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 양자물리학과 물질-의미의 얽힘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 (서문, 서론) – 캐런 바라드 (부깽 옮김)


서문과 감사의 글

이 책은 얽힘(entanglements)에 관한 것이다. 얽힘이란 단순히 독립된 개체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뒤엉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독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self-contained) 존재가 부재함을 의미한다. 존재는 개체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개체는 상호작용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얽힌 내재적 관계맺음(intra-relating) 속에서, 그리고 그 일부로서 창발(emergence)한다. 그러나 창발은 단 한 번으로 완결되는 사건이거나, 외부의 시공간적 기준에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은 물질과 의미처럼, 각각의 내재-작용(intra-action)((이는 캐런 바라드 행위적 실재론의 핵심 개념으로, 종종 ‘인트라액션’으로 음차되거나 ‘내부-작용’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상호-작용(inter-action)’이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를 전제한다면, ‘내재-작용(intra-action)’은 관계가 개체보다 선행하며 개체를 구성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내재(內在)’는 ‘내부(內部)’와 구별된다. ‘내부’가 경계로 구획된 공간을 가리킨다면, ‘내재’는 존재가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성립함을 뜻한다. 즉, 행위성은 상호작용 이전에 선행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작용 속에서 함께 드러난다. 따라서 ‘내재-작용’이라는 번역은 실체보다 관계를 우선하는 바라드의 존재론적 전환을 드러낸다. 반면 ‘내부-작용’은 이미 정해진 실체와 경계를 전제하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이하 본문에서의 모든 ‘intra-action’은 이러한 이유로 ‘내재-작용’으로 옮긴다.))을 통해 비로소 생겨나며 반복적으로 재구성된다. 따라서 창조와 재생, 시작과 귀환, 연속과 불연속, 여기와 저기, 과거와 미래는 절대적 기준에서 더 이상 구분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감사의 글을 쓴다는 것, 곧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도운 이들과 그들의 기여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감사의 글은 저자의 기억 속에 보존된 장면들을 훑어 주요 순간과 인물을 골라 종이에 옮겨 적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기억은 개별적인 뇌의 주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 안에 새겨진 시공간-물질의 접힘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우주가 물질화(mattering)((mattering은 단순한 ‘물질화(materialization)’가 아니라, 물질과 의미가 얽혀 함께 생성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는 matter가 명사로서 ‘물질’과 동사로서 ‘중요하다’라는 이중 의미를 동시에 불러내려는 선택이다. 이지선(2022)은 이를 “물의 빚기”로 번역하면서, 바라드의 개념이 물질성과 의미의 얽힘(entanglement)을 강조하는 전략임을 지적한다. 본문에서는 ‘물질화’로 번역하되, 이 개념에는 이미 ‘의미화’의 차원이 내재해 있으므로 ‘물질-의미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지선,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주의에서 물질과 실재」, 『한국여성철학』 제38권 (2022): pp. 140-144. 참고.))하는 과정에서 접혀 발현되는 절합((articulation(절합)은 서로 다른 요소들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배치되고 형성되며 드러나는 과정을 가리킨다.))이다. 기억은 결코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며, 완전히 지워지거나, 덧쓰이거나, 되찾아 소유할 수 있는, 마치 소유물처럼 주어지거나 빼앗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는 단순히 일련의 순간들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는 과거와 미래를 살려내고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기억하기와 다시-인식하기(re-cognizing)는 우리의 책임을 줄여주거나 덜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내재-작용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한 얽힘과 책임을 확장한다. 과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꾸러미나 스크랩북, 혹은 하나의 감사의 글처럼 깔끔히 포장되어 마무리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과거를 떠날 수 없으며, 과거 또한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감사의 글은 저자가 책을 쓰는 과정을 회상하며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전통을 따르지도, 또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는다. 이 책의 시작을 특정할 수 있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프로젝트를 이끈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개별적인 ‘나’나 여러 ‘나’들의 집단조차 그 공로를 오롯이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내가 이 책을 썼다기보다는 이 책이 나를 썼다고 해야 한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내재-작용적(intra-actively)으로 써낸 것이다. (여기서 ‘내재-작용적’이라고 한 것은 통상적인 ‘상호작용적’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글쓰기는 저자에서 페이지로 흘러가는 일방향적 창조 행위가 아니라, ‘책’과 ‘저자’가 반복적이고 상호구성적으로 서로를 만들어가고 다시 만들어가는 실행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 행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위성’ 자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개별적 주체 안에만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통념을 문제 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얽힘은 저자-책 같은 단순한 짝짓기로 설명될 수 있는 고립된 공동생산이 아니다. 친구들, 동료들, 학생들, 가족, 다양한 학문 제도와 전공 분야들, 동부와 서부 해안의 숲과 시냇물과 바닷가, 이른 아침 시간의 경이로울 만큼 고요하고 선명한 평화, 그리고 그 외 수많은 것들이 이 ‘책’과 그 ‘저자’를 함께 구성해 온 일부였다.

나는 어머니가 이 글을 읽고 또다시 내가 일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는 내가 또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며,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요점만 말하고, 그동안 도움 준 이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감사를 전했을 거라고 할 것이다. 한편으로 어머니 말이 옳기도 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감사(recognition)를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 존재 깊은 곳에 뿌리내린 정의에 대한 열렬한 갈망, 어머니에게서 물려받고 적극적으로 길러주신 바로 그 열정과 갈망 때문에, 단순히 해야 할 말을, 마치 자명한 일인 양 해버리고 끝낼 수 없는 것이다. 정의란 승인과 인정(recognition) 그리고 사랑 어린 관심을 수반하지만, 한 번으로 영원히 성취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해답은 없다. 오직 각각의 만남, 각각의 내재-작용에 열려 있고 살아 있으려는 지속적인 실천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 곧 우리의 책임(responsibility)((‘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과 직접 대응한다. 바라드는 이를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응답하는 능력으로 재해석한다. 따라서 ‘책임’에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도나 해러웨이의 작업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해러웨이는 『종과 종이 만날 때(When Species Meet, 2008)』 p. 71에서 “응답은 응답-능력(response-ability), 곧 책임(responsibility)과 함께 성장한다”고 말한다. 해러웨이에게 책임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세계 속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관계적 역량이다. “실험실의 노동자로서의 동물들, 그리고 그들 세계 속의 모든 동물들은 사람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응답-가능(response-able)’하다.” 즉, 책임이란 ‘내재-작용’ 속에서 정교하게 짜여지는 관계이며, 그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함께 생성된다. 해러웨이는 또한 응답의 능력(the capacity to respond)이 모든 당사자에게 대칭적이거나 동일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응답은 자기-유사성의 관계에서는 출현할 수 없으며, 차이와 비대칭 속에서만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응답-능력’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주목하고 반응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애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의 ‘알아차림의 기술(arts of noticing)’, 톰 반 두렌(Thom van Dooren)의 ‘주의기울임의 기술(arts of attentiveness)’과도 맞닿아 있다. 세 접근 모두 세계와의 윤리적 관계를 수동적인 규범의 준수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실천 능력의 문제로 재정의한다는 공통된 철학적 기반 위에 서 있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현남숙, 「인류세의 위기와 다종 간 지식의 요청」(2025)을 참고하라.))을 사용하여 일깨우고, 정의롭게 살아갈 새로운 가능성들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세계와 그것의 생성(becoming) 가능성은 매 만남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존재가 되는가(who and what come to matter)’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음으로 번성하는 듯 보이는 이 세계에서, 정의의 가능성을 살아 있게 하는 만남의 실천에 무엇이 수반되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은 존재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을 포함해 각 존재의 고통에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 과거를 끝난 것으로 미래를 우리의 것이 아니거나 오직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을 어떻게 교란할 수 있을까? 물질화의 문제, 그리고 물질·공간·시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과 관심은 비의적(esoteric) 사색으로 이루어진 사치가 아니다. 물질화와 그것이 지닌 정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우주가 생성되는 과정 속에 내재된 본질적 부분이다. 정의롭게 살라는 초대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물질 속에 새겨져 있다. 그 초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물질의 본성에 관한 물음이자 동시에 응답과 책임의 본성에 관한 물음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넘어서는 더 큰 열망이며 이 작업을 추동하는 힘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필연적으로 우리 서로의 연결과 책임, 곧 얽힘(entanglements)에 관한 것이다.

나는 수많은 탁월한 존재들(beings)과 얽힐 수 있었던 헤아릴 수 없는 큰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나를 지탱하고 길러 주었으며 우정, 친절, 온정, 유머, 사랑, 격려, 영감, 인내, 지적 교류의 기쁨, 귀중한 피드백, 도전의 자극, 세부에 대한 세심함, 사유에 대한 사랑을 선물해 주었다. 나의 감사는 종이 몇 장에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존재들을 향해 있다. 단순한 나열로는 이러한 얽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이 감사의 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해 실망할 누군가(과거든 미래든, 내가 아는 사람이든 혹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고 변화하는 현상 안에, 손에 쥘 수 있는 단순한 사물(object)이 아니라 마땅히 ‘책’이라 부를 만한 것 안에 이미 새겨져 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나드 칼리지(Barnard College), 포모나 칼리지(Pomona College), 럿거스 대학교(Rutgers University),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Mount Holyoke College), 그리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의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새롭게 개척된 영역의 초기 탐사에 함께해 준 엘리자베스(제이) 프리드먼과 템마 카플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누가 알았겠는가? 바나드 칼리지에 독특한 전통의 물리학 연구실을 설립한 물리학자 사무엘 데본스(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는 의도치 않게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연구실에서 가르치고, 실험을 준비하며, 웅장한 오래된 장비들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나는 실험 장치들의 물질성(physicality)과 그 안에 깃든 사상에 대한 감각을 서서히 길러 나가기 시작했다. (이론)물리학에 대한 정규 교육 어디에서도 그런 감각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닐스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대한 지속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연구가 이 보어 특유의 통찰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준비시켜 준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지는 가장 큰 빚 중 일부는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이들에게 돌아간다(적어도 그러한 절대적 차이를 외부적 척도로 상정하는 불충분한 개념에 따른다면 말이다). 비록 우리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수년간 가장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닐스 보어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불찰일 것이다.

나는 이 여정에서 친구들과 동료들로부터 격려와 지적이고 영적인 자양분이라는 선물을 받아온, 더없는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앨리스 아담스, 베티나 앱테커, 마리오 비아졸리,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 로레인 코드, 조반나 디 치로, 카밀라 펑크 엘레하베, 릴라 페르난데스, 낸시 플램, 마이클 플라워, 알리시아 가스파르 데 알바, 루스 윌슨 길모어, B.J. 골드버그, 디나 곤살레스, 앨리스 풀턴, 제이컵 헤일, 샌드라 하딩, 에밀리 호니그, 수 하친스, 데이비드 호이, 조슬린 호이, 마릴린 아이비, 이블린 폭스 켈러, 로리 클라인, 마틴 크리거, 제이 라딘, 마크 랜스, 린 르로즈, 재너 레빈, 로라 리우, 니나 뤼케, 폴라 마커스, 린다 마르틴 알코프, 린 핸킨슨 넬슨, 루팔 오자, 프란시스 폴, 엘리자베스 포터, 라비 라잔, 제니 리어던, 아이린 레티, 진 로젠, 수 로서, 폴 로스, 제니퍼 리센가, 조앤 세퍼스탄, 빅터 실버먼, 카리다드 수자, 바누 수브라마니암, 루시 서크먼, 캐리스 톰슨, 샤론 트라위크, 실라 와인버그, 바버라 휘튼, 엘리자베스 윌슨, 앨리슨 와일리.

