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 양자물리학과 물질-의미의 얽힘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 (서문, 서론) – 캐런 바라드 (부깽 옮김)


서문과 감사의 글

이 책은 얽힘(entanglements)에 관한 것이다. 얽힘이란 단순히 독립된 개체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뒤엉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독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self-contained) 존재가 부재함을 의미한다. 존재는 개체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개체는 상호작용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얽힌 내재적 관계맺음(intra-relating) 속에서, 그리고 그 일부로서 창발(emergence)한다. 그러나 창발은 단 한 번으로 완결되는 사건이거나, 외부의 시공간적 기준에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은 물질과 의미처럼, 각각의 내재-작용(intra-action)1을 통해 비로소 생겨나며 반복적으로 재구성된다. 따라서 창조와 재생, 시작과 귀환, 연속과 불연속, 여기와 저기, 과거와 미래는 절대적 기준에서 더 이상 구분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감사의 글을 쓴다는 것, 곧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도운 이들과 그들의 기여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감사의 글은 저자의 기억 속에 보존된 장면들을 훑어 주요 순간과 인물을 골라 종이에 옮겨 적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기억은 개별적인 뇌의 주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 안에 새겨진 시공간-물질의 접힘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우주가 물질화(mattering)2하는 과정에서 접혀 발현되는 절합3이다. 기억은 결코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며, 완전히 지워지거나, 덧쓰이거나, 되찾아 소유할 수 있는, 마치 소유물처럼 주어지거나 빼앗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는 단순히 일련의 순간들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는 과거와 미래를 살려내고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기억하기와 다시-인식하기(re-cognizing)는 우리의 책임을 줄여주거나 덜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내재-작용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한 얽힘과 책임을 확장한다. 과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꾸러미나 스크랩북, 혹은 하나의 감사의 글처럼 깔끔히 포장되어 마무리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과거를 떠날 수 없으며, 과거 또한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감사의 글은 저자가 책을 쓰는 과정을 회상하며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전통을 따르지도, 또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는다. 이 책의 시작을 특정할 수 있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프로젝트를 이끈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개별적인 ‘나’나 여러 ‘나’들의 집단조차 그 공로를 오롯이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내가 이 책을 썼다기보다는 이 책이 나를 썼다고 해야 한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내재-작용적(intra-actively)으로 써낸 것이다. (여기서 ‘내재-작용적’이라고 한 것은 통상적인 ‘상호작용적’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글쓰기는 저자에서 페이지로 흘러가는 일방향적 창조 행위가 아니라, ‘책’과 ‘저자’가 반복적이고 상호구성적으로 서로를 만들어가고 다시 만들어가는 실행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 행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위성’ 자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개별적 주체 안에만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통념을 문제 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얽힘은 저자-책 같은 단순한 짝짓기로 설명될 수 있는 고립된 공동생산이 아니다. 친구들, 동료들, 학생들, 가족, 다양한 학문 제도와 전공 분야들, 동부와 서부 해안의 숲과 시냇물과 바닷가, 이른 아침 시간의 경이로울 만큼 고요하고 선명한 평화, 그리고 그 외 수많은 것들이 이 ‘책’과 그 ‘저자’를 함께 구성해 온 일부였다.

