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안녕하세요, 오늘! 토요일 홍대 아우라에서 작은 대안무역이 열립니다. 어제 자히드 가족과 마을공동체에서 옷을 보냈는데, 이번엔 큰 사이즈의 옷도 많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옷들 중 최고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오늘 아우라에서 새로운 예쁜 옷들과 액세서리- 카드, 팔찌, 목걸이, 귀걸이, 배지 등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엔 없지만 나시와 반팔도 있어요 ~







*옷감에 자수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

*자수를 놓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악기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

*자히드
그리고 지난 반전집회 때부터 네팔 라디카 동지의 비즈공예품을 함께 판매하고 있어요. 라디카 동지는 작년 농성 중에 30일간의 단식으로 지금까지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지속적으로 못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집에서 비즈공예품을 만들어 그 수익금으로 병원비와 생계유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라디카,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 주세요.

*7월 3일 여성행진 때 라디카 동지
홍대 아우라 – 산울림 소극장 맞은편
Party Benefit & Jam (four!)
cover charge / 입장료 10,000 won
2005.7.9 / Saturday July 9, 2005 8 PM – 11:30 PM
{performing live}
PAUNA (modern rock)
Elephant 808 (electronica driven folk)
ANOKHA (high energy rock beat fusion)
Stop Crackdown (rock)_이주노동자밴드
일요일 평택평화행진 때 비가 오면 작은 대안무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카테고리:] Monologue
달리다
달린다. 희미하게 가로등만이 멀찍이 섰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길을 덮었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온통 습한 비린내가 폐를 진동한다. 숨이 급하게 가빠오고 팔이 올라가질 않는다. 간혹 지나는 이들의 눈빛이 성가셔도 멈추지 않는다. 조금만조금만 하면서 예까지 왔다.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정수리부터 송글거리던 땀이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다. 그것이 이마를 따라 눈에 고였을 때 눈물이 났다. 그렇게 아픈 날들은 아무리 쥐어짜도 안 나오던 것이 고작 땀 한 방울을 못 이기는 게 괜히 억울했다. 이참에 막 울어볼까 싶어서 멈춰 선다. 어두웠고, 여기는 지나는 이들도 없고, 한참 멀리 낚시꾼들만 졸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만히 섰는데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 울음으로 강물이 흔들리고 먼데서 빛들도 따라 흔들린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다시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집을 한디위 지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온 몸의 맥이 두근거리며 요동칠 때 모든 게 아팠다. 어느 한 구석 남김없이 아팠다. 한참 온 몸을 들썩였다.
끔찍하게 정상적인 무료시사회

제목 : 끔찍하게 정상적인 (셀레스타 데이비스Celesta Davis 감독, 미국, 76분)
일시 : 2005년7월8일(금)
장소 : 광화문 미디액트(5호선 광화문역 5번출구 혹은 1,2호선 시청역 4번출구 프레스센터 방향 5분거리)
주최 : 10회 여성영화관객상기획단
주관 : (사)여성문화예술기획
더 자세한 내용은 여성주의영화 무료 시사회를 참고하세요. 아, 놀이방 운영은 안한다고 합니다.
지난 여성영화제에서 표를 구할 수 없어서 못 봤던 영화입니다. 이번엔 일찍부터 줄서서 꼭 볼 계획입니다. 오는 금요일 7시 30분 상영이고, 15분 전부터 표를 나눠준다고 하네요.
감독과 작품에 대한 소개가 궁금하시면 지난 여성영화제 홈페이지를! 보다 더 궁금하시면 여기를!
남성 페미니스트
지난 한 주 mi-ring은 충분히 떠들썩하다. 이런 들썩임은 가벼운 얘기부터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 진중한 고민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가벼운’이라는 수사는 경망스럽거나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분주하고 좀 더 일상적인 것을 말한다. 챔피언을 쓰러뜨리는 것이 한방의 펀치가 아니라 무수한 잽이듯이 견고한 중심을 흔드는 것은 자잘한 주변의 분주함일 것이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우리의 ‘가벼운’ 일상 말이다.(그를 핑계 삼아 나는 당신들에게 잔뜩 귀 기울이고 있다.) 나는 mi-ring에 ‘쉽게’ 덜컥 가입한 쪽인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가입규약이 내 ‘입장’과 그닥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장이란 단순히 하나의 시각을 갖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당신의 젠더가 무엇이든 간에 그 고민이 삶 속에 지속적으로 녹아내린다면 어떤 가능성이든지 개연성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고, 하나의 시선을 넘어서 세계관이자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페미니즘’들’은 그런 것이다.
