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홍대 공중캠프에서 작은대안무역이 열려요. 방글라데시에서 새로 보내온 옷들과 이쁜 액세서리 등등을 만 날 수 있답니다. 갑자기 한 사진 작업이라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예뻐요. 옷 마다 디자이너와 만든 이가 표시 돼있고, 하나하나 직접 염색하고 손바느질한 작품들이에요. 작은대안무역의 옷들도 구경하시고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만들어 가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방송 1주년도 축하해주세요.
이주노동자의 방송 1주년 파티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1주년 기념파티가 있습니다.
약도를 보면 대강 어디쯤이라 짐작하시겠지만 홍대전철역보다는 신촌전철역에서 걸어오시는 게 조금 더 빠릅니다. 7011, 271 버스를 이용하신다면 산울림 소극장 앞에서 내리면 됩니다. 뭐시냐 고기 집들 쭉 늘어진 기찻길 있죠? 바로 그 라인입니다. 드.디.어. 작은대안무역도 오랜 겨울 방학을 끝내고 기지개를 켭니다. 바깥 활동이 없는 동안 서로 많은 고민을 나눴는데 그 고민들이 활동 속에서 확장되고 변화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노동절(서울 시청 앞)과 전야제(없나요?)에서도 봐요~!


아노아르 석방
오늘 몇몇이 청주 보호소 아노아르 면회를 가기로 했다가 사정상 다음으로 미뤘었다. 그러던 차에 아노아르가 풀려난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목동으로 갔다. 지난해 5월 14일 강제연행 되고나서 지금까지 보호소 감금으로 건강이 심하게 나빠져 보호해제 된 것이다. 그가 있던 청주외국인보호소는 청주교도소의 한 부분이다. 말이 보호소이지 실제로 감옥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출입국 관리법은 구금된 미등록 이주자들의 보호소 감금을 20일을 넘지 않게끔 하고 있으나 아노아르가 구금된 기간은 그 20일의 17배에 달한다. 이주노조를 죽이기 위한 표적단속이었다는 점과 연행 당시의 출입국의 폭행 등등을 두고 행정소송을 진행할 때부터 보호해제로 나왔어야 함에도 340여 일을 불법적으로 감금한 것은 한 개인에 대한 명백한 인권유린이다. 아노아르는 그 1년 가까운 보호소 생활로 당뇨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로 기억장애까지 얻은 상태이다.
바깥에서 다시 아노아르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다. 어서 건강이 회복되고 이 투쟁을 이어갔으면 그리고 악착같이 이기기를 바란다.

출입국에 꽃다발을 들고 올 날이 생길 줄이야. 비루님과 함께 준비한 꽃다발이다. 아노아르를 기다리는 중에 연대단위 몇몇 남정네들이 ‘꽃다발은 여자가 줘야지’라는 발언이나 ‘기쁨조’운운하는 꼴을 보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연대하되 저 대책 없는 남정네들끼리의 연대는 끊으면서 가야 하는 것은 이판저판 다를 게 없다.




연대단위와 출입국 간에 절차문제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500만 원의 보호해제 보험금을 내고 드디어 아노아르 이주노조 위원장이 나왔다.

비루님께서 만든 피켓, 아름다워라~ ‘보호해제 흥, 숨어 버릴 거야’라고 했다가 약하다는 말에 ‘투쟁할 거야’로 바꿨다.


