다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란 어렵다. 그 사이 모기한테 물린 데를 긁었고, 울(Ool)이 웃긴 말을 했고, 우리는 개울가에 가서 물을 마시며 도롱뇽을 한참 구경했다가, 또 다른 귀리밭을 찾았다… 아니, 비교도 안 된다. 견줄 수조차 없다. 내가 거대한 털북숭이 짐승의 옆구리에 창을 깊숙이 꽂아 넣는 동안, 우브(Oob)는 거대한 상아에 꿰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피가 진홍빛 격류처럼 사방으로 솟구쳤으며, 매머드가 쓰러지면서 부브(Boob)를 짓눌러 곤죽으로 만들어버렸고, 나는 그 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을 꿰뚫어 뇌까지 관통하는 화살을 쏘았다는 이야기와는.

그 이야기에는 액션(Action)만 있는 게 아니다. 영웅(Hero)이 있다. 영웅은 강력하다. 어느새 들판에서 귀리를 줍는 남자와 여자, 그들의 아이들,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의 솜씨, 사색하는 이들의 생각, 노래하는 이들의 노래까지 모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영웅의 이야기 속에 징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훗날 『3 기니』로 완성될 책을 구상하던 시절, 자신의 공책에 ‘용어집(Glossary)’이라는 제목을 적어두었다.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용어집에서 heroism(영웅주의)은 ‘botulism(보툴리즘)'1으로, hero(영웅)는 ‘bottle(병)’로 정의되어 있었다. 영웅을 병으로 보는 것, 그것은 냉철한 재평가다.

이제 나는 제안한다. 병이야말로 영웅이다.

단순히 진이나 와인 병이 아니라, 더 오래된 의미에서의 용기, 곧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다.

담을 그릇이 없다면 음식은 빠져나가 버린다. 귀리처럼 싸우지도 않고 꾀도 부리지 않는 것조차도 말이다. 손에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배에 채워 넣는다. 배가 첫 번째 용기니까. 그러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어떨까. 추운 비가 내릴 때, 몇 줌의 귀리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작은 움(Oom)에게도 조금 주어 조용히 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배 한 번 채울 만큼과 한 줌 이상을 어떻게 집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비 속에서 눅눅한 귀리밭으로 가야 한다. 아기 우우(Oo Oo)를 넣어 두고 양손으로 귀리를 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잎사귀, 박 껍질, 그물, 주머니, 띠 천, 자루, 병, 냄비, 상자, 용기. 담는 것. 받는 것.

가장 처음의 문화적 도구는 아마도 담는 그릇이었을 것이다많은 이론가들은 가장 초기의 문화적 발명이란, 채집한 것을 담아 둘 용기와 그것을 나르는 끈이나 그물 같은 운반 도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피셔는 『여성의 창조』(McGraw-Hill, 1975)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 멋지고 크고 길고 단단한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영화에서 유인원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쳤던, 아마 뼈였던 그것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살인을 해냈다는 황홀감에 젖어 으르렁거리며 그것을 하늘로 던졌고, 회전하던 그것은 우주선으로 변하여 우주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세상을 수정시키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멋지고 아름다운 태아가 은하수 주위를 홀로 떠다닌다. 물론 남아이다. 이상하게도 자궁도 없고 어떤 모태도 없이 말이다.

모르겠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우리는 막대기와 창과 칼, 치고 찌르고 후려치는 그 긴 것들에 대해 충분히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담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담는 그릇,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위한 용기(容器).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래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니 분명 생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기보다 앞선 것이었을 것이다. 무기는 늦게 나타난, 사치스럽고 부차적인 도구다. 쓸모 있는 칼과 도끼보다도 오래되었고, 꼭 필요한 내리치기, 갈기, 파기 도구와 나란히, 아니 그보다 먼저였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감자를 캐냈는데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갈 그릇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에너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도구와 함께,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으로 가져오는 도구를 만들었다. 나한테는 말이 된다. 나는 피셔가 ‘운반 가방 이론’이라고 부르는 인간 진화 이론의 지지자다.