나는 어머니가 이 글을 읽고 또다시 내가 일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는 내가 또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며,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요점만 말하고, 그동안 도움 준 이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감사를 전했을 거라고 할 것이다. 한편으로 어머니 말이 옳기도 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감사(recognition)를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 존재 깊은 곳에 뿌리내린 정의에 대한 열렬한 갈망, 어머니에게서 물려받고 적극적으로 길러주신 바로 그 열정과 갈망 때문에, 단순히 해야 할 말을, 마치 자명한 일인 양 해버리고 끝낼 수 없는 것이다. 정의란 승인과 인정(recognition) 그리고 사랑 어린 관심을 수반하지만, 한 번으로 영원히 성취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해답은 없다. 오직 각각의 만남, 각각의 내재-작용에 열려 있고 살아 있으려는 지속적인 실천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 곧 우리의 책임(responsibility)4을 사용하여 일깨우고, 정의롭게 살아갈 새로운 가능성들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세계와 그것의 생성(becoming) 가능성은 매 만남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존재가 되는가(who and what come to matter)’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음으로 번성하는 듯 보이는 이 세계에서, 정의의 가능성을 살아 있게 하는 만남의 실천에 무엇이 수반되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은 존재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을 포함해 각 존재의 고통에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 과거를 끝난 것으로 미래를 우리의 것이 아니거나 오직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을 어떻게 교란할 수 있을까? 물질화의 문제, 그리고 물질·공간·시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과 관심은 비의적(esoteric) 사색으로 이루어진 사치가 아니다. 물질화와 그것이 지닌 정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우주가 생성되는 과정 속에 내재된 본질적 부분이다. 정의롭게 살라는 초대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물질 속에 새겨져 있다. 그 초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물질의 본성에 관한 물음이자 동시에 응답과 책임의 본성에 관한 물음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넘어서는 더 큰 열망이며 이 작업을 추동하는 힘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필연적으로 우리 서로의 연결과 책임, 곧 얽힘(entanglements)에 관한 것이다.

나는 수많은 탁월한 존재들(beings)과 얽힐 수 있었던 헤아릴 수 없는 큰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나를 지탱하고 길러 주었으며 우정, 친절, 온정, 유머, 사랑, 격려, 영감, 인내, 지적 교류의 기쁨, 귀중한 피드백, 도전의 자극, 세부에 대한 세심함, 사유에 대한 사랑을 선물해 주었다. 나의 감사는 종이 몇 장에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존재들을 향해 있다. 단순한 나열로는 이러한 얽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이 감사의 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해 실망할 누군가(과거든 미래든, 내가 아는 사람이든 혹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고 변화하는 현상 안에, 손에 쥘 수 있는 단순한 사물(object)이 아니라 마땅히 ‘책’이라 부를 만한 것 안에 이미 새겨져 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나드 칼리지(Barnard College), 포모나 칼리지(Pomona College), 럿거스 대학교(Rutgers University),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Mount Holyoke College), 그리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의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새롭게 개척된 영역의 초기 탐사에 함께해 준 엘리자베스(제이) 프리드먼과 템마 카플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누가 알았겠는가? 바나드 칼리지에 독특한 전통의 물리학 연구실을 설립한 물리학자 사무엘 데본스(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는 의도치 않게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연구실에서 가르치고, 실험을 준비하며, 웅장한 오래된 장비들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나는 실험 장치들의 물질성(physicality)과 그 안에 깃든 사상에 대한 감각을 서서히 길러 나가기 시작했다. (이론)물리학에 대한 정규 교육 어디에서도 그런 감각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닐스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대한 지속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연구가 이 보어 특유의 통찰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준비시켜 준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지는 가장 큰 빚 중 일부는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이들에게 돌아간다(적어도 그러한 절대적 차이를 외부적 척도로 상정하는 불충분한 개념에 따른다면 말이다). 비록 우리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수년간 가장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닐스 보어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불찰일 것이다.

나는 이 여정에서 친구들과 동료들로부터 격려와 지적이고 영적인 자양분이라는 선물을 받아온, 더없는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앨리스 아담스, 베티나 앱테커, 마리오 비아졸리,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 로레인 코드, 조반나 디 치로, 카밀라 펑크 엘레하베, 릴라 페르난데스, 낸시 플램, 마이클 플라워, 알리시아 가스파르 데 알바, 루스 윌슨 길모어, B.J. 골드버그, 디나 곤살레스, 앨리스 풀턴, 제이컵 헤일, 샌드라 하딩, 에밀리 호니그, 수 하친스, 데이비드 호이, 조슬린 호이, 마릴린 아이비, 이블린 폭스 켈러, 로리 클라인, 마틴 크리거, 제이 라딘, 마크 랜스, 린 르로즈, 재너 레빈, 로라 리우, 니나 뤼케, 폴라 마커스, 린다 마르틴 알코프, 린 핸킨슨 넬슨, 루팔 오자, 프란시스 폴, 엘리자베스 포터, 라비 라잔, 제니 리어던, 아이린 레티, 진 로젠, 수 로서, 폴 로스, 제니퍼 리센가, 조앤 세퍼스탄, 빅터 실버먼, 카리다드 수자, 바누 수브라마니암, 루시 서크먼, 캐리스 톰슨, 샤론 트라위크, 실라 와인버그, 바버라 휘튼, 엘리자베스 윌슨, 앨리슨 와일리.