이 모습을 보면서 사실은 조금 웃었는데, 연대단위와 출입국 간의 실랑이라는 것이 ‘뭐 그리 절차를 일일이 따지고 챙기느냐는 것’이었는데 이런 절차가 하나 더 생길 줄이야 🙂
선유도
언젠가는 잎이 무성해지고, 아이도 훌쩍 자라겠지.
슬픈 기쁜 생일
4
이 꿈에서 저 꿈으로
마음은 옷을 벗고
늙은 살 늙은 말(馬)
아아 병이 올 것 같아
기어갈 힘이 없어
따뜻한 무덤 속에 들어가
감기가 들면 감기약을 먹고
누군가 죽으면 부의금을 내리라
5
아무도 없다
누구나 가 버린다
그리고 참으로 알 수 없는 날에 나는
또 다시 치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고,
가리라
저 앞 허공에 빛나는 칼날
내 눈물의 단두대를 향하여
아픔이 아픔을 몰아내고
죽음으로 죽음을 벨 때까지
마침내 뿜어오르는 내 피가
너희의 잔에 행복한 포도주로 넘치고
그때 보아라 세상의 어머니 아버지여
내가 내 뿌리로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것을
나의 불모가 너희의 영원한 풍요가 되는 것을
그리고 마음껏 기쁘게 마셔라
오늘의 나의 피, 내일의 너희의 포도주를
기침을 하며 최승자를 읽는다. 기침을 할 때마다 단전에서부터 양 어깨까지 가슴팍 전체가 아프다. 겨우 몇 행을 읽고 나면 벌어진 생살을 굵은 소금으로 절인 뒤 쥐어짜는 것 같은 기침이 난다. 마음으로 견디지 못하는 것들은 몸으로 견뎌야 하는 법인데, 밑천인 몸을 너무 번 놓고 말았다. 며칠 아프면서 내 몸부터 사랑하자고 그러면서 살자고 내내 벼기면서도 내 몸을 사랑하자는 게 퍽 설다.
기침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동생 부탁으로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 달라는데 점원이 “신분증 보여 주세요.”라고 말한다. 마스크를 내렸다. 점원이 “죄송합니다.”란다. 덩달아 나도 “제가 죄송해요.”라고 말한다. 아씨 죄송할 게 뭐람.
19일 출입국 앞 집회
동계현장 활동투쟁의 마지막 날 출입국 앞 집회에 다녀왔어요. 이주노조를 비롯한 전철연 전해투 학습지노조 성진애드컴 등등 많은 연대단위 분들이 모였고,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그보다 늦게 집회가 시작돼서 주욱 함께 할 수 있었네요.
오늘 집회 중에 몇 가지 당황하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출입국 관리소장의 차가 나가겠다고 집회대열의 한쪽 길을 비키라는 데서 시작됐어요. 정당하게 집회신고를 한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출입국소장차가 나가겠다고 비키라니 기가 찰 일이죠. 출입국 차가 나가기 전에는 차가 들락거릴 때 길을 터주곤 했었어요. 그런데 출입국 소장의 뒤에 있던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시하고 집회를 진행하는데, 뒤차에 있던 어느 아저씨가 나오더니 나가야겠다고 비켜달라고 하며 언쟁이 시작됐고, 같은 이유로 다른 시민들과 계속되는 마찰이 생겼죠. 옆에 경찰들이 있었음에도 집회대열과 몇몇 시민들 간의 충돌을 훔훔한 모습으로 몰라라 하는 경찰들의 행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더군요. 한겨울에 아스팔트로 내몰려서 살자고 니네만 배부르고 등따습지 말고 우리도 좀 살자고 하는 사람들한테 와서 바쁘니 길 좀 트라고 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한참 지나서야 폴리스라인이 쳐지고 집회가 계속될 수 있었어요.
오늘 집회에 있던 동지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어요. 그 분노에 더 많은 사람이 지지를 보내고 함께하고 악착같이 사리 물고 이어가자면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근본적인 문제와 그 정당성도 중요하겠지만 분노가 뻗어가는 방향이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을 하게 돼요. 화를 내지 말고 싸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자는 것이죠. 우리가 분노하는 방식이 우리의 문제의식을 더 빛나게 할 수도 아주 감춰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목사님은 결의문 낭독을 하게 됐는데, 열심히 준비 중이네요.

이화여대 몸짓패 ‘투혼’

연영석 동지 “…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과 오늘도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 모두 제각기 제 길을 가지만 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