이 이론은 이론 속에 넓게 깔린 모호한 영역을 설명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론들로 가득한 영역을 피해 간다. (그 터무니없는 영역은 대개 호랑이와 여우, 그리고 다른 강한 영역성을 지닌 포유류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이론은 나를, 개인적으로, 인간 문화 안에 놓이게 해주었다. 그전에는 결코 그런 뿌리 내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문화가 길고 단단한 물건을 사용하여 찌르고, 내리치고, 죽이는 데서 비롯되고 그 위에 정교하게 구축된 것이라고 설명될 때, 나는 그 문화에 특별히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참여하고 싶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릴리언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문명의 결핍이라고 오해한 것은, 여성의 ‘문명에 대한 충성심’의 결핍이다.”) 그 이론가들이 말하던 사회, 문명은 분명 그들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완전한 인간. 내리치고, 찌르고, 쑤시고, 죽이는 인간. 나도 인간이 되고 싶어서, 나 역시 인간이라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조건이라면, 곧 무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죽이는 것이라면, 나는 인간으로서 심각하게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그렇지, 그들은 말했다. 네 정체는 여자다. 어쩌면 인간(human)조차 아닐지 모른다. 분명 결함이 있다. 이제 조용히 해라. 우리가 계속 ‘영웅으로서의 인간(Man)’상승사를 이야기할 테니.

그러시든가, 나는 말한다. 오트밭으로 걸어가면서. 슬링엔 아기 우우(Oo Oo)를 넣고, 작은 움(Oom)은 바구니를 들고 있다. 당신들은 계속 이야기하면 된다. 맘모스가 부브(Boob) 위로 쓰러졌던 이야기, 카인이 아벨을 쓰러뜨린 이야기,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이야기, 불타는 젤리가 마을 사람들 위로 떨어진 이야기, 미사일이 악의 제국에 떨어질 이야기, 그리고 ‘인간(Man)’ 상승의 다른 모든 단계들을.

만약 무언가를 담는 일이 인간적인 일이라면, 곧 그것이 유용해서든, 먹을 수 있어서든, 아름다워서든 원하는 것을 가방이나 바구니, 말아 올린 나무껍질이나 잎, 혹은 자기 머리카락으로 짠 그물이나 아무튼 무엇이든 간에 넣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 그리고 그 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더 큰 주머니나 가방, 곧 사람들을 담는 그릇인 셈인데, 그렇게 담아 온 것을 나중에 꺼내 먹거나 나누거나 더 단단한 그릇에 넣어 겨울을 위해 저장하거나 약주머니나 제단이나 박물관, 곧 신성한 것을 담는 장소에 넣어두고, 다음 날에도 아마 거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 만약 그것이 인간적인 일이고 그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인간인 것이다. 온전히, 자유롭게, 기꺼이. 그렇게 처음으로.
우선 분명히 해두자. 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싸움을 피하는 인간도 아니다. 나는 늙어가는, 화가 난 여자이고, 손에 든 핸드백을 세차게 휘두르며 불량배들을 쫓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나 다른 누구도 그런 일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들판에서 귀리를 계속 모으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빌어먹을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차이는 이야기가 만든다. 이야기가 내 인간성을 내게서 숨겼다. 맘모스 사냥꾼들이 들려준 그 이야기, 내리치고, 쑤시고, 강간하고, 살인하는 이야기. 영웅 이야기. 보툴리즘이라는 멋지고도 치명적인 이야기. 죽이는 이야기.2
때로는 그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더는 전해지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이 거친 귀리밭, 이 이방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몇몇은, 옛 이야기가 끝날 때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함께 끝장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긴박감을 안고,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와 말을 찾아 나선다.
그 이야기는 낯설다. 죽이는 이야기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지나친 말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온갖 말과 방식으로 삶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창조와 변형의 신화, 트릭스터 이야기, 민담, 농담, 소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인 이야기다. 물론 영웅은 자주 그것을 장악해왔다. 그게 그의 제국적 본성이자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장악하고 거느리며, 그것을 죽이려는 통제 불가능한 충동을 통제하기 위해 엄한 선언과 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자신의 대변자인 입법자들을 통해 이렇게 명령해왔다. 첫째, 이야기의 올바른 형식은 화살이나 창의 형식이어야 하며, 여기서 시작해 저기로 곧장 가서 퍽! 하고 목표를 맞히는 것이다(목표는 쓰러진다). 둘째, 소설을 포함한 모든 이야기의 중심 관심사는 갈등이어야 한다. 셋째, 그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소설의 자연스럽고 올바르고 알맞은 형식은 자루나 가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고,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약꾸러미와 같다. 그것은 어떤 것들을 서로, 그리고 우리와 강력하고도 고유한 관계 속에 담아두는 것이다.