나는 여러 장(章)의 초고를 기꺼이 읽고 귀중한 피드백을 건네준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특히 큰 빚을 졌다. 그들 가운데는 프레데리크 아펠-마글린, 허브 번스타인, 에이미 버그(Amy Bug), 존 클레이턴, 도나 해러웨이, 조셉 라우스(Joseph Rouse), 그리고 아서 자이언스(Arthur Zajonc)가 있다. 특히 조셉 라우스는 원고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 있게 읽으며,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피드백을 보내주었다. 그의 관대함에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나의 대학원 세미나 “페미니즘과 과학 연구”에서 함께했던 스카우트 칼버트, 크레시다 리몬 제이콥 메트칼프, 아스트리드 슈라더, 헤더 앤 스완슨, 메리 위버에게도 특별히 감사드린다. 그들은 책 원고의 여러 측면에 대해 영감을 불어넣는 활기찬 토론을 나누어 주었고, 내가 산타크루즈에 도착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조셉 라우스와 도나 해러웨이에게 특히 깊이 감사한다. 그들의 저작이 내게 영감을 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내재-작용하며 특별한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우정과 아낌없는 지원, 격려, 그리고 통찰력 있고 유익한 피드백을 베풀어 주었다. 이 소중한 친구들은 내 사유와 집필 장치(apparatus)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었으며, 그들의 기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친구 비키 커비(Vicki Kirby)와의 전율적인 대화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았다. 프레데리크 아펠-마글린은 내 작업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과 확고한 믿음으로, 글쓰기와 내려놓기,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라는 어려운 얽힘의 과정 속에서 나를 지탱해 주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던 놀라운 회절 무늬5 앞에서 지금도 경외심을 느낀다. 끝으로 내 반려견 로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는 밤낮으로 해가 바뀌어도 내 곁을 지키며 따뜻함과 사랑을 듬뿍 주었고, 컴퓨터 앞에서 원고를 써 내려가는 동안 나를 산책으로 이끌어 꼭 필요한 숨 고르기를 하게 해 주었다. 그의 복슬복슬한 몸은 이 책의 집필 여정을 거의 함께 완주했다.

나의 부모님, 해럴드 바라드와 에디스 바라드께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드린다. 그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나를 믿어 주셨다. 모든 사람 안의 선함을 믿고, 누구에게서나 가장 좋은 면을 끝까지 보려 하셨던 어머니의 흔들림 없는 신념은 이 세상에서 드문 것이며, 내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아버지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는 내가 동네의 어떤 남자아이보다도 더 멀리 야구공을 던지고, 더 정확히 농구공을 골대에 넣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함께 공을 주고받던 시간들은 내 삶의 근원적인 페미니즘적 순간들이 되었고, 그 속에서 배운 놀랍도록 유용한 교훈과 기술들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측정’과 ‘가치’의 본질에 관한 생애 최초의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노동계급의 가치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진심으로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 가치들은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직업, 업적, 학력, 재산, 혹은 세속적 경험으로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로앤 윌슨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녀는 이 책을 쓰는 내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었다. 따뜻한 식사와 함께 있음, 사랑, 공동 육아에서의 유연함, 한결같은 지지, 그리고 꼭 필요한 순간에 건네준 한 잔의 핫초콜릿까지, 그녀가 베풀어 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어떤 “고맙다”는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다.