“나는 부깽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부깽은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의 요건으로서 생물학적 성이 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젠더가 요구된다고 본다. 이것은 ‘부깽은 남성이다’에 괄호를 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괄호 안의 ‘남성’은 남성/여성이라는 권력 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극단적 이분법으로만 읽혔을 뿐이다. 괄호 치기는 고정된 성별 정체성 바깥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읽어내고 권력화된 이분법과 투쟁하는 것이다. 이 권력에 대한 투쟁은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차이’는 더는 ‘~과 다름으로써’ 열등한 것, 부정적이고 분할적인 것이 아니라, ‘~과 다름으로써’ 지금과 다른 대안적 가치들을 생산할 수 있는 한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를 연다.
“나는 부깽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부깽은 페미니스트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이 ‘남성’은 새로운 성별로써 ‘다른 남성’ 또는 ‘다른 여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운명을 벗어난 ‘탈성별화된 인간’으로서 주체이다.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세계에서 여성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변화된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행동’을 통해 새롭게 표상된 세계 안에서 ‘차이’를 긍정하고 모든 상징적 소수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격과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모든 주변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발화의 사회적 지점을 떠나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 페미니즘’들’이 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하딩의 말처럼 필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연대이다.
여성주의 웹링 mi-ring
저도 잘 안 오는 블로그지만 refeed를 통해서는 많은 분의 글을 읽고 있답니다. 그러다 mi-ring에 관한 글이 제 rss를 기준으로 폭주하더군요. : ) 이게 뭘까 해서 들어가 봤습니다. 그리고 링크를 따라 글을 읽으면서 여성주의자이며 소수자운동에 지지를 표한다면 가입하라 길래, 가입했습니다. 네, 다시 읽어봐도 글을 안 쓰는 사람에 대한 혹은 어쩌다 쓰는 사람에 대한 제제가 없어서 우선 안도부터 합니다.
mi-ring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re-presentation과 Blooming Town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mi-ring”은 minority, my의 뜻을 담은 “mi”와 web-ring의 “ring”을 결합시킨 것으로 여성주의와 소수자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의 웹링입니다. mi-ring으로 엮인 많은 분의 블로그가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담고 있어서 더 설렙니다. 그분들의 사생활이 궁금하다기 보다는 여성운동과 소수자 운동이 담론으로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어떻게 배어 나오는지 그것들이 이렇게 고리를 타고 흐르면서 어떤 힘을 발휘할지가 기대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들의 생활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하기를 내 활동이 그들을 자극하기를 모두가 온라인 밖에서는 들썩이기를 바랍니다. 네, mi-ring이 생각처럼 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꿈쩍도 안 하는 것들에 지쳤을 때 혼자 위안이라도 받아보자는 것이죠.
이 링이 점점 커져서 지구만 해졌으면 좋겠네요. mi(racle)-ring이 되면 멋지겠어요. 끈질기게 야금야금 세상을 바꾸는 기적 같은 고리가 되기를요. :)
스스럽다
봄이 언제 다녀갔나 싶었을 무렵일까 참세상에서 ‘이꽃맘’이라는 이름의 기자를 봤다. 워낙 열정적으로 글을 쓰는 분이라 자주 이름을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꽃망울’이라는 이름의 처자인데 3대 만에 집안에 여자가 태어나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란다. 고운 이름이고 이름만큼 사람도 고왔지 라고 기억해 본다. 이름이 생각 속에서 떠오르거나 혹은 기억들이 아무렇지 않게 아는 척하는 것과는 다르게 요전에 그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아무렇지 않지 않더라. ‘아무렇지 않다’는 뭔가 풀어야 하는 실타래를 가진 관계처럼 보이니 그보다는 ‘스스러웠다’ 정도가 맞겠다. 그날 ‘어 누구지’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인사를 건 내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난 후 그 앞에 서서 아는 척하기가 껄끄러웠고, 그로 좀 전까지 익숙하던 공간이 갑자기 불편해 지는 것이다. 이런, 되짚어보면 불편해할 사이라기보다는 우연한 만남을 두고 서로 호들갑 떨며 반가워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낯모르는 얼굴들이 관계를 맺어가며 스스러운 마음을 떨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다시 스스러워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하튼 그 자연스러움을 탓하자는 것은 아니고 늦었지만 안부를 묻는 것이다. 타이밍은 아무 데서나 중요하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꽤 오래전인 데 5,6년 전일까, 그를 부르는 호칭은 ‘꽃’을 빼고 망울이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나는 동생 손전화에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동생이 군대 가 있는 사이에 잠시 그의 손전화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이 휴가를 나왔을 때는 손전화를 돌려주곤 했다. 그 즈음이었을 게다. 망울이에게서 온 전화를 동생이 받았다.