나는 여러 장(章)의 초고를 기꺼이 읽고 귀중한 피드백을 건네준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특히 큰 빚을 졌다. 그들 가운데는 프레데리크 아펠-마글린, 허브 번스타인, 에이미 버그(Amy Bug), 존 클레이턴, 도나 해러웨이, 조셉 라우스(Joseph Rouse), 그리고 아서 자이언스(Arthur Zajonc)가 있다. 특히 조셉 라우스는 원고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 있게 읽으며,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피드백을 보내주었다. 그의 관대함에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나의 대학원 세미나 “페미니즘과 과학 연구”에서 함께했던 스카우트 칼버트, 크레시다 리몬 제이콥 메트칼프, 아스트리드 슈라더, 헤더 앤 스완슨, 메리 위버에게도 특별히 감사드린다. 그들은 책 원고의 여러 측면에 대해 영감을 불어넣는 활기찬 토론을 나누어 주었고, 내가 산타크루즈에 도착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조셉 라우스와 도나 해러웨이에게 특히 깊이 감사한다. 그들의 저작이 내게 영감을 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내재-작용하며 특별한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우정과 아낌없는 지원, 격려, 그리고 통찰력 있고 유익한 피드백을 베풀어 주었다. 이 소중한 친구들은 내 사유와 집필 장치(apparatus)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었으며, 그들의 기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친구 비키 커비(Vicki Kirby)와의 전율적인 대화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았다. 프레데리크 아펠-마글린은 내 작업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과 확고한 믿음으로, 글쓰기와 내려놓기,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라는 어려운 얽힘의 과정 속에서 나를 지탱해 주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던 놀라운 회절 무늬((문맥에 따라 ‘diffraction patterns’를 ‘회절 패턴’ 또는 ‘회절 무늬’로 옮긴다.)) 앞에서 지금도 경외심을 느낀다. 끝으로 내 반려견 로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는 밤낮으로 해가 바뀌어도 내 곁을 지키며 따뜻함과 사랑을 듬뿍 주었고, 컴퓨터 앞에서 원고를 써 내려가는 동안 나를 산책으로 이끌어 꼭 필요한 숨 고르기를 하게 해 주었다. 그의 복슬복슬한 몸은 이 책의 집필 여정을 거의 함께 완주했다.

나의 부모님, 해럴드 바라드와 에디스 바라드께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드린다. 그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나를 믿어 주셨다. 모든 사람 안의 선함을 믿고, 누구에게서나 가장 좋은 면을 끝까지 보려 하셨던 어머니의 흔들림 없는 신념은 이 세상에서 드문 것이며, 내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아버지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는 내가 동네의 어떤 남자아이보다도 더 멀리 야구공을 던지고, 더 정확히 농구공을 골대에 넣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함께 공을 주고받던 시간들은 내 삶의 근원적인 페미니즘적 순간들이 되었고, 그 속에서 배운 놀랍도록 유용한 교훈과 기술들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측정’과 ‘가치’의 본질에 관한 생애 최초의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노동계급의 가치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진심으로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 가치들은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직업, 업적, 학력, 재산, 혹은 세속적 경험으로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로앤 윌슨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녀는 이 책을 쓰는 내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었다. 따뜻한 식사와 함께 있음, 사랑, 공동 육아에서의 유연함, 한결같은 지지, 그리고 꼭 필요한 순간에 건네준 한 잔의 핫초콜릿까지, 그녀가 베풀어 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어떤 “고맙다”는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다.

나의 딸 미카엘라는 여러 면에서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매일 세상을 열려 있고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방식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 배움 속에서 줄지 않는 순수한 기쁨, 다른 존재들을 향한 끝없는 돌봄, 그리고 삶에 대한 다정한 주의기울임, 세상의 가장 섬세한 결까지 포착해 그것을 시와 그림, 조각, 이야기, 춤, 노래로 다시 빚어내는 그 감각.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기억할 만한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이 책을 그녀에게 바친다.

함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위한 운반 가방 / 도나 해러웨이

도나 해러웨이의 <Receiving Three Mochilas in Colombia Carrier Bags for Staying with the Trouble Together>, 2019 를 옮긴 겁니다.  어슐러 k. 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을 인용하는 부분들은 이전 번역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콜롬비아에서 세 개의 모칠라를 받기
함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위한 운반 가방
Receiving Three Mochilas in Colombia
Carrier Bags for Staying with the Trouble Together
Donna Haraway 도나 해러웨이 (부깽 옮김)

어슐러 K. 르 귄을 기리며

어슐러 K. 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은 1980년대 후반 처음 읽었을 때 내 핵심을 건드렸고((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은 진화론 속 서사에 대한 내 사유와, 『영장류의 시각: 현대 과학 세계의 젠더, 인종, 자연(Primate Visions: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dern Science)』(뉴욕: 라우틀리지, 1989)에서 영장류 행동 연구의 역사 속 ‘여성 채집자’라는 형상을 사유하는 방식을 형성했다. 르 귄은 인간 진화의 운반 가방 이론을 엘리자베스 피셔에게서 배웠다. 그 시기는 1970~1980년대, 페미니즘 이론 속에서 크고 대담하며 사변적이고 세계적인 이야기들이 타오르던 때였다(엘리자베스 피셔, 『여성의 창조(Women’s Creation)』, 뉴욕: 맥그로힐, 1975).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처럼,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또한 SF적 실천이었다. 이 글에 인용된 르 귄의 문장들은 모두 Ursula K. Le Guin,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런던: Ignota, 2019에서 가져왔다.)), 오늘날에도 거대한 위험의 시대를 함께 나아가기 위해 삶의 이야기들을 매듭짓는 과정 속에서 여전히 나를 풀어헤치고 다시 엮는다. 2019년 8월, 나는 보고타, 부카라망가, 산타마르타에서의 강도 높은 2주간의 현장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류학, 과학기술학, 예술, 환경인문학 분야의 동료이자 친구들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그들의 작업에 참여시켰다. 그들의 작업은 다음을 위한, 그리고 다음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땅과 물의 보호와 회복, 토착민 공동체의 번영, 도시 거리 사람들을 위한 비폭력적 공간 만들기, 작물 파괴와 마약 전쟁, 개발 사업으로 삶이 무너진 농민들에 대한 보상, 아프로-콜롬비아인들의 삶과 문화를 지지하는 일, 깊고 넓은 자연적·사회적 정의와 돌봄의 실천. 이토록 겹겹이 쌓인 복잡성과 되살아나는 고통의 땅에서 내 친구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밀한 평화와 공적인 평화를 꿰매고, 매듭짓고, 짜고, 수놓으며 일하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다시금 풀려나가더라도 말이다. 콜롬비아의 내 친구들은 뼛속 깊이 알고 있다. 르 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일의 중요성을.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하는 일을.

우리가 다른 이야기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다른 개념들을 사유하기 위해 어떤 개념들을 사유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로보로스가 다시금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용의 시간(dragon time) 속에서 세계 짓기(worlding)가 스스로 이어가는 방식이다. 용의 용감한 제자였던 르 귄의 이야기들은 살아 있는 것들의 재료를 모으고, 나르고, 이야기하기 위한 넉넉한 가방이다. “잎사귀, 박 껍질, 그물, 주머니, 띠 천, 자루, 병, 냄비, 상자, 용기. 담는 것. 받는 것.”

그런 상호적인 이야기들을 건네며, 나의 동료들은 나에게 세 개의 아주 다른 담는 가방, 세 개의 모칠라(mochila)를 주었다. 그것들은 ‘다르게 살아가고 죽어가기’의 지속적인 과정을 위해 서로 함께-되기(becoming-with)를 길러내는 데 필요한 특별하고 강력한 것들을 모으기 위한 가방들이다. 이 가방들이 모으는 이야기들은 죽이는 이야기들(the killing stories)(([옮긴이] 죽이는 이야기(the killer story)는 ‘멋진 이야기’(죽인다!)와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닌다.)), 생명을 빨아먹는 무기화된 과학과 기술, 마약과 돈에 흠뻑 젖은 흡혈 시장들, 그리고 역사를 자기 형상대로 빚어내려 애쓰는 모든 찌르는 이야기(prick tales)(([옮긴이] “prick tales”은 어슐러 K. 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에서 “막대기와 창, 칼, 즉 치고 찌르고 후려치는 긴 것들”로 은유된 남성적 영웅 서사를 비틀며 등장한 표현이다. prick은 속어로 남성 성기이자 오만하고 하찮은 남성을 가리킨다. 해러웨이는 이를 과학·기술·자본이 결탁한 정복과 폭력의 서사, 곧 ‘남근적 이야기들’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Prick,”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Prick_(slang) ))들을 잠재울 수 있다. 이 가방들 중 어느 것도 살육의 들판(killing fields) 바깥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정반대다. 그 각각은 모칠라를 만드는 이들과 그것을 지니는 이들을 지금, 이 위태로운 세계들 속에 위치시킨다. 모칠라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한다. 이 운반 가방들은 그들의 사람들을 더 세계 속의 존재로, 그리고 지금 진정 무엇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여전히 다르게 될 수 있는지를 분별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각각의 모칠라는 두터운 현재와 풍요로운 미래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삶과 죽음의 방식들을 위해 역사를 다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절실한 질문으로부터 자라나며, 또한 그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 르 귄의 통찰에 따르면 이야기의 적절한 형태란 의미를 담고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품는 속이 빈 자루와 같다. 각각의 모칠라는 씨앗과 별의 세계에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gripping tales)와 기묘한 리얼리즘(strange realism), 진지한 소설(serious fiction),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옮긴이] SF는 도나 해러웨이가 확장한 개념으로,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을 넘어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실뜨기(String Figures),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등을 포괄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SF는 “서로 얽히고 엮이는 존재들과 무늬들을 꾸며내며, 서로 함께-되기(becoming-with)의 실천을 지속하는 방식”이다. 즉, 세계 짓기(worlding)의 과정으로서, 따라가고 엮어내는 사유이자 실천이며 이야기하기의 형식이다.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크툴루세인에서 친족 맺기』(더럼: 듀크 대학교 출판부, 2016), 2-3쪽) ))를 담는 가방이다. 이 세계들은 다양한 종류의 인간과 인간-이상의(more-than-human) 사람들, 그리고 서로를 죽이고 행성을 메마르게 빨아먹는 대신 그보다 더 나은 일들을 하는 종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나는 각각의 모칠라, 각각의 운반 가방이 나에게 몸으로 느끼게 해준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려 한다. 이 가방들 중 어느 것이든 들거나 몸에 두르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응답하고 서로 함께-되는(become-with) 능력들의 매듭짓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림 1.
1. ‘플로르-세르(Flore-Ser)’는 말 그대로 ‘꽃이 되다(flower-be)’를 뜻하며, ‘florecer’, 즉 ‘번성하다’라는 스페인어 단어처럼 들린다. 이 말은 물과 생명을 수호하는 여성 협회(AMARÚ)의 여성들이 만든 파란 리넨 가방에 수놓아져 있다.

2. 천연색 양모의 넓은 줄무늬 가방은 시에라 네바다 데 산타마르타의 아루아코(Arhuaco)족 연장자 여성이 정교하게 매듭지어 만든 것이다. 그녀의 손녀 아티(Ati)는 산타마르타의 막달레나 대학교에서 원주민 학생 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 가방을 민족지학자 윌리엄 마르티네스 두에냐스(William Martinez Dueñas)와 아스트리드 로레나 페라판 레데스마(Astrid Lorena Perafan Ledezma)에게 팔았다. 두 사람은 나의 콜롬비아 방문을 도왔고, 그 가방을 내게 선물했다.

3. 녹슨 붉은빛의 기하학적 무늬가 있는 모칠라는 콜롬비아 북동부 라과히라(La Guajira)의 와유(Wayúu) 여성들이 면사를 코바늘로 떠서 만든 것이다.