나의 딸 미카엘라는 여러 면에서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매일 세상을 열려 있고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방식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 배움 속에서 줄지 않는 순수한 기쁨, 다른 존재들을 향한 끝없는 돌봄, 그리고 삶에 대한 다정한 주의기울임, 세상의 가장 섬세한 결까지 포착해 그것을 시와 그림, 조각, 이야기, 춤, 노래로 다시 빚어내는 그 감각.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기억할 만한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이 책을 그녀에게 바친다.

  1. 이는 캐런 바라드 행위적 실재론의 핵심 개념으로, 종종 ‘인트라액션’으로 음차되거나 ‘내부-작용’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상호-작용(inter-action)’이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를 전제한다면, ‘내재-작용(intra-action)’은 관계가 개체보다 선행하며 개체를 구성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내재(內在)’는 ‘내부(內部)’와 구별된다. ‘내부’가 경계로 구획된 공간을 가리킨다면, ‘내재’는 존재가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성립함을 뜻한다. 즉, 행위성은 상호작용 이전에 선행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작용 속에서 함께 드러난다. 따라서 ‘내재-작용’이라는 번역은 실체보다 관계를 우선하는 바라드의 존재론적 전환을 드러낸다. 반면 ‘내부-작용’은 이미 정해진 실체와 경계를 전제하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이하 본문에서의 모든 ‘intra-action’은 이러한 이유로 ‘내재-작용’으로 옮긴다.[]
  2. mattering은 단순한 ‘물질화(materialization)’가 아니라, 물질과 의미가 얽혀 함께 생성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는 matter가 명사로서 ‘물질’과 동사로서 ‘중요하다’라는 이중 의미를 동시에 불러내려는 선택이다. 이지선(2022)은 이를 “물의 빚기”로 번역하면서, 바라드의 개념이 물질성과 의미의 얽힘(entanglement)을 강조하는 전략임을 지적한다. 본문에서는 ‘물질화’로 번역하되, 이 개념에는 이미 ‘의미화’의 차원이 내재해 있으므로 ‘물질-의미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지선,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주의에서 물질과 실재」, 『한국여성철학』 제38권 (2022): pp. 140-144. 참고.[]
  3. articulation(절합)은 서로 다른 요소들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배치되고 형성되며 드러나는 과정을 가리킨다.[]
  4.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과 직접 대응한다. 바라드는 이를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응답하는 능력으로 재해석한다. 따라서 ‘책임’에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도나 해러웨이의 작업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해러웨이는 『종과 종이 만날 때(When Species Meet, 2008)』 p. 71에서 “응답은 응답-능력(response-ability), 곧 책임(responsibility)과 함께 성장한다”고 말한다. 해러웨이에게 책임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세계 속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관계적 역량이다. “실험실의 노동자로서의 동물들, 그리고 그들 세계 속의 모든 동물들은 사람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응답-가능(response-able)’하다.” 즉, 책임이란 ‘내재-작용’ 속에서 정교하게 짜여지는 관계이며, 그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함께 생성된다. 해러웨이는 또한 응답의 능력(the capacity to respond)이 모든 당사자에게 대칭적이거나 동일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응답은 자기-유사성의 관계에서는 출현할 수 없으며, 차이와 비대칭 속에서만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응답-능력’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주목하고 반응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애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의 ‘알아차림의 기술(arts of noticing)’, 톰 반 두렌(Thom van Dooren)의 ‘주의기울임의 기술(arts of attentiveness)’과도 맞닿아 있다. 세 접근 모두 세계와의 윤리적 관계를 수동적인 규범의 준수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실천 능력의 문제로 재정의한다는 공통된 철학적 기반 위에 서 있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현남숙, 「인류세의 위기와 다종 간 지식의 요청」(2025)을 참고하라.[]
  5. 문맥에 따라 ‘diffraction patterns’를 ‘회절 패턴’ 또는 ‘회절 무늬’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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