동생이 “네.. 여보세요?”하는데 “망울이~”라는 말만 들렸단다. 동생이 칼진 억양으로 “네?”라고 반문했더니 다시 들려온 소리는 역시 “망울이~~”였다. 슬슬 짜증이 난 동생은 신경질적으로 “네 뭐요?”라고 물었단다. 그래도 들리는 소리는 “망~~우~~~~리~~~~~~~”였단다. 동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여기는 신길동”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단다. 그날 동생은 망우리에서 전화 왔다고 전하더라. 그 밤 많이 웃었는데.
생뚱맞게 ‘이꽃맘 기자’ 이름에서부터 많이 왔다. 그에게도 내게도 시간이 흘렀고 다른 세월을 쌓았을 게다. 거기 어디쯤에서 이제는 스스러워진 ‘이꽃망울’을 기억해본다.
세 가지 일
방을 깨끗이 치웠다. 이번엔 모든 재떨이 대용품들도 없애버렸다.
머리를 빡빡 깎았다. 빡빡머리가 잘 안 어울리는 건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더위를 이유로 깎아봤다. ‘빡빡머리……’ 중얼거리는데 누구는 출소한 사람 같다는 말을 누구는 레옹 머리 같다는 말을 한다. 레옹? 호호 듣고 보니 괜찮네.
신대철 산문집도 있더라. 『나무 위의 동네』라고 89년에 청아에서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보게 됐는데, 쨍하고 해 뜨면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샀다.
며칠 동안 가장 큰 변화는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다.
방에서 담배 냄새 나는 게 지긋지긋하기도 했고, 갚아야 할 할부금을 마땅히 쪼갤 곳도 없고 해서. 한 달에 담뱃값만 10만 원이 나갔으니, 이제부턴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다.
커피는 볶은 지 하루가 조금 지난 과테말라 커피가 최고다. 이름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고대 앞의 거기가 정말 맛있다.
작은 대안무역

작은 대안무역은 강제추방 이주노동자와 지속적으로 연대를 모색하던 중 시작하게 됐다. 그간의 사정이 여러 것이 겹치나 활동을 지속하면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내가 읊조리던 동력은 생활에서 발견해 내면 그뿐이다.
기존에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은 후원사업의 하나로 배지를 팔거나 모금이 주 활동이었다. 주로 집회에서 한정된 공간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알차게 진행됐다. 그런데 이 모금을 지속한다는 것은 여러 이유로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안무역 얘기는 이전부터 나왔지만 그 사업의 진행 중에 생기는 책임을 떠맡을 주체가 명확하지 않았고, 모임의 역량 밖이라고 생각하고는 번번이 미뤄지곤 했다. 그러던 것이 죽이되 든 밥이되 든 해보자는 심정으로 노동절부터 시작하게 됐다.
4 30. 여의도 노동절 전야제
5 01. 광화문 노동절 집회
5 08. 종로 부처님오신날 행사
5 14. 대학로 평화를 위한 난장
5 17. 서강대 문과 학생회 이주노동자 사업과 연대
6 02. 숭실대 열사추모제 이주노동자 사업과 연대
무모했는지 모르지만 시작 이후 역량만큼 꾸준히 만들어 가는 셈이다.
온라인에서도 맞물려 작업을 진행했는데 얼마 전에 ‘작은 대안무역’ 사이트가 완성됐다. 도착한 작품들을 올리는 일이 남긴 했는데, 무거운 짐을 한껏 덜고 갈 수 있으니 진척이 빨라 질 것이다.