내 첫 가방을 ‘플로르-세르’라 부를 것이다. 그녀는(([옮긴이] 플로르-세르(Flore-Ser)는 ‘태어났다(born)’는 표현과 인칭 대명사 she로 지칭됨으로써, 해러웨이가 말하는 기이한 친족(oddkin)의 잉태 과정을 수행적으로 드러낸다.)) 이미 앞면에 모호하게 가정법이자 명령법인 동사 형태로 수놓인, ‘번성’을 뜻하는 이 유망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친구이자 동료인 타니아 페레스-부스토스(Tania Pérez-Bustos)는 2019년 8월 보고타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온 직후 이 가방을 내게 주었다. 플로르-세르는 환경 정의와 성적·재생산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한 연대체의 직물 행동주의(textile activism) 속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내가 본 것은 청록색 자궁 안에 섬세한 흰 꽃뿐이었다. 2주 동안 나는 민족지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타니아가 기이한 친족(oddkin)(([옮긴이] ‘기이한 친족(oddkin)’은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혈연이나 종(種)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사물, 이야기와 관계가 서로에게 응답하며 얽히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 ‘기이한 친족’은 첫 번째 모칠라 플로르-세르를 중심으로 구체화된다. 플로르-세르는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짜는 직물적 관계망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며, 그 안에 해러웨이 자신과 동료들이 ‘담김’으로써 새로운 관계적 친족의 일부가 된다. 플로르-세르는 이러한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이자, 그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응답하는 하나의 기이한 친족(oddkin)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의 잉태에 관해 가르쳐 준 것을 보고 느끼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 가방에 내 콜롬비아 방문의 조각들을 하나씩 담아냈다. 다종(multispecies)의 환경적·사회적 정의와 돌봄을 위한 그들의 일과 놀이 속에서, 콜롬비아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타니아는 섬유 예술과 그 실천자들을 공예 디자인과 공학 디자인 안에서 함께 엮어낸다. 그녀는 특히 콜롬비아 카르타고의 칼라도(calado) 자수에서, 삶과 직물의 ‘풀어헤침과 수선이라는 얽힌 실천들(entangled practices of unraveling and mending)’을 연구한다.((타니아 페레스-부스토스, 「돌봄으로 사유하기: 공예 자수와 기술의 민족지학에서 풀어헤침과 수선」, 『지식의 인류학 저널(Revue d’Anthropologie des Connaissances)』 11:1, 2017. )) 타니아는 함께 일하는 여성들이, 이 힘든 시기에 천천히 손바늘을 움직이며 꿰매는 일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치유와 파괴된 공동체의 재결속, 그리고 땅과 물, 강제 이주, 여전히 가능한 미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고 전한다. ‘플로르-세르’는 ‘엘 모비미엔토 리오스 비보스 안티오키아(El Movimiento Ríos Vivos Antioquia)’의 여성들이 만든 것이다. 이 가방은 그들의 땅과 물인 카우카강 유역에 건설되고 있는 거대한 수력발전 프로젝트 ‘이드로이투앙고(Hidroituango)’에 맞선 생계 수단이자 저항 수단이다. 이 여성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마지막으로 잘 보존된 건조 열대림 자연문화(naturalcultural) 생태계 중 하나에 속한 다양한 인간들과 수많은 다른 생명 종들로부터 나왔으며, 그들과 연대한다. 이 프로젝트에 맞서 영토와 물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이 여성들은 자신들이 신체-영토(cuerpo-territoria)라 부르는 것을 지키며, 모든 형태의 남성적 지배에 맞서 싸운다. 자수를 통한 이야기하기는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르 귄이 말한 ‘별들의 가방(the bag of stars)’ 속에 삶의 이야기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가방 속에 나와 내 동료들을 담았다. 내가 그 가방을 멘다면, 응답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이 가방을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의 집으로 가져왔다.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수놓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천연색 양모의 넓은 줄무늬를 가진 내 두 번째 가방은 시에라 네바다 데 산타마르타의 아루아코(Arhuaco)족 연장자 여성이 정교하게 매듭지어 만든 것이다. 각각의 무늬는 한 세대의 여성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이야기를 나타낸다. 그녀의 손녀 아티는 산타마르타의 막달레나 대학교(La Universidad de Magdalena) 원주민 학생 협회 회장으로, 이 가방을 민족지학자 윌리엄 마르티네스 두에냐스(William Martinez Dueñas)와 아스트리드 로레나 페라판 레데스마(Astrid Lorena Perafán Ledezma)에게 팔았고, 그들은 나의 콜롬비아 방문을 도왔으며 이 모칠라를 나에게 선물했다. 아티는 그 대학에서 나와 다른 동료들과 함께한 공개 대화에도 참여했다. 오늘날 이러한 가방들은 젊은 아루아코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외부 세력의 지속적인 정착과 개발 계획, 강제된 불법 작물 재배와 정부의 제초제 살포, 암살과 협박, 기후 변화, 생태 관광, 댐 건설, 광산 채굴에 맞서 싸우고 있다. 코기, 위와, 칸쿠아모 등 다른 원주민들과 연대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땅과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 가방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거주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은 나를 삶과 땅을 위한 대담하고 지속적인 매듭짓기에 연결시킨다. 그 가방을 멘다는 것은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일을 의미한다.

세 번째 가방도 비슷한 서사들을 담고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그것들은 죽이는 추상(killing abstraction) 속의 어디에도 없는 아무데도 아닌 곳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장소에 자리한 이야기들이다. 녹슨 붉은빛의 기하학적 무늬가 있는 모칠라는 콜롬비아 북동부 라과히라(La Guajira)의 한 와유 여성이 면사를 코바늘로 떠서 만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이 가방은 콜롬비아 인류학자 레오나르도 몬테네그로(Leonardo Montenegro)에게서 받았다. 그는 앵글로-아메리칸(Anglo-American), 글렌코어(Glencore), BHP 빌리턴(BHP Billiton) 등 다국적 기업들에 맞서 땅, 물, 생존을 지키려는 와유 공동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상황은 참혹하다. 아이들과 동물들이 물과 식량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끝없는 가뭄 속에서 농작물은 타들어간다. 이 빈곤과 갈증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노천탄광인 세레혼(Cerrejón) 탄광의 결과이며, 이 지구를 태우는 연료의 가공과 운송을 위해 물을 끝없이 탐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예컨대 란체리아(Ranchería)강의 댐으로 인해 세레혼은 하루 1,700만 리터의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라과히라의 주민 각자는 하루 평균 0.7 리터의 물만으로 살아가야 한다.((가이아 재단(The Gaia Foundation), 「물, 영토,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받는 콜롬비아 원주민들」, gaiafoundation.org (2019년 9월 15일 접속). )) 광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준군사조직의 살해 위협은 흔하며, 와유족을 그들 조상의 땅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후손들과 원주민 공동체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과 땅을 위해 함께하며, 세계에서 강력한 연대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도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운반 가방 속에 담겼다. 불타는 질문은 이것이다. 필요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함께 말하고, 필요한 세계들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가며, 치명적인 세계들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불에 그을린 듯한 적갈색(burnt umber)의 색조와 무늬를 지닌 이 부드러운 직물의 풍성한 감촉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강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생명을 유지하는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자양분을 제공한다.

나는 필리핀의 현대 수렵-채집민 집단 아그타를 대상으로 한 도발적인 공동 연구로 글을 맺으려 한다. 이 연구는 르 귄이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에서 보여준, 거대한 진화 이야기를 기꺼이 다루려던 그 태도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대니얼 스미스(Daniel Smith), 필립 슐래퍼(Philip Schlaepfer), 케이티 메이저(Katie Major), 마크 다이블(Mark Dyble), 애비게일 E. 페이지(Abigail E. Page), 제임스 톰슨(James Thompson), 니킬 차우다리(Nikhil Chaudhary), 굴 데니즈 살랄리(Gul Deniz Salali), 루스 메이스(Ruth Mace), 레오노라 아스테테(Leonora Astete), 마릴린 응갈레스(Marilyn Ngales), 루시아 빈시우스(Lucia Vincius), 안드레아 람베르그 미글리아노(Andrea Ramberg Migliano), 「협력과 수렵-채집민 이야기하기의 진화(Cooperation and the Evolution of Hunter-Gatherer Storytelling)」,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 8:1853, 2018. )) 연구자들은 오랜 기간 많은 이야기와 이야기꾼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이 공동체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형적인 사회과학적 방법들을 설계했다. 그 결과 아그타 응답자들은 사회에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아무리 유용하고 기능적일지라도, 이야기꾼을 그 어떤 이들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이 발견을 생물학적 적합도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를 고집했다. 뛰어난 이야기꾼일수록 더 매력적인 짝이 되고, 사람들은 숙련된 이야기꾼에게 유용한 것을 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협력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경쟁적 생물학적 번식 이점의 이야기로 설명하는 이런 서사의 끝없는 지배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지만, 이 연구에는 여전히 사랑할 만한 부분이 많다. 연구자들은 숙련된 이야기꾼의 비율이 높은 캠프일수록 협력 수준이 높아졌다고 보고했다.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꾼이 있는 캠프에서 살기를 선호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협력과 성적·사회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른과 아이들 모두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또 듣고 싶어 하며, 그 이야기들은 흥미로운 등장인물들과 풍부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음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뛰어난 채집가보다 좋은 이야기꾼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며, 실제 그들의 행동은 이러한 자기 평가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이야기들은 공감 능력을 확장하고, 타인, 심지어 낯선 이들에게까지 더 환대하는 관점을 키워주는 방식으로 가치가 부여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이야기하기가 인류 진화에서 협력을 조직하고 촉진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는 내가 선호하는 그럴듯한 이야기(just-so stories)들의 토끼굴 속으로 금세 빠져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적어도 아그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꾼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 이 연구는 도발적이다. 만약 그들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설계와 확산 과정에 의미 있게 참여하며, 그 모든 과정이 그들의 안녕에 기여한다면, 더 많은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아그타족(the story-loving Agta)에 대한 이야기를 보편화하거나 실체화하는 것에 단호히 저항한다. 그러나 르 귄과 엘리자베스 피셔, 그리고 잘 빚은 항아리나 정교하게 매듭지어진 가방의 형태를 한 이야기들 속에서 서로 잘 살아가고 잘 죽는 강력한 실천을 노래해 온 세대의 이야기꾼들과 함께, 나는 아그타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이야기하기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삶을 다시 엮고 새로운 형태의 친족(kin)을 만들어갈 가능성들을 모은다. 이야기로 빚어진 이들(The Storied Ones)은 여전히 가능한 번영을 위한 무늬를 변형하고 발명하는 강력한 존재들이다. 플로르-세르(꽃이-되다).

르 귄이 그녀의 짧지만 위대한 에세이에서 우리에게 말했듯이, “때로는 그 [영웅적]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더는 전해지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이 거친 귀리밭, 이 이방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몇몇은, 옛 이야기가 끝날 때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함께 끝장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긴박감을 안고,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와 말을 찾아 나선다.”


참고문헌 (Bibliography)

엘리자베스 피셔(Elizabeth Fisher), 『여성의 창조(Women’s Creation)』, New York: McGraw-Hill, 1975.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영장류의 시각: 현대 과학 세계의 젠더, 인종, 자연(Primate Visions: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dern Science)』, New York: Routledge, 1989.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London: Ignota, 2019.
타니아 페레스-부스토스(Tania Pérez-Bustos), 「돌봄으로 사유하기: 공예 자수와 기술의 민족지학에서의 풀어헤침과 수선(Thinking with Care: Unraveling and Mending in an Ethnography of Craft Embroidery and Technology)」, 『지식의 인류학 저널(Revue d’Anthropologie des Connaissances)』 11:1, 2017.
Daniel Smith, Philip Schlaepfer, Katie Major, Mark Dyble, Abigail E. Page, James Thompson, Nikhil Chaudhary, Gul Deniz Salali, Ruth Mace, Leonora Astete, Marilyn Ngales, Lucia Vincius, and Andrea Ramberg Migliano, 「협력과 수렵-채집민 이야기하기의 진화(Cooperation and the Evolution of Hunter-Gatherer Storytelling)」,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 8:1853, 2018.