소설 속 요소들 사이의 관계 중 하나가 갈등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갈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다. (나는 “이야기는 전투로 보아야 한다”고 쓰고, 전략과 공격, 승리 따위를 늘어놓는 글쓰기 지침서를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운반 가방/배/상자/집/약꾸러미로 생각해본다면, 그 안의 갈등, 경쟁, 긴장, 투쟁 등은 전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 자체는 갈등도, 조화도 아니다. 그 목적은 해결이나 정지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영웅은 이 가방 안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무대나 받침대, 혹은 정상에 서 있어야 한다. 그를 가방에 넣어두면 그는 토끼처럼, 감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SF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이 크고 무거운 자루를 들고 왔다. 내 운반 가방은 겁쟁이들과 덜렁이들, 겨자씨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알갱이들, 그리고 공들여 풀어보면 그 속에 파란 조약돌 하나와 다른 세계의 시간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작동하는 크로노미터 하나와 생쥐의 두개골이 들어 있는 정교하게 짜여 있는 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끝나지 않는 시작들, 입문들, 상실들, 변형과 번역들로 가득했고, 갈등보다 훨씬 많은 장난과 속임수, 함정과 망상보다 훨씬 적은 승리가 있었다. 멈춰버리는 우주선들, 실패하는 임무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가 야생 귀리 껍질을 벗겨내는 이야기가 독자를 사로잡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 쓰기가 쉽다고 누가 그랬는가?
만약 SF가 현대 기술의 신화라면, 그 신화는 비극적이다. ‘기술’ 또는 ‘현대 과학’(이 단어들이 흔히 쓰이듯, 검토되지 않은 약식 표현으로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과 첨단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은 영웅적 과업이다. 헤라클레스적이며 프로메테우스적이고, 승리로 구상된 것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된다. 이 신화를 구현하는 허구는 (인간이 지구, 우주, 외계 생명, 죽음, 미래 등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야기일 것이고, 또한 (과거든 현재든 종말과 홀로코스트를 그리는) 비극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술 영웅주의의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이라는-(살상의)-화살 같은 방식을 피하고 기술과 과학을 우선적으로 지배의 무기가 아니라 문화적 운반 가방으로 재정의한다면, 그 부수적 효과 중 하나는 SF를 훨씬 덜 경직되고 폭넓은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프로메테우스적일 필요도, 종말론적일 필요도 없으며, 사실 신화적 장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의 한 장르로 볼 수 있다.
이건 기묘한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도 기묘하니까.

제대로 이해된 SF는, 아무리 웃기더라도 모든 진지한 소설처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과 느끼는 감정, 그리고 사람들이 이 거대한 자루, 우주의 배, 될 것들의 자궁이자 지나간 것들의 무덤,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의 모든 것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묘사하려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인간(Man)을 그가 있어야 할 곳, 사물들의 질서 속 제자리 안에 두기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다. 들판에서 야생 귀리를 넉넉히 거두고 또 뿌릴 시간도 있고, 작은 움(Oom)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울(Ool)의 농담을 듣고, 도롱뇽을 지켜볼 시간도 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모아야 할 씨앗이 있고, 별들의 가방에는 여전히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끝>

  1. 식중독의 한 종류[]
  2. 죽이는 이야기(the killer story)는 ‘멋진 이야기’(죽인다!)와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닌다.[]
  1. 얼마 전에 출간된 <세상 끝에서 춤추다>(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에 ‘소설판 장바구니론’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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