아래는 작은 대안 무역을 소개하는 날림 글이다.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끝 무렵까지 389일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있었습니다. 1년이 넘는 투쟁을 해왔던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접었을 때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몸을 뉘일 방 한 칸도 없었고, 당장 생활을 이어나갈 돈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호의적인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인 채 한국 사회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외려 한국정부는 고용허가제 시행 성과를 내기 위해 강력단속기간을 정하고 무자비한 단속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단속과정 중 어디에도 인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일하는 공장에 들이치는 것은 기본이고 보행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여권을 검사하는 게 아니라 우선 잡아간 후 안에서 검사하는 가하면 심지어는 가정집에 창문을 깨고 들어가 단속을 벌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단속 속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고국으로 쫓겨 가게 됐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귀향은 우리의 생각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만하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들의 삶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추방 이주노동자들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불의에 맞서 투쟁했던 대가를 고향에서 치르는 중입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 어디에선가 삶이 계속되듯이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도 계속 됩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투쟁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방 이주노동자들과 끝까지 연대할 방법을 모색했고, 그 일환으로 “작은 대안무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생각입니다.
‘작은 대안무역’은 크게 세 가지 의의를 갖습니다.
먼저, 네팔과 방글라데시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옷을 만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의를 설명하고 주문을 넣게 되면 한 마을의 여성들이 집에 모여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로서 여성들의 연대를 고취시킵니다.
둘째,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나 가족들과 한국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연대를 촉진하게 됩니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된 가족들 사이를 연결하고,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대화를 속개하게 될 것입니다.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문제에 대해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연대하며 투쟁하고, 한국의 이주노동자 투쟁에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들과 추방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한국 내의 이주노동자들과 한국 사람들 간에 삶의 공통적인 문제들을 공유하면서 연대를 튼튼하게 짜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대안무역’을 통해 네팔과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삶을 알리고,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알리고, 또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알리는 소식을 함께 실어 나를 생각입니다. 이 ‘작은 대안무역’에는 계약서만 서로 주고받고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투쟁소식과 삶의 다양한 억압들에 대한 대안들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작은 대안무역’에서 다루는 작품들의 최종소비자는 작품들과 함께 이 모든 소식들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사막 족속
강변에는 하천이 없다.
1911년 이래 강변의 하천은 말라버렸다. 1980년 여름, 나는 비로소
강변에 나타난다. 하천이 마른 지 69년째.
나는 강변이 사막으로 향하는 입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급속히 사막족속이라는 정령이 활기차게
나오는 것은 아닐까, 사막을 향해.
강변, 강변이라 주문을 외우고, 급속히 사막족속, 사랑해야 할 저 건조한 모래알로 된 정령들이 나간다, 걸어간다, 날아간다. 사막을 향해.
어디에 있어도 내 생각은 사막, 모래가 있는 쪽을 향한다. 건조한 토지,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태양마저 바싹 말라 목구멍이 타버린 토지를 향해,
내 안에 있는 사막족속들은 급속히 활기에 차, 강변으로 한 방울 물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선 쾌활하게 휘파람을 불며 춤을 추고
맨발로 사막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나의 사막족속인 정령은 과감하다. 과감한 전사이기 때문에 사막을 향해, 일단 모래를 찾아내어, 그것을 향해 질주한다. 그것이 왜 그런지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광기도 아니고 착오도 아니다. 그저 본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안쪽보다는 본래의 보금자리를 향해, 야수처럼 또 새나 물고기처럼 되돌아간다. 그들 사막족속인 정령이 일제히 날개 치며 달리는 소리가 뜨거운 오후에 들려온다.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보이는 시보다 커다란 훨씬 넓고 커다란 하천인 탓에 하천의 모습을 한 환영의 힘인 탓에.
내 안에서 그가 무엇을 꾀하고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 건지 알지 못하면서, 아아 강변에서 나는 그들의 참으로 아름다운 기습을 보았다. 점차 내 안보다 활기를 띠고 밖으로 뛰어나와 고대 아즈텍까지 달려갈 것처럼 그들은 희망에 가득차 있던 것이다. 완전히 진기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뜨겁게 오싹하는 음악과 같은 생리적 쾌감을 부추기는 듯한, 신성하면서도 추잡한 바람을 품고 누군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막족속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이따금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시를 쥐어짜 죽이는 것이다.