더욱 페미니즘적인 비평을 향하여 / 에이드리언 리치

Toward a More Feminist Criticism (1981)

더욱 페미니즘적인 비평을 향하여 (1981)

에이드리언 리치 (부깽 옮김)

 

나는 비평을 필요로 하는 작가로서, 때로 비평을 쓰기도 하는 문학도로서, 작은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저널 『Sinister Wisdom』의 공동 편집자로서, 그리고 몇 주 전 워싱턴 D.C.에 모여 스스로를 ‘출판계의 여성들(Women in Print)’이라고 규정한 페미니스트 혹은 레즈비언 편집자, 인쇄업자, 서점 운영자, 출판인, 기록관리자, 비평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과업에 임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특히 그 공동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함께 엮고자 하는 생각의 대부분은, 생존의 문제를 다루려는 과정에서 그 공동체의 다른 레즈비언 및 페미니스트 구성원들과 함께 사유하고 길러온 것이다.
그 회의의 첫 번째 소집 공고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여성운동의 생존은, 다른 모든 혁명운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통망이 지속될 수 있는가에 직접적으로 달려 있다.” 그 소통망의 한 부분으로서, 더 많고 더 나은 비평의 필요성이 우리의 논의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비평이라 부르는 활동에는 사실상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대학, 주로 여성학 프로그램에서 비롯되며, 일차적으로 그 내부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 비평은 기존의 정전(canon)에 무리 없이 편입될 수 있는 과거의 작품이나 상업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동시대 작품에 집중한다. 또 다른 유형은 때로 대학 학위를 가진 여성들에 의해 쓰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면서 어조·언어·스타일의 차이를 수반하는 더 넓은 페미니스트 공동체에 기반을 둔다. 첫 번째 유형의 비평은 『Signs』, 『Women’s Studies』, 『Feminist Studies』와 같은 저널뿐 아니라, 때로는 『College English』, 『Parnassus』와 같은 비(非)페미니스트 문학·비평 저널이나 전문 계간지에 실린다. 두 번째 유형은 『Conditions』, 『Feminary』, 『The Feminist Review』, 『off our backs』, 『Sinister Wisdom』 등의 잡지뿐 아니라 『First World』, 『Radical Teacher』, 『Freedomways』, 『Southern Exposure』 등에도 발표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첫 번째 비평이 두 번째 비평에 귀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분열이다.

서구 문학 문화에 잘 알려진 한 분열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중산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문학적 ‘기득권(establishment)’과, 확고히 자리 잡은 사상과 형식에 도전하고 규칙을 무시하며 ‘약강격(iamb)을 부수고’, 현재의 기득권 양식에 반대하는 ‘소(little) 잡지’를 펴내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사이의 분열이다. 문학적 ‘아방가르드’는 종종 정치적으로도 급진적이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예를 들어 남부의 퓨지티브 운동(Fugitive movement)이 급속히 하나의 기득권으로 변모한 것처럼) ‘모더니스트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반항적인 미학 속에서 보수적에서 파시즘에 이르는 정치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비평은 문학 비평의 한 학파로서가 아니라, 1970년에 출간된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의 기념비적 저서 제목처럼 남성과 여성 모두의 문학을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정치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행위로서 시작되었다. 밀렛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 에세이는 문학 비평과 문화 비평이 동등하게 결합된, 어쩌면 일종의 혼종이자 완전히 새로운 변종에 가깝다. 나는 문학이 구상되고 생산되는 더 넓은 문화적 맥락을 비평이 고찰할 여지가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작업해왔다. 문학사에서 비롯된 비평은 그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어서 이러한 고찰을 수행할 수 없으며, 미학적 고려에서 출발한 비평, 즉 ‘신비평’은 애초에 그러려 한 적이 없다.¹

페미니스트 비평은 미인대회에서부터 대학 교재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을 그것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반영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관점에서 비평적으로 성찰한 여성 해방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1977년 에세이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을 향하여(Toward a Black Feminist Criticism)」에서 바바라 스미스(Barbara Smith)는 이렇게 말한다.

책이 실제로 존재하고 기억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책이 이해되려면 적어도 작가의 기본적인 의도가 고려되는 방식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 1970년대에 구체적인 페미니스트 비평이 등장하기 전까지, 백인 여성들의 책은 … 억압받는 사람들의 문화적 표상으로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다. 가부장적 가치와 관행이 여성의 삶에 미친 영향을 놀라울 만큼 정확히 기록하고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백인 여성의 문학이 여성 경험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북미 페미니스트 운동의 제2물결이 표면화된 이후였다.²

이 진술을 염두에 두고, 나는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을 여성 해방 운동, 곧 혁명적인 운동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비평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단순히 여성 글쓰기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인식 없이 여성이 다른 여성의 책에 대해 쓰는 것이나, 지성의 자유주의적 슈퍼마켓에서 여성적 ‘대안적 읽기’에 그친다고 여기는 저자에 의한 것이나, 백인성·이성애·학문적 연구의 규범이 본질적으로 완전한 시각을 제공한다고 받아들이는 저자에 의한 것은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고 쓰거나, 아무리 취약하게나마 학계에 몸담은 여성들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삶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책무성을 전제로 한 페미니스트 비평의 정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학계 페미니스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여성들에게 이는 학계 문화의 규범이자 그 너머 지배 문화의 규범인 ‘보편적 백인성’을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학습을 포함하며, 동시에 ‘보편적 이성애’라는 규범을 벗어나려는 학습을 포함한다. 이는 우리 작업에 없는 포괄성을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유색인 여성 및/혹은 레즈비언을 암시하는 장이나 문단, 각주를 의례적으로 덧붙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백인성과 이성애의 보편성에 도전하는 것은 우리가 10여 년 전 가부장적 가치와 관행에 도전하며 겪었던 것만큼이나 급진적이고 놀라운 과정임을 시사한다.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스트 비평이 반드시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이며, 그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백인 학계 페미니스트들의 문학 비평을 볼 때, 그들이 백인 남성 비평가들의 저작을 대거 인용하는 것에 종종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인용과 함께 자주 드러나는, 이 신사들과 논쟁해야 한다는 듯한 방어적 어조와, 페미니스트를 더 넓은 여성 공동체와 연결하기보다는 오히려 한 여성으로 고립시키는 대화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 태도에도 놀라게 된다. 나는 일종의 근본적인 긴장도 느낀다. 그것은 더 나아가야 할 때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설명해야 하는 긴장이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용감하게 페미니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하는 긴장이며, 눈에 띄는 “신랄함” 없이 동료적인 농담을 주고받아야 하는 긴장이고, 문학비평의 언어와 방법을 동원해, 대부분 백인인 여성 작가들을 늘 ‘다뤄야 할 텍스트’로 사용하는 데서 오는 긴장이다. 나는 학계에서 이성애자로 수년간 살아온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서, 이 긴장을 내 안에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양쪽을 다 취하려는, 즉 호감을 주면서도 대담하려는 긴장이며, 토큰(token, 구색 맞추기용 인물)이면서도 토큰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나는 이런 일을 내가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문학을 비평하는 페미니스트 비평가에게 문학 해석 훈련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장에 기반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여성이 쓴 책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신문과 정기간행물, 팸플릿, 기사, 그리고 여성폭력, 기초생활수급자 어머니, 직장 내 성적·경제적 투쟁, 강제 불임 시술, 근친상간, 교도소 내 여성에 관한 연구들을 읽는 일을 포함한다. 또한 미니애폴리스의 클레이스 출판사(Cleis Press)에서 출간된 남성 폭력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저항을 다룬 앤솔로지 『Fight Back! 맞서 싸워라!』,  셰리 모라가(Cherrie Moraga)와 글로리아 안살두아(Gloria Anzaldúa)가 엮고 퍼세포니 출판사(Persephone Press)에서 출간한 『This Bridge Called My Back: Writings by Radical Women of Color 내 등골이라 불린 다리: 급진적 유색인 여성들의 글』,  2월 3일 출판사(February 3 Press)에서 출간된 『Top Ranking: Racism and Classism in the Lesbian Community 톱 랭킹: 레즈비언 공동체의 인종주의와 계급주의』, 나이아드 출판사(Naiad Press)에서 출간된 J. R. 로버츠(J. R. Roberts)의 『Black Lesbians: An Annotated Bibliography 흑인 레즈비언: 주석이 달린 참고 문헌』와 같은 페미니스트 출판물들도 포함된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작업 또한 하나의 잠재적 자원, 곧 우리를 위한, 우리 운동을 위한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를 단지 다른 비평가나 학자들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고, 책을 ‘실재하고 기억되도록’ 만들며, 평범한 여성들이 그렇지 않으면 놓치거나 외면했을 글을 읽도록 고무하고, 릴리언 스미스(Lillian Smith)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말이 우리를 속박하고 어떤 말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 모두가 가려내는 일을 돕는 사람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방식에 기반을 둔 최근의 도발적인 페미니스트 비평에서, 얀 클라우센(Jan Clausen)은 운동 내에서 시와 시인이 맡은 두드러진 역할이 일부 여성들로 하여금 말과 언어에 지나치게 많은 힘을 부여하게 만들었으며, 조직가나 실천적 전략가보다 시인을 대변인의 위치로 격상시켰다고 지적한다. “페미니즘은 말뿐 아니라 행동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³ 나 역시 행동을 등한시한 채 언어에 심취하는 운동에 대한 클라우전의 불편함에 깊이 공감한다. 특히 나는 종종 대변인의 역할을 부여받는 시인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 중 일부는 우리의 시적 언어에 주어지는 의례적인 동의의 수준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듣고 글로 쓰며 어쩌면 대상화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경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고 있다. 한 친구는 그것을 ‘신뢰 없는 동의(assent without credence)’라고 정의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얼마나 깊이 분별 없는 박수와 찬사, 그리고 진정한 비판적 응답이 부재한 경험을 가혹하게 느껴왔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일 것이다. 물론 내가 시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반응을 믿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연결이 바람직하다고 확신하지 않으며, 시인이 반드시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시를 낳는 것은 오히려 행동일 수도 있다. 시인은 자신과 같거나 다른 사람들, 즉 억압적인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행위가 말로, 행동이 시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말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거나, 혹은 우리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말투의 선택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며, 결국 누구와 말하고 누구의 말을 듣게 되는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말을 빗나가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소화(trivialization)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의례화된 존중(ritualized respect)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우리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마음의 양분과 섞이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비판은 스스로를 작가로 규정하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작품을 자신의 경험이라는 잣대로 검증할 여성들로부터도 나와야 한다. 이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보통 독자’처럼 문학을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모든 페미니스트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진정한 비평을 갈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다. 단순히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인의 언어와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질문을 던지는 분석 비평을. 남부의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저널 『Feminary』에서 수전 우드-톰슨이 내 시 속 ‘맹목’의 이미지 사용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또한 내 작품에서 내가 단지 잘 할 줄 아는 것을 잘 해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표현상의 위험을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런 비평의 일부는 친구들에게서 얻을 수 있지만, 그런 원칙에 입각한 비평이 낯선 이들로부터도 온다면 모든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작업하는 영역을 넓혀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비평은 문학 자체에 대한 헌신뿐 아니라 독자들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의 여성 독자들만이 아니라, 책으로부터 배제되어 왔던 여성들에게까지 읽기와 쓰기의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헌신이기도 하다. 흑인 비평가 글로리아 T. 헐(Gloria T. Hull)은 사유를 자극하는 아름다운 에세이 「앨리스 던바-넬슨 연구하기(Researching Alice Dunbar-Nelson)」에서, 페미니스트 학자로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모색하는 자신의 여정을 그린다. 그녀는 부모, 형제, 연인, 학문적 동료, 다른 흑인 페미니스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말을 건네고자 하는 다양한 독자들을 상상하며, “두세 개의 다른 모자를 쓴 채 교활하고 분열적인 에세이를 쓰기보다” “유기적인 글”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⁴ 이 에세이에서 헐은 던바-넬슨의 생존 조카딸이 보관하고 있던 원고 자료를 다루는 과정, 그 조카딸과 맺은 관계의 역학, 그리고 이 연구와 그 발견이 자신의 삶과 흑인 여성 작가 연구 전반에 갖는 의미를 서술한다. 글의 말미에서 그녀는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 방법론의 원칙을 정리한다. 나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자 한다.

(1) 대상에 관한 모든 것은 그녀의 삶과 작업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
(2) 올바른 학문적 태도는 ‘객관적(objective)’이라기보다 ‘참여적인(engaged)’ 것이다.
(3)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 이는 대상과 비평가 모두에게 해당된다.
(4) 기술(description)은 반드시 분석을 동반해야 한다.
(5) 흑인이자 여성인 시각을 의식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계급의식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관점을 갖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6) 원칙에 입각한다는 것은 엄격한 진실성과 ‘모든 것을 말하기(telling it all)’를 요구한다. [여기서 헐은 던바-넬슨의 일기를 편집하며 그녀의 레즈비언 관계를 발견한 사실을 포함해 여러 점을 암시하고 있다.]
(7) 연구와 비평은 학문적·지적 유희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사회적 의미를 지닌 추구이다.
나는 항상 던바-넬슨이 우리에게 할 말이 많으며, 더 중요하게는, 그녀를 정직하게 다루는 것이 은유를 넘어선 의미에서 어떤 흑인 여성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마치 이런 방식으로 그녀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것처럼 말이다.⁵

그리하여 질문은 우리 앞에 놓인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비평이 대학 안에서, 혹은 학술 출판물을 통해 지속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 작업이 레즈비언의 작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학술 강의실과 논문 속에서 정중하게 인용되고 논의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거기서는 레즈비언이라는 말 자체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바바라 스미스의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을 향하여」, 앨리스 워커의 에세이/묵상 「자신만의 아이(One Child of One’s Own)」가 발표된 지 몇 해가 지나고,『Signs』가 내 글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Compulsory Heterosexuality and Lesbian Existence)」를 게재한 지 1년이 넘은 지금, 『Signs』의 최신호가 “사유 자체를 재사유하기”를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으로 주장하는 장문의 논문으로 시작하면서도, 백인 중심적이고 이성애적인 여러 학계 페미니스트 비평서들을 아무런 언급 없이 논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⁶ 『Feminist Studies』에 실린 유사하게 야심적인 논문이 “유색인 여성 혹은 명시적으로 레즈비언인 여성들의 작업에 대한 언급 없이”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⁷ 비평가가 단지 백인 중심적이며 이성애적인 경험과 독서의 단면만을 토대로 포괄적인 이론을 구축하려 할 때, 그녀가 사유를 구성하는 바로 그 개념과 구조에 대해 그것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또한 백인 학계 페미니스트 비평가가 앨리스 워커, 바바라 스미스, 엘리 벌킨(Elly Bulkin), 미셸 러셀(Michele Russell), 토니 케이드 밤바라(Toni Cade Bambara)의 작업을 얼마나 진지하게 읽고 있는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녀는 『Conditions』, 『First World』, 『Freedomways』, 『Radical Teacher』, 『Sinister Wisdom』 같은 저널들에서 그들의 비평을 찾는가? 아니면 문학 비평가로서 『Partisan Review』, 『Critical Inquiry』, 『Semiotics』, 그리고 여러 영문학과에서 발행되는 학술지들을 꾸준히 따라잡는 일을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이 ‘중요한가’를 결정하는 그들의 기준뿐 아니라 그들의 언어까지 흡수하고 있는가? 왜 많은 학계 페미니스트 비평의 언어는 그렇게도 냉정하고 명석하며, 매끄럽고 세련되어 보이는가?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가 글로리아 T. 헐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거부해 온 비평의 문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전통적인 백인 남성 문학 연구의 특징인, (내가 몹시 싫어하는) 거만하고 재치 있지만 공허한 영국식 세련된 어조에 대한 (과잉된) 반응으로서, 나는 대개 던바-넬슨을 한결같이 진지하게, 그리고 언제나 애정을 가지고 논의한다.⁸

자신의 작업이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사회적 의미를 푸구하는 것”이라고 믿는 페미니스트 비평가에게 필수적인 것은 권력에 대한 명확한 이해이다. 대학을 통해 배분되는 문화가 어떻게 어떤 이들에게는 힘을 부여하고(empower) 다른 이들에게는 힘을 빼앗는지(disempower), 그리고 그녀 자신이 피부색, 이성애성, 경제적·교육적 배경 혹은 그 밖의 요인으로부터 비롯된 성찰되지 않은 특권의 위치에서 글을 쓰고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실제로 그랬듯이) 흑인 여성 작가의 소설에 대해 쓴다면, 그 소설에 대한 나의 해석이 백인·중산층·유대인·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의 해석, 즉 복합적인 관점이지만 결코 권위 있는 관점은 아님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백인으로서 나는 이 문학이 나에게 미친 영향과 인상을 설명하고, 왜 다른 백인 여성들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하려는 시도를 넘어서는 어떤 특별한 조망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영역에서는, 경험과 연구가 결합되어 나보다 훨씬 더 깊은 통찰과 인식을 지닌 흑인 여성 학자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내가 백인이기 때문이고, 레즈비언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의도적으로 그렇게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며, 학자나 비평가, 시인, 소설가로서의 유색인 여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의 특권, 나아가 나의 신뢰성을 지탱하는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백인 피부, 이성애, 계급적 배경이라는 모든 혹은 많은 특권을 가진 여성이 그로 인해 글을 쓰거나 비평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모든 여성이 동일한 특권을 지닌 것처럼 읽고, 생각하고, 쓰고, 행동하지 않을 책임이 있으며, 특권이 어떤 특별한 통찰력을 부여한다고 가정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타협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앉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 가능한 한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매우 다른 문화적 배경이나 근원에서 글을 쓰는 여성들의 작품을 마주할 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혼란스러움이나 자신의 이해가 미치지 못함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를 포함하도록 결코 설계되지 않았던 전통, 곧 읽기, 말하기, 쓰기, 비평하기의 방식이 지닌 한계를 거부하는 일에서 서로를 지지해야 한다.

물론, 그 전통, 즉 학계의 관점에서라면 다른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고 실제로 매일 제기된다. “당신은 문학을 정치적 변화의 바람에 책임지게 만들려는 것 아닙니까?” “정치와 예술은 언제나 재앙적인 동반자가 아니었나요?”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작가의 개인적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당의 노선 같은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작품을 평가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결코 보이는 것처럼 순수하거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유색인, 가난한 사람들, 백인 여성,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들의 자기 규정과 자기 사랑에 깊이 적대적인 지배적 백인 남성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술이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초월할 수 있을까?”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이는 누가 만들도록 허락받았는지, 무엇이 그것을 존재하게 했는지, 왜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정전(canon)에 편입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여전히 그것을 논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나는 우리가 여성으로서의 억압을 자각하는 동시에, 우리 사이의 차이 또한 깊이 인식하는 여성 운동, 진정한 여성 해방 운동을 전제로 삼을 때,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며, 그에 따라 문학에 관한 질문들 자체가 새로운 질문들로 변한다고 믿는다.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가 메리 헬렌 워싱턴(Mary Helen Washington)이 흑인 여성에 의한, 그리고 흑인 여성에 관한 소설 선집 『Midnight Birds』에 흑인 레즈비언 작가의 단편을 (그 정체성이 명시되지 않은 채) 단 한 편 포함시키고, 서문에서 흑인 레즈비언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비평가로서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의 범위를 스스로 제한한 것이다. 백인 페미니스트 비평가가 유색인 여성을 자신의 분석에 별도의 장이나 각주로 단순히 덧붙이거나, 아예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릴 때, 그녀는 단순히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녀의 비평의 유기적 짜임은 바로 그 왜곡으로 인해 약화된다. 그녀가 의식적으로 백인 중심적 독단의 관점을 벗어나 작업하려 할 때, 그녀는 자신의 분석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녀는 유색인 여성의 글뿐 아니라 백인 여성의 글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그리고 더 멀리 보게 될 것이다.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에 대한 의식은 단순히 인종차별적 언어나 동성애 혐오적 고정관념을 삭제하려는 노력(물론 그것이 필요한 시작점이긴 하지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비평이라는 장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작업이며, 백인성과 이성애를 절대적 권위의 위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상태로 경험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게 하고, 익숙한 자아와 새로 드러나는 자아 사이에서 분열감을 느끼게 한다. 검증되지 않은 충성심에 의문을 품게 하며, 즐거운 동료 관계나 농담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과거 글을 조급한 마음으로 다시 읽게 만들고, 한때 중요하다고 여겼던 탐구의 주제 목록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우리가 문학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Women in Print’ 컨퍼런스의 몇몇 워크숍에서 나는 바람직하고 필요하지만 아직 창조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문학이 묘사되는 것을 듣고 있다고 느꼈다. 유색인 여성들과 백인 여성들은 소설가로서든 비평가로서든,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차이들이 여성으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점을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도 던져졌다. 우리는 비평가나 리뷰어가 자신의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감각을 어떻게 기르고, 자신이 비평하려는 작품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위치시켜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또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가 단지 자신의 계급이나 배경에 속한 여성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을 향해 책무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는지, 고정관념에 저항하며 온전한 인물을 창조하려 애쓰는 일이 어떻게 단지 글쓰기만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 될 수 있는지 논의했다. 문학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비가시성과 왜곡된 재현을 보상하려는 충동, 피부색이 검거나 레즈비언 혹은 그 둘 다인 ‘문학적 슈퍼우먼’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페미니즘 버전을 거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 워크숍에서는 두 명의 백인 맹인 레즈비언, 한 명의 푸에르토리코 레즈비언, 한 명의 흑인 레즈비언, 그리고 한 명의 백인 노동계급 레즈비언이 문학 속에서 자신과 같은 여성들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만이 아니라, 배경에서도요. 그 장면의 일부로서, 거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다뤄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둡거나 밝거나, 장애나 나이, 혹은 신체 이미지에 관한 고정관념을 벗어난, 경직되고 환원적이며 반복적인 이미지 만들기를 넘어서는 시적·산문적 언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평가의 과제 중 하나가, 독자이자 작가로서 우리 앞에 그러한 가능성들을 계속 열어 두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영문학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 영어로 쓰인 “주요 비평 텍스트들”이 여럿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영국 남성들이 쓴 것이었고, 필수적인 고전으로 여겨졌다. 시드니의 『시의 옹호』, 워즈워스의 「서정 민요집 서문」, 콜리지의 『문학 평전』 서문, 엘리엇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 엠슨의 『일곱 가지 유형의 모호성』 등이 그 예였다. 그리고 그 목록은 지난 30년 동안 더 길어졌다. 이 강연문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현재의 미국 페미니즘이 불과 십여 년 만에 그에 견줄 만한 중요한 비평 텍스트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확장된 의미에서 문화 비평이기도 했다. 『성 정치학』이 그 야심찬 종합과 높은 가시성을 통해 길을 열었다면, 바바라 스미스의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을 향하여」는 기존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백인 페미니스트 비평과 흑인 문학 비평 양쪽의 심장부를 찌르는 대립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다음 단계였다. 나는 맵 시그레스트의 「남부 여성 글쓰기: 온전함의 문학을 향하여」, 여기서 인용한 얀 클라우전과 글로리아 T. 헐의 글, 엘리 벌킨이 『레즈비언 소설』과 『레즈비언 시』에 쓴 서문들을 떠올린다. 또한 앨리스 워커의 「우리 어머니들의 정원을 찾아서」와 「자신만의 아이」, 글로리아 안살두아의 「방언으로 말하기: 제3세계 여성 작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레즈비언-페미니스트 문학 이론이라 할 수 있는 아리나 클레피시의 「레이철 로봇닉의 일기」를 생각한다. 나는 학계의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가들이 운동 내 활동가이기도 한 비평가들이 제기한 물음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또 학계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Azalea』, 『Conditions』, 『Feminary』, 『Sinister Wisdom』과 같은 저널들을 찾아 읽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바란다. 그것들은 단일한 노선을 추구하는 일체화된 매체가 아니라, 지배적인 문학 비평의 활동과 그것이 반영하는 문화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강력하고 전복적인 역사적 주체들이며 교실에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페미니스트 비평이 우아하고, 호감을 사고, 존경받고자 하는 유혹을 버리고, 그 대신 강인하고, 거침없으며, 위험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대학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정치적 힘으로서, 그리고 우리 운동의 생존을 위한 소통망의 일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모두, 작가, 비평가, 편집자, 학자, 조직가, 서점 운영자, 인쇄인, 출판인, 학생, 그리고 교사가 서로의 작업이 지닌 힘을 나누기를 바란다.