– 시라이시 가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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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다. 이 시를 본 것도 시라이시 가즈코를 익혀둔 것도. 며칠 시간은 사납게 간다. 새벽 공기로 겨울은 벌써 저만치 지났다는 것을 잠 속에서 알았다. 잠결에 이불을 걷어내도 추워 움츠리지도 잠을 깨지도 않고 내내 꿈은 침대 언저리를 돈다. 오른 팔뚝에 머리를 얹고 왼쪽 허벅지를 오른 무릎 위에 올리고 몸을 살짝 비틀고 계속 잠을 청한다. 읍읍한 머리의 무게보다 아픈 것은 부재하는 것들의 자국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읊조린다. operation a coeur ouvert, operation a coeur ouvert 그리고 나면 심장이 열린 듯 그 떨림이 정수리 맥까지 차오른다. 울고 있다. 엉엉하고 소리 내어야 하는데 울음은 성대를 흔들고는 입안에서 사라진다. 숨만 가빠올 뿐이다. 그 징그러운 날들의 상흔이 몸 어느 구석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날이면 힘들어도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안도해야 한다. 꿈이라고 꿈일 뿐이라고, 냉장고를 열고 물통을 입에 대고는 벌컥거린다. 물이 넘쳐 가슴팍을 적셔도 기억만큼 왈칵 차갑지 않다. ‘그것은 광기도 아니고 착오도 아니다. 그저 본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온다. 더 크게 말하기 시작한다. Et qui sait quels êtres vivants Seront tirés de ces abîmes Avec des univers entiers …….
토너 아저씨
토너 아저씨를 뵙고 왔다. 우리는 흔히 아저씨를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네팔 분 중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기도 하거니와 술과 담배를 안 하시기 때문이다. 글쎄 그 이유 때문만 인가? 농성 해단식 이후에 교회에서 지내신다지만 예배드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술은 농성 중에도 어쩌다 슬쩍 하시기도 했으니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그러나 넌지시 되돌아보면 389일의 텐트생활이면 지칠 만도 한데 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추스르고 일정 정도 긴장을 유지하며 생활하던 모습이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목사님’이라는 별명은 잘 어울린다. 목사님과는 같이 신문을 읽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신문을 덮고 하시는 말씀이 농성 초창기에 ‘철의 노동자’를 부를 때 ‘민주노총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라고 부르곤 했단다. 언제나 ‘민주노총’의 깃발이 앞에서 펄럭였기 때문에 철썩 같이 자신이 생각한 가사를 믿었고 그처럼 얼마 동안은 민주노총에 대한 신뢰도 대단했었다. ‘했었다’는 비단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이주동지의 현재이다.
농성 이후 아저씨는 며칠을 쉬고 일자리를 찾았는데, 같이 일하는 분들을 보니 월급을 못 받고 있어서 봉사한 셈치고 그냥 나왔었다. 그리고 다시 일자리를 찾았는데, 이번에도 3개월 정도의 월급이 밀려서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송탄의 한 공장 얘기를 하는데 주로 필리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월급이 계속 밀려서 그 노동자들이 단체로 사장을 찾아가 월급 얘기를 했단다. 사장이 계속 미루기만 해서 하루 날 잡고 단체로 공장에 나가지 않았더니 그 사장 놈이 컨테이너(이주분들은 공장의 한편에 마련해 놓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곤 한다.)전기를 다 끊어버려서 그 추운 날 오도 가도 못하고 밖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는 게다. 한겨울에 냉동실에 가둬 둬야 정신을 차릴 놈이다.