페미니스트 문학 연구 심포지엄 기조연설, 미네소타 대학교, 미니애폴리스, 1981.


 

각주

 

  1. 케이트 밀렛 (Kate Millett), 『성 정치학 (Sexual Politics)』 (Garden City, N.Y.: Doubleday, 1970), p. xii.
  2. 바바라 스미스 (Barbara Smith),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을 향하여 (Toward a Black Feminist Criticism),” 모든 여성은 백인이고, 모든 흑인은 남성이고,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용감하다: 흑인 여성 연구 (All the Women Are White, All the Blacks Are Men, but Some of Us Are Brave: Black Women’s Studies), 편집: 글로리아 T. 헐, 패트리샤 벨 스콧, 바바라 스미스 (Old Westbury, NY: Feminist Press, 1982), p. 154.
  3. 얀 클라우센 (Jan Clausen), 『시인의 운동 (A Movement of Poets)』, pamphle (Brooklyn, N.Y.: Long Haul, 1981).
  4. 글로리아 T. 헐 (Gloria T. Hull), “앨리스 던바-넬슨 연구하기 (Researching Alice Dunbar-Nelson),” 모든 여성은 백인 (All the Women Are White), pp. 193-194.
  5. Ibid, p. 193.
  6. 마이라 젤렌 (Myra Jehlen), “아르키메데스와 페미니스트 비평의 역설 (Archimedes and the Paradox of Feminist Criticism),”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6, no. 4 (Summer 1981):  571-600.
  7. 주디스 가디너 (Judith Gardiner), 엘리 벌킨 (Elly Bulkin), 레나 그라소 패터슨 (Rena Grasso Patterson), 애넷 콜로드니 (Annette Kolodny), “페미니스트 비평에 관한 교환: ‘지뢰밭을 뚫고 춤추기’에 대해 (An Interchange on Feminist Criticism: On ‘Dancing through the Minefield’),” Feminist Studies 8, no. 3 (Fall 1982): 636.
  8. 글로리아 T. 헐(Hull), pp. 193-194.
  9. [A.R., 1986: 맵 시그레스트 (Mab Segrest), “남부 여성 글쓰기: 온전함의 문학을 향하여 (Southern Women Writing: Toward a Literature of Wholeness),” My Mama’s Dead Squirrel: Lesbian Essays on Southern Culture (Ithaca, N.Y.: Firebrand, 1985).]
  10. 엘리 벌킨 (Elly Bulkin), 편집, 『레즈비언 소설: 앤솔로지 (Lesbian Fiction: An Anthology)』 (Watertown, Mass.: Persephone, 1981); 그리고 엘리 벌킨과 조안 라킨 (Joan Larkin), 편집, 『레즈비언 시 (Lesbian Poetry)』 (Watertown, Mass.: Persephone, 1981; distributed by Gay Press, Boston, Massachusetts).
  11. 글로리아 안살두아 (Gloria Anzaldúa), “방언으로 말하기: 제3세계 여성 작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Speaking in Tongues: A Letter to Third World Women Writers),” 내 등골이라 불린 다리 (This Bridge Called My Back), 편집: 체리 모라가 (Cherríe Moraga)와 글로리아 안살두아 (Gloria Anzaldúa) (Watertown, Mass.: Persephone, 1981).
  12. 아리나 클레피시 (Irena Klepfisz), “레이철 로봇닉의 일기 (The Journal of Rachel Robotnik),” Conditions 6 (1980): 1.  [A.R., 1986: Reprinted in Irena Klepfisz,『다른 울타리 (Different Enclosures)』 (London: Onlywomen, 1985).]

특권의 문제- 앙드레아 스미스

The Problem with “Privilege”
특권의 문제

앙드레아 스미스  (한디디 옮김)

자신들이 누리는 젠더/인종/성/계급/등등을 둘러싼 특권에 대해 성찰하는 방식의 운동, 정치적 프로젝트에 대해서.
“나는 누구고, 어떤어떤 특권을 누려왔다”는 고백은 그 발화의 순간, (이러한 특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고백자를 용서하거나 면죄해줄수 있는 청자로서 일시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어떤 효과를 갖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의식ritual 은 그것이 저항하고자했던 그 지배적인 구조를 재-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 이 의식 속에서 백인/남성/이성애자/etc.는, 자기성찰이 가능한 주체로 재성립되는 한편, 인종화/젠더화된 주체들은 그러한 자기성찰을 위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변혁을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근본적 재구성을 동반해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의 변혁은 사회/정치적 변혁속에서 (그와 함께)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특권의 해체는 개인의 고백 혹은 스스로를 새로운 위치에 두고 생각해보려는 노력에 의해 가능한게 아니라 그러한 특권을 가능케하는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집합적인 구조의 생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권을 해체하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를 바꾸고 그럼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고백하는 주체]
데니사 다 실바는 서구의 주체가 자기성찰과 분석의 능력을 갖고 있는 자기규정적이며 보편적인 주체라고 분석한다. 그(서구적 주체)는 자신을 자신이 아닌 “타자”와 비교한다. “타자”는 물론 인종화된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실바는 인종화/식민화된 사람들 (타자들)이 당면한 문제가 그들이 “비인간화”되어 왔다는 점이라고 믿는 사고를 비판한다. 근본적인 문제, 그러나 그동안 주목받지 못해온 문제는 “인간” 그 자체가 인종적 프로젝트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보편성에 호소하는 프로젝트이며, 특정한 “타자” 위에서, 그것에 반해서만 가능한 프로젝트이다.
결론적으로 두가지 문제가 남는다. 첫째. 젠더화/식민화된 타자로 위치지워진 자들은 그들이 자기규정적 주체가 되는 순간 (다시 말해, 완전한 “인간”이 됨으로써) 해방이 뒤따를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염원하는 인간성은 여전히 또다른 젠더화/식민화된 타자의 억압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해방을 위한 투쟁이 또다른 억압의 산물이 된다는 것.
이런 분석은, “해방”이란 전혀 다른 자아들, 즉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급진적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목표는 반인종적/반식민적 어휘의 습득이 아니라 자신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 즉, 자신이란 존재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둘째. 해방을 “인간화”로 간주할 때 해방은 인간성을 부여받기 위해 가치를 증명하는 문제가 된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더 잘 안다면, 그들은 우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의 지위를 부여할거야. 그 결과, 반인종적 운동과 학문적 프로젝트들은 종종 민족지적 다문화주의라는 덫에 갇히고 만다.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민족지적 대상으로 위치짓고, 백인주체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평가하게 하는 것이다.
레이 쵸는 이러한 민족지적 덫이라는 위치에서 네이티브에게 가능한 유일한 수사학적 자리는 “저항하는 소수집단”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계속 불만을 얘기하면 체제가 무엇인가 던져줄것이라는 인정/승인의 정치학 속에서 구축된 자세posture. 쵸의 작업 위에서, 이 글은 현제의 경제체제 안에서 형성된 또하나의 자세에 대해, 어떻게 그러한 자세가 생산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성찰적인 입식자/백인 주체이다. 이 자기성찰적 주체는 다양한 반-인종적 행사에 등장하는데, 그들(특권적 주체)은 자신이 어떻게 식민지적/젠더화된 주체에 노출됨으로서 식민주의의 복잡함과/또는 백인의 패권에 대해 배울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여기서 네이티브는 자기성찰이라는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듣는 고백의 가치를 평가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고백하는 주체들은 종종 심하게 긴장한다. 내가 나의 특권을 다 말했나? 적절한 방식으로 고백하고 있나? 혹시 청중중에 누가 실수를 발견하거나 내가 정말로 반인종적 주체가 되었는지 질문하면 어떻하지? 그럴경우, 그 주체는 더 많은 자아성찰을 하게 되고 이후 더 많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특권의 고백은 결국 (반인종주의/반식민주의를 주장하지만) 입식자/백인 주체의 구성을 돕는 전략이 되고 만다.
자기성찰은 백인/입식자적인 주체의 구성을 돕는다. 물론, 이 글도 자기성찰이라는 논리를 피해갈 수 없다. 또한, 설령 반인종차별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네이티브를 문제적으로 재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사람들이 특별히 결함이 있다거나 그들의 학문이 가치가 없다는 걸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반인종주의 워크샵에서 특권을 가진 “고백하는” 주체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땅의 식민주의 혹은 백인들의 패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들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하다. 더 나아가, 유색여성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지적했듯이, “억압받는” 사람들과 “억압하는 자”들 사이에는 사실 뚜렷한 구별이 없다. 개인들은 다양한 맥락 안에서 고백자로서의 혹은 고백을 심판하는 자로서의 다양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이 분석의 요점은 인종화/식민화된 사람들이 애시당초 보여지고 이해되는 보다 큰 다이나믹을 설명하는 것이다.
선주민들은, 그들이 충분히 이해되거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억압받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네이티브를 “알고자”하는 이 욕망 자체가 선주민들의 잠재적인 힘을 파악하고 길들여 정복국가에 복속하고자하는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이로써 네이티브의 투쟁은 단순히 그들의 요구를 알리는 것, 그래서 그들의 주장이 정복국가에 인식되도록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일단 그들의 요구가 파악되면, 그들은 보다 쉽게 관리되고, 포함되며, 훈육된다. 그러므로 탈식민주의 프로젝트는 오드라 심슨이 “민족지적 거부”라고 부른 것, 알려지는것, 확실히 알만해 지는 것에 대한 거부를 요청한다. 탈식민주의의 정치는 입식 식민주의를 넘어서는, 그러므로 알수없는 이론, 지식, 사상, 분석의 증식을 요청한다.

[자기성찰을 넘어서]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의 프로젝트는 자기의 수양, 혹은 심지어 집단적인 자기수양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언어로 표현할수 없는 새로운 세계들과 미래상을 창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단순한 반-억압의 공식은 없다. 우리는 끊임없는 시도와 실패, 급진적인 실험의 와중에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특권을 해체할 수 있는 몇가지 새로운 방식의 가능성들을 제안하고 싶다. 이는 앞으로 가기 위해 “고치는” 과정이 아니라, “너머”에 대한 우리의 집합적 상상력에 몇가지 덧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탈식민주의적 프로젝트들은 우리의 특권에 대해 보다 잘 “알기”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것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반인종/반식민주의적 자아-성찰이라는 프로젝트와 대비될 것이다.
이들은 남미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권력을 구성함으로서 권력을 탈취하는” 모델에 기반한다. 이러한 모델들은 선주민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땅없는 농민 운동, 공장운동, 그리고 다른 여러 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모델들은 또한 미국과 다른 여러곳의 다양한 사회정의조직들에 의해 활용되었다. 이러한 모델들을 뒷받침하는 원칙은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싶은 세상을 실제로 생산함으로서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위계, 지배, 통제 대신, 수평성, 상호부조, 관계맺기라는 원칙에 기반한 대안적 통치 시스템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를 생산하는 그 처음부터 주체들은 변한다. 이 운동들은 남미의 혁명적 선두 모델로 조직되었다가 “기계적 레닌주의”모델이라고 비판받게된 권위적/위계적 모델에 대한 대응으로 발전되었다. 이 권위적 모델들은 자신들이 싸우고 대체하려한 시스템과 같은 시스템을 재생산 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당파적이었다. 이에, 모두가 참여할수 있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기반으로한 모델을 구성하는 운동들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다른 통치의 방식을 구성하는 이러한 운동이 지향하는 정치는 미국내의 많은 활동가 그룹에 만연한 “안전한 공간”이라는 개념에 도전한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특권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는, 우리가 일단 우리의 젠더/인종/계급적인 특권을 고백하면, 그럼으로서 타자들이 이 특권으로부터 안좋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지대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성애적 가부장주의, 백인우월주의, 식민주의, 또는 자본주의를 해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고백된 특권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실재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공간들 속에서 그/녀의 특권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때, 그/녀는 그 공간을 “안전하지 않은” 곳을 만들었다고 비난받게 된다. 이런 수사적인 전략은 오직 특정한 특권적 주체만이 이 공간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만든다고 가정한다. 마치 다른 모두는 이성애자 가부장주의, 백인우월주의, 식민주의, 자본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듯이. 우리의 초점은 세계 전체를 안전하지 않게 만드는 커다란 구조들로부터 관계적인 행동을 이동한다. 덧붙여 “안전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은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유색인들에게도 부과된다, 단지 그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그 공간을 안전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결국 안전한 공간의 문제점은 안전한 공간이 가능할거라는 가정 그 자체이다.

대조적으로, 식민지, 가부장제, 백인패권주의로부터의 망명지로서의 안전한 공간이라는 생각 대신, 루시 길모어는 안전한 공간이 실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실재로 불러오는 연습의 공간이라고 제안한다. “권력을 구성하는” 모델은 이 제안을 따라 단지 자신들이 살고 싶은 세계를 지금 여기에서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 예를 들자면, “유색인 여성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을때 우리는 그 공간이 안전하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 그곳은 위험한 공간이다.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는 서로의 연대를 가정할 수 없다는 것, 연대는 실제로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적이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가정 대신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한가지 전략은 우리가 백인우월주의/식민주의/이성애적 가부장제/등의 구조에 연루되어 있음을 가정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정치과 실천에 있어 특별히 문제적인 이슈들과 관련해 스스로를 교육할수 있는 공간들을 구성함으로서 이러한 가정들을 우리의 조직에 구조화했다. 장애, 반흑인 인종주의, 정착민식민주의, 시오니즘과 반아랍 인종주의, 트랜스 포비아 그리고 또다른 문제들이 이러한 이슈에 포함되었다.그러나, 이러한 공간에서 우리는, 억압을 둘러싼 우리 개개인의 복잡성을 무시하지 않는 한편, 집합적으로 우리의 정치와 실천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개발했다. 다시말해 이 공간은 고백자와 고백을 듣는자의 다이나믹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 억압적 구조들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을 해체하기 위해 함께 일해야한다고 가정했다. 결과적으로,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공간은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통합되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촉진한다. 아무도 그가 대중을 향해 고백해야하는 특권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론]
특권의 정치는 우리가 얼마나 억압적 구조에 의해 구성되어 왔음을 알리는데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특권을 고백하는 의식이 진화함에따라 그것은 우리의 초점을 세계를 바꾸기 위한 사회운동에서 개인적인 자기수양으로 옮겨버렸다. 게다가 그것은 백인 패권주의자/식민주의자들의 주체 개념, 즉 자기-성찰에 의해 형성되는 주체, 타자들 위에서 타자들에 반하여 구성되는 자아로서의 주체 개념에 기대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변혁은 연결되어있다는 활동/학계의 중요한 통찰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편, 대안적 프로젝트들은 특권보다는 특권을 생산하는 구조에 주목하려 해왔다. 이러한 모델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해방을 위한 운동적/지적인 우리의 프로젝트들이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는 것을 특권의 정치의 계보학은 보여주었다. 우리의 상상이 백인 패권주의, 식민주의, 등등에 의해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생각도 “완벽”할수는 없다. 또한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과거에 해온 것의 완전한 폐기 위에서 이루어질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권을 넘어서는 것 뿐 아니라, 특권을 주장하는 자아의 개념을 넘어설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상상할수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우리 스스로를 개방한다.

원문
The-Problem-with-Privilege-ASmith

https://andrea366.wordpress.com/2013/08/14/the-problem-with-privilege-by-andrea-smith/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 에이드리언 리치

레나토 로살도의 <문화와 진리> 서문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로 시작한다.

 

예컨대 선생님이라는 권위를 가진 어떤 사람이 <이것이 바로 세계다>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순간 심리적인 불균형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때와 같다. 

-애드리언 리치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도서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 <Blood, Bread, and Poetry>를 빌려서 읽는 김에 겸사 번역해 봤다.


학계에서의 보이지 않음 Invisibility in Academe

북미 사회에서 백인 지배 아래 레즈비언의 역사는 1656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레즈비언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에서 시작된다. 300년 후인 1950년대에도 레즈비언들은 거리에서 구타당하거나, 종종 부모의 강요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정신외과 수술을 강제로 받아야 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 여성 해방 운동과 게이 해방 운동의 투쟁과 비전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공격당하고 있다. 내가 사는 곳 근처 여자대학이 있는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도 지난 한 해 동안 그런 사건이 있었다.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행동 교정과 의학적 처벌을 강요당하고, 가족으로부터 추방되며,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한다. 직장을 유지하거나 자녀 양육권을 얻고, 집을 구하고, 더 큰 공동체를 공개적으로 대표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인 척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에 비하면, ‘보이지 않음’은 감내할 만한 작은 대가처럼 보일 수 있다(‘개인 생활은 비공개로 하라’거나 ‘그 단어만은 쓰지 마라’는 요구처럼). 그러나 보이지 않음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이며, 레즈비언들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이름을 붙이고 사회적 현실을 구성할 권력을 가진 이들이 당신을 보지도 듣지도 않기로 선택할 때, 그 이유가 당신이 피부가 검거나,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거나, 여성이거나, 그들과 다른 억양이나 방언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든, 혹은 교사와 같은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세상을 설명하면서 그 설명에 당신을 포함하지 않을 때, 당신은 마치 거울을 봤는데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 같은 정신적 불균형을 느낀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당신과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거울을 이용한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이 공허함, 이 비존재 상태에 저항하고 일어서서 자신이 보이고 들리기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혼의 힘이 필요하며, 이는 개인의 힘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가시화하고, 당신의 경험이 다른 이들의 경험만큼이나 현실적이고 규범적이며, 역사학자 블랑쉬 쿡의 말처럼 ‘도덕적이고 평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당신을 취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억압자의 일을 대신해 스스로의 벽장을 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19세기 여성들, 모든 여성들이 공개 모임에서 발언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그들의 침묵에 의존했다. 하지만 몇몇 여성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침묵을 거부하고 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10년 동안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다. 나는 스스로 레즈비언임을 밝혀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글에서도 레즈비언으로 언급되어 왔다. 나는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운동에서 활동해왔다. 여기 클레어몬트에서 나는 많은 따뜻함과 환대를 받았지만, 레즈비언으로서는 종종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이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환영받았다. 그러나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은 많은 이들이 알기를 꺼렸다. 이 경험은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일깨워주었다. 보이지 않음은 단순히 ‘개인 생활은 비공개로 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파편화하고, 사랑과 노동, 감정과 사상을 통합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주체적 힘을 방해하려는 시도다.

나는 이 공동체에만 국한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 프로그램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이러한 파편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화와 논의의 토대는 여전히 이성애 중심적이며, 레즈비언의 경험과 사상은 독서 목록의 한 구절이나 단일 수업 시간에 ‘포함’되는 데 그친다. 유색인종 여성들의 경험과 사상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별도의 섹션으로 밀려나거나, 뒤늦게 생각난 듯 추가된다. 반면 중심 담론은 여전히 한결같이 백인 중심이며, 주로 중산층적 사고방식과 우선순위를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 장벽의 이름은 이성애주의(heterosexism)이고, 두 번째는 인종차별(racism)이다. 흑인 정치학자 글로리아 I. 조셉(Gloria I. Joseph)은 ‘제3세계 여성과 페미니즘’ 강연에서 ‘호모포비아(homophobia)’라는 용어가 통제할 수 없는 정신적 공황을 암시하기 때문에 부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이성애주의(heterosexism)’가 더 적합한 용어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이것이 인종주의, 성차별, 계급주의와 유사한 뿌리 깊은 편견이자 정치적 세뇌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반드시 그 본질대로 인식되어야 하며, 재교육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 지배적인 성별화된 사회에서 자란 그 어떤 여성도, 여러 방면으로 다양하지만 여성을 자신의 감정적, 에로틱한 삶의 중심에 둔 여성들의 존재, 현실, 실제를 모른 채로는, 이성애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그녀 개인의 삶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고정관념과 금기, 그리고 막연한 불안 속에서 20대에 접어드는 젊은 여성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 선택지, 그리고 남성이나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성찰할 도구를 갖추지 못한 채 있다. 레즈비언과 이성애자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 무지와 불안, 이 침묵, 이 전체 인구의 부재, 이 보이지 않음은 모든 여성의 힘을 빼앗는다. 자신의 역사와 세계 속 존재에 대한 인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은 레즈비언 학생들만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현재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더 정확한 지도를 원하며, 앞으로 무엇이 가능할지 상상하려는 모든 여성의 요구여야 한다.

여기 있는 우리 레즈비언들은 이렇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조각난 모습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를 알려 들지도, 도망치기도, 우리의 침묵을 원하기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다른 주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포함해, 겉으로는 예의 바른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침묵시키려 한다. 이 공동체에는 레즈비언뿐만 아니라 이성애주의의 지적·도덕적 빈곤을 인식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걸어가는 방식, 이 회의가 끝난 한참 뒤까지도 논의를 이어가게 할 집단적 이해를 강화해 나갈 방도를 찾기를 바란다.

스크립스 칼리지 컨퍼런스에서의 발언,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1984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 어슐러 르 귄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1986  (옮긴이 부깽)

 

초기 인류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 온대와 열대 지역에서는, 그 종(種)의 주된 식량이 식물이었을 것이다. 구석기, 신석기, 그리고 선사 시대에 이 지역에서 인간이 먹은 것의 65~80%는 채집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오직 극지방의 북극권에서만 고기가 주식이었다. 매머드 사냥꾼들은 동굴 벽화와 우리의 상상 속을 화려하게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남고 배를 불리기 위해 했던 일은 씨앗, 뿌리, 새싹, 줄기, 잎, 견과, 열매, 과일, 곡식을 모으는 일이었다. 거기에 단백질을 늘리기 위해 벌레와 연체동물을 더하고, 그물이나 올가미로 새, 물고기, 쥐, 토끼, 그리고 다른 엄니 없는 잔챙이들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그리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농업이 발명된 이후 남의 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농민보다 훨씬 덜 일했고, 문명이 발명된 이후 임금 노동자보다도 훨씬 덜 일했다. 보통의 선사시대 사람은 일주일에 약 15시간 정도만 일해도 꽤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15시간만 생계를 위해 일한다면, 다른 일들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서, 아마도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아기도 없고, 만들거나 요리하거나 노래하는 솜씨도 없고, 생각할 만한 흥미로운 거리도 없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매머드 사냥을 나섰을 것이다. 솜씨 좋은 사냥꾼들은 고기 덩어리와 상아 더미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돌아왔고, 그리고 이야기를 가져왔다. 차이를 만든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이야기였다.