일 때문에 오래 뵙지는 못하고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뵙기로 했다. 다음에는 인터뷰를 약속했는데, 농성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듣기로 했다. 농성 해단식 이후 벌써 4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농성장 차원에서도 이주지부에서도 어디서도 이렇다 할 평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원래는 연대단위로서의 농성평가 같은 것을 쓰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직접 이주분들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 싶어서 방향을 틀었다. 바깥에 알리는 그럴싸하고 짠한 평가 말고 실제로 어떤 헤게모니가 작용했던 가와, 그 안에서의 한국 활동가나 연대단위, 혹은 이주 동지들끼리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이미 라디카(네팔)와 마숨(방글라데시)을 인터뷰했는데 녹취 푸는 게 녹록지 않다. 목사님과 헤미니(네팔) 마붑(방글라데시)과 만나기로 했고, 현재 수도권 노조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과도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누구보다 소하나(인도네시아)와 얘기하고 싶다. 라디카와도 얘기를 했지만 여성이 가진 내부적 갈등은 훨씬 심했을 것이다. 농성장에 여성 공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감내해야 할 것들은 외부와의 싸움 못지않게, 어쩌면 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고 강한 억압이었는지 말하고 싶다. 이리 주절주절 계획을 풀어보는 것은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만 하다 말게 아니라 꼭 해야지 싶어서 일정 강제하는 것이다.
배지 구경하세요~

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에서 이번에 찍을 배지와 이전 배지들입니다.
1, 5는 새로 찍을 배지이고, 4번은 가장 단명한 배지이기에 아마도 귀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 7은 명동성당 농성단 대표였던 샤말타파입니다. 작년 2월에 출입국에 잡히고 4월에 강제출국 당했답니다. 이미 나와 있는 배지의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앞으로 찍을 계획이 없습니다. 곧 귀해지겠죠? ;; 3번과 6번이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3번은 그물총을 쏘는 출립국관리소에게 똥침을 놓는 모습이고, 6번은 여성이주노동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이주노동자’가 더해지면 이 사회에선 없는 존재처럼 돼버리곤 합니다.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죠.
3개에 2천원입니다. 배달은 안 되고 집회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대량구입 하신다면 배송도 고려를 ;;; 물론 더 비싸게 주고 사는 것은 환영입니다. 수익금은 이주노동자 후원을 위해 쓰입니다.
이쁜 걸 찜해두시고, 귀한 게 뭘까 생각해보시고, 선택하시는 거예요.
조만간은 19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4시부터 6시까지 열리는 평화를위한난장과
20일 역시 대학로에서 열리는 320반전집회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마구마구 사세요 ~
MB아저씨 면회
b님은 3.20 관련해서 얼마 전 한겨레에서 본 기사를 얘기한다. “스크린 앞에서 죽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라는 요지의 소말리아 관련 기사였나 보다. 어떤 글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찾을 수 없다. 전쟁도 일상도 어느 하나가 부각되면 그와 동질의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이라는 레토릭으로 감춰진다. 그러나 어딘가에 중심을 실어 주는 것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의 소외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데 있다. 어떤 현상이나 세계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발견이나 관찰에 의해서만 이뤄 어질 수 없다. 발견과 관찰로 이루어진 세계는 그것이 유토피아든 척박한 디스토피아든 판타지일 뿐이다. 그 세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세계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안다고 믿던’ 세계와 비교해 볼 일이다.
오늘 MB아저씨 면회를 다녀왔다. MB아저씨는 389일간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했던 네팔 노동자다. 출입국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게 금요일이다. 토요일 일요일은 면회가 안 돼서 오늘에야 가게 됐는데 오늘 못 갔으면 크게 서운했을 것이다. 어디로 이송됐는지를 몰라서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아침에야 ‘목동출입국관리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은 아무도 오지 않았었고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만이 다녀갔단다. 섭섭하고 그보다 야속했을 것이다. 그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투쟁하던 사람이다. 이주지부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심을 가졌어야 할 일이다. 자히드의 눈물과 MB아저씨의 눈물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 눈물을 구분 짖는 것이야 말로 형평의 문제이다.
라쥬형과 통화를 하는데, 이주지부의 누군가가 아침에 ‘화성보호소’에 다녀왔단다. 그 사람에게 나는 면회가 끝난 직후 전화를 했었다. ‘MB동지는 목동에 있고 내일 추방이라 오늘 말고는 면회를 할 수 없다’, 그는 “화성에 있는 게 아니라 목동에 있나요?”라고 물었다. 다녀왔으면 알 일이다. 토너아저씨와도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는다. 나는 후딱 ‘그냥 잘 지내요’라고 답한다.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겠다. 그 인사에 정확히 답하고 싶다. 늦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