내가 들판에서 야생 귀리 낱알 하나를 껍질에서 씨름하듯 빼내고,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를 그렇게 빼냈다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란 어렵다. 그 사이 모기한테 물린 데를 긁었고, 울(Ool)이 웃긴 말을 했고, 우리는 개울가에 가서 물을 마시며 도롱뇽을 한참 구경했다가, 또 다른 귀리밭을 찾았다… 아니, 비교도 안 된다. 견줄 수조차 없다. 내가 거대한 털북숭이 짐승의 옆구리에 창을 깊숙이 꽂아 넣는 동안, 우브(Oob)는 거대한 상아에 꿰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피가 진홍빛 격류처럼 사방으로 솟구쳤으며, 매머드가 쓰러지면서 부브(Boob)를 짓눌러 곤죽으로 만들어버렸고, 나는 그 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을 꿰뚫어 뇌까지 관통하는 화살을 쏘았다는 이야기와는.

그 이야기에는 액션(Action)만 있는 게 아니다. 영웅(Hero)이 있다. 영웅은 강력하다. 어느새 들판에서 귀리를 줍는 남자와 여자, 그들의 아이들,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의 솜씨, 사색하는 이들의 생각, 노래하는 이들의 노래까지 모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영웅의 이야기 속에 징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훗날 『3 기니』로 완성될 책을 구상하던 시절, 자신의 공책에 ‘용어집(Glossary)’이라는 제목을 적어두었다.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용어집에서 heroism(영웅주의)은 ‘botulism(보툴리즘)'((식중독의 한 종류))으로, hero(영웅)는 ‘bottle(병)’로 정의되어 있었다. 영웅을 병으로 보는 것, 그것은 냉철한 재평가다.

이제 나는 제안한다. 병이야말로 영웅이다.

단순히 진이나 와인 병이 아니라, 더 오래된 의미에서의 용기,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다.

담을 그릇이 없다면 음식은 빠져나가 버린다. 귀리처럼 싸우지도 않고 꾀도 부리지 않는 것조차도 말이다. 손에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배에 채워 넣는다. 배가 첫 번째 용기니까. 그러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어떨까. 추운 비가 내릴 때, 몇 줌의 귀리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작은 움(Oom)에게도 조금 주어 조용히 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배 한 번 채울 만큼과 한 줌 이상을 어떻게 집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비 속에서 눅눅한 귀리밭으로 가야 한다. 아기 우우(Oo Oo)를 넣어 두고 양손으로 귀리를 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잎사귀, 박 껍질, 그물, 주머니, 띠 천, 자루, 병, 냄비, 상자, 용기. 담는 것. 받는 것.

가장 처음의 문화적 도구는 아마도 담는 그릇이었을 것이다많은 이론가들은 가장 초기의 문화적 발명이란, 채집한 것을 담아 둘 용기와 그것을 나르는 끈이나 그물 같은 운반 도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피셔는 『여성의 창조』(McGraw-Hill, 1975)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 멋지고 크고 길고 단단한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영화((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유인원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쳤던, 아마 뼈였던 그것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살인을 해냈다는 황홀감에 젖어 으르렁거리며 그것을 하늘로 던졌고, 회전하던 그것은 우주선으로 변하여 우주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세상을 수정시키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멋지고 아름다운 태아가 은하수 주위를 홀로 떠다닌다. 물론 남아이다. 이상하게도 자궁도 없고 어떤 모태도 없이 말이다.

모르겠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우리는 막대기와 창과 칼, 치고 찌르고 후려치는 그 긴 것들에 대해 충분히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담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담는 그릇,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위한 용기(容器).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래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니 분명 생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기보다 앞선 것이었을 것이다. 무기는 늦게 나타난, 사치스럽고 부차적인 도구다. 쓸모 있는 칼과 도끼보다도 오래되었고, 꼭 필요한 내리치기, 갈기, 파기 도구와 나란히, 아니 그보다 먼저였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감자를 캐냈는데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갈 그릇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에너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도구와 함께,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으로 가져오는 도구를 만들었다. 나한테는 말이 된다. 나는 피셔가 ‘운반 가방 이론’이라고 부르는 인간 진화 이론의 지지자다.

이 이론은 이론 속에 넓게 깔린 모호한 영역을 설명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론들로 가득한 영역을 피해 간다. (그 터무니없는 영역은 대개 호랑이와 여우, 그리고 다른 강한 영역성을 지닌 포유류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이론은 나를, 개인적으로, 인간 문화 안에 놓이게 해주었다. 그전에는 결코 그런 뿌리 내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문화가 길고 단단한 물건을 사용하여 찌르고, 내리치고, 죽이는 데서 비롯되고 그 위에 정교하게 구축된 것이라고 설명될 때, 나는 그 문화에 특별히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참여하고 싶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릴리언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문명의 결핍이라고 오해한 것은, 여성의 ‘문명에 대한 충성심’의 결핍이다.”) 그 이론가들이 말하던 사회, 문명은 분명 그들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완전한 인간. 내리치고, 찌르고, 쑤시고, 죽이는 인간. 나도 인간이 되고 싶어서, 나 역시 인간이라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조건이라면, 무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죽이는 것이라면, 나는 인간으로서 심각하게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그렇지, 그들은 말했다. 네 정체는 여자다. 어쩌면 인간(human)조차 아닐지 모른다. 분명 결함이 있다. 이제 조용히 해라. 우리가 계속 ‘영웅으로서의 인간(Man) 상승사’를 이야기할 테니.

그러시든가, 나는 말한다. 오트밭으로 걸어가면서. 슬링엔 아기 우우(Oo Oo)를 넣고, 작은 움(Oom)은 바구니를 들고 있다. 당신들은 계속 이야기하면 된다. 맘모스가 부브(Boob) 위로 쓰러졌던 이야기, 카인이 아벨을 쓰러뜨린 이야기,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이야기, 불타는 젤리가 마을 사람들 위로 떨어진 이야기((드레스덴 폭격)), 미사일이 악의 제국에 떨어질 이야기, 그리고 ‘인간(Man) 상승’((the Ascent of Man,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다른 모든 단계들을.

만약 무언가를 담는 일이 인간적인 일이라면, 그것이 유용해서든, 먹을 수 있어서든, 아름다워서든 원하는 것을 가방이나 바구니, 말아 올린 나무껍질이나 잎, 혹은 자기 머리카락으로 짠 그물이나 아무튼 무엇이든 간에 넣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 그리고 그 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더 큰 주머니나 가방,  사람들을 담는 그릇인 셈인데, 그렇게 담아 온 것을 나중에 꺼내 먹거나 나누거나 더 단단한 그릇에 넣어 겨울을 위해 저장하거나 약주머니나 제단이나 박물관,  신성한 것을 담는 장소에 넣어두고, 다음 날에도 아마 거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 만약 그것이 인간적인 일이고 그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인간인 것이다. 온전히, 자유롭게, 기꺼이. 그렇게 처음으로.
우선 분명히 해두자. 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싸움을 피하는 인간도 아니다. 나는 늙어가는, 화가 난 여자이고, 손에 든 핸드백을 세차게 휘두르며 불량배들을 쫓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나 다른 누구도 그런 일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들판에서 귀리를 계속 모으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빌어먹을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차이는 이야기가 만든다. 이야기가 내 인간성을 내게서 숨겼다. 맘모스 사냥꾼들이 들려준 그 이야기, 내리치고, 쑤시고, 강간하고, 살인하는 이야기. 영웅 이야기. 보툴리즘이라는 멋지고도 치명적인 이야기. 죽이는 이야기.((죽이는 이야기(the killer story)는 ‘멋진 이야기’(죽인다!)와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닌다.))
때로는 그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더는 전해지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이 거친 귀리밭, 이 이방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몇몇은, 옛 이야기가 끝날 때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함께 끝장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긴박감을 안고,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와 말을 찾아 나선다.
그 이야기는 낯설다. 죽이는 이야기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지나친 말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온갖 말과 방식으로 삶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창조와 변형의 신화, 트릭스터 이야기, 민담, 농담, 소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인 이야기다. 물론 영웅은 자주 그것을 장악해왔다. 그게 그의 제국적 본성이자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장악하고 거느리며, 그것을 죽이려는 통제 불가능한 충동을 통제하기 위해 엄한 선언과 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자신의 대변자인 입법자들을 통해 이렇게 명령해왔다. 첫째, 서사의 올바른 형식은 화살이나 창의 형식이어야 하며, 여기서 시작해 저기로 곧장 가서 퍽! 하고 목표를 맞히는 것이다(목표는 쓰러진다). 둘째, 소설을 포함한 모든 서사의 중심 관심사는 갈등이어야 한다. 셋째, 그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소설의 자연스럽고 올바르고 알맞은 형식은 자루나 가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고,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약꾸러미와 같다. 그것은 어떤 것들을 서로, 그리고 우리와 강력하고도 고유한 관계 속에 담아두는 것이다.

소설 속 요소들 간의 관계 중 하나는 갈등일 수 있다. 그러나 서사를 갈등으로 환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나는 “이야기는 전투로 보아야 한다”고 쓰고, 전략과 공격, 승리 따위를 늘어놓는 글쓰기 지침서를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운반 가방/배/상자/집/약꾸러미로 생각해본다면, 그 안의 갈등, 경쟁, 긴장, 투쟁 등은 전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 자체는 갈등도, 조화도 아니다. 그 목적은 해결이나 정지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영웅은 이 가방 안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무대나 받침대, 혹은 정상에 서 있어야 한다. 그를 가방에 넣어두면 그는 토끼처럼, 감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SF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이 크고 무거운 자루를 들고 왔다. 내 운반 가방은 겁쟁이들과 덜렁이들, 겨자씨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알갱이들, 그리고 공들여 풀어보면 그 속에 파란 조약돌 하나와 다른 세계의 시간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작동하는 크로노미터 하나와 생쥐의 두개골이 들어 있는 정교하게 짜여 있는 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끝나지 않는 시작들, 입문들, 상실들, 변형과 번역들로 가득했고, 갈등보다 훨씬 많은 장난과 속임수, 함정과 망상보다 훨씬 적은 승리가 있었다. 멈춰버리는 우주선들, 실패하는 임무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생 귀리 껍질을 벗겨내는 일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로 만들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 쓰기가 쉽다고 누가 그랬는가?
만약 SF가 현대 기술의 신화라면, 그 신화는 비극적이다. ‘기술’ 또는 ‘현대 과학’(이 단어들이 흔히 쓰이듯, 검토되지 않은 약식 표현으로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과 첨단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은 영웅적 과업이다. 헤라클레스적이며 프로메테우스적이고, 승리로 구상된 것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된다. 이 신화를 구현하는 허구는 (인간이 지구, 우주, 외계 생명, 죽음, 미래 등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야기일 것이고, 또한 (과거든 현재든 종말과 홀로코스트를 그리는) 비극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술 영웅주의의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이라는-(살상의)-화살 같은 방식을 피하고 기술과 과학을 우선적으로 지배의 무기가 아니라 문화적 운반 가방으로 재정의한다면, 그 부수적 효과 중 하나는 SF를 훨씬 덜 경직되고 폭넓은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프로메테우스적일 필요도, 종말론적일 필요도 없으며, 사실 신화적 장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의 한 장르로 볼 수 있다.
이건 기묘한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도 기묘하니까.

제대로 이해된 SF는, 아무리 웃기더라도 모든 진지한 소설처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과 느끼는 감정, 그리고 사람들이 이 거대한 자루, 우주의 배, 될 것들의 자궁이자 지나간 것들의 무덤,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의 모든 것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묘사하려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인간(Man)을 그가 있어야 할 곳, 사물들의 질서 속 제자리 안에 두기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다. 들판에서 야생 귀리를 넉넉히 거두고 또 뿌릴 시간도 있고, 작은 움(Oom)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울(Ool)의 농담을 듣고, 도롱뇽을 지켜볼 시간도 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모아야 할 씨앗이 있고, 별들의 가방에는 여전히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