이주노조 까지만 동지

이주노조 마숨 동지

헌걸찬 전철연 동지와 이주노조 토너 동지

결의문 낭독 중인 목사님

아주 시원시원한 발언 멋졌어요~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서 주먹 불끈 쥐는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렸으면 제 길 바쁘다고 비키라는 헛나발은 못 할 텐데 말이죠.
허거프다
‘허거프다’는 ‘허전하고 어이가 없다’는 뜻이다. ‘허전하다’는 ‘서운하고 텅 빈 느낌이 있다’는 말이고, 다시 ‘어이’는 ‘어처구니’를 뜻한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맷돌을 돌리려는데 손잡이가 없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뒤섞인 기억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허거프다’를 좀 더 길게 풀어보면 ‘서운하고 텅 빈 느낌에 어처구니가 없다’란 뜻이 된다. ‘헤프다’, ‘슬프다’, ‘어설프다’처럼 ‘-프다’가 들어간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뜻을 지닌다. 오래 말할 힘은 없고 지금 딱 심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허거프다.”
조금 있다가 11시에 목동 출입국 앞에서 이주노동자 집회가 있다. 많은 동지들을 보게 될 텐데 ‘동지’란 말이 허릅숭이들의 ‘수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화성 연대기
미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설사 디스토피아 일지라도 말이다. 『화성 연대기』를 읽어가는 것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고 과학이 골렘으로 변한 날들과 대면하게 되는 과정이다. 미래가 암암한 과거의 기억처럼 오다 어느 순간에 아긋한 조각들이 맞춰지고 진심으로 나는 화성인이 되는 것이다.
“They knew how to live with nature and get along with nature. They didn’t try too hard to be all men and no animal. That’s the mistake we made when Darwin showed up. We embraced him and Huxley and Freud, all smiles. And then we discovered that Darwin and our religions didn’t mix. Or at least we didn’t think they did. We were fools. We tried to budge Darwin and Huxley and Freud. They wouldn’t move very well. So like idiots, we tried knocking down religion. We succeeded pretty well. We lose our faith and went around wondering what life was for. If art was no more than a frustrated outflinging of desire, if religion was no more than self-delusion, what good was life? Faith had always given us answers to all things. But it all went down the drain with Freud and Darwin. We were and still are a lost people.”
“그들은 자연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다윈이 나타난 뒤로 우리가 저지른 크나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다윈과 우리가 가진 종교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아니, 적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바보였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를 쓰러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잃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 단순히 좌절된 욕망의 장식에 지나지 않고, 종교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면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모든 일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프로이트와 다윈과 함께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방황하는 인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는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과학에 기초한 sf보다는 환상문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복고풍 분위기나 앞의 인용처럼 종교적 에피파니(epiphany)도 물씬 풍기는 작품이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의 소설이 낡삭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외려 과학 지식에 기초한 sf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인종/여성차별에 대한 뉘앙스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이나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마초이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리사 터틀이나 조안나 러스, 어슐러 르 귄이 활동하기 전에 대체 그렇지 않은 작품이 없으니 르 귄이 “SUR –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에서 보인 관용으로(꼭 그것이어야 한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까뮈가 그르니에의 『섬』을 두고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고 말했던가. 더도 덜도 말고 『섬』에 두른 이 휘장을 화성연대기에 덧댄다고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이 『화성 연대기』로 인해 sf에 대한 내 편견은 산산조각이 났고 후에 번역된 거의 모든 sf를 보게 됐다. 그것은 다른 빛나는 SF 작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내게 단 한 명의 sf 작가를 꼽으라면 어슐러 k. 르 귄을 꼽을 것이지만 단 한편의 sf를 꼽으라면 『화성 연대기』를 꼽을 것이다.
덧 – 『화성 연대기』는 모음사 동서추리문고 두 군데에서 나왔지만 오래전에 절판인 상태고 헌책방에서도 꽤 안 보이는 책이다. 모음사에서 87년과 90년 두 번에 걸쳐 나왔는데, 내가 가진 것은 90년 모음사 판이다. 이 판형은 책 표지를 바꾸면서 ‘개정’이니 ‘재판’이니 하는 표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책 표지에 ‘대이 브래드버리’라는 우습지도 않은 실수를 했다, 정작 큰 실수는 마지막 한 페이지가 누락된 것이다. “마이클이 말했다” 마이클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으면 87년 판이나 동서추리문고 판을 찾아봐야 한다. 누구든 이 책을 읽는다면 마이클의 다음 말 때문만이 아니라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당장에 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헌데 도서관에도 90년 판밖에 없다면 굉장히 슬프겠지.
브레드버리의 단편은 『플레이보이 sf걸작선』같은 모음집에 간간이 실려 있고, 외에도 『화씨451』과 『멜랑콜리의 묘약』『살아있는 공룡』이 번역됐으나 단행본들은 아쉽게도 죄다 절판이다.
헌책방 나들이 어떠세요?
그런 날들이 있어요. 궁뎅이가 촐싹이며 마음까지 에부수수할 때 몸을 가볍게 하고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죠. 간간이 학교에 갈 때나 일터에 가면서 헌책방을 지나치곤 했지만 ‘오늘은 헌책방에 가야지’라고 미리 다짐을 해두면서는 통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며칠 전부터 헌책방에 가야지하고 곱살지는데, “부깽 돈 없다며?” 라고 그루박아 말하더군요. 네 없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 없는 나까지 슬겁게 대하는 미덕으로 신용카드를 추겼고 어찌하다 보니 빌붙고 있답니다. 뼈 빠지게 일하지는 않지만 달이 바뀌는 게 끌탕하긴 마찬가지예요. 기껏 해봐야 인터넷을 통해 책 몇 권 주문하고 어쩌다 커피 한잔하고, 오질라게 추운 날 자전거 대신 지하철을 이용한 게 다인데도 통장에 잔고가 빠지는 날이면 입질에 걸린 붕어처럼 파다닥 하다가 축 처지고 말아요. 그렇다고 참새가 포수 무서운 거까지 생각하면서 방앗간에 가겠어요. 우선 가고 보는 거죠. 카드가 없다고요? 그럴 땐 영풍이나 교보에 가서 몰래 영구 대출을 하는 게 좋죠. 여기서 ‘몰래’가 중요해요. 자기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쥐구멍에 머리 박고 ‘나 안 보이지’하는 것처럼 했다간 진짜 쥐처럼 하루 죙일 벽보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할걸요. 뭐든지 계획이 중요해요. 목욕재계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고, 괜히 잠바 앞 지퍼랑 열어 두지 말고 나볏하게 심호흡 한 번 하고 책방에 들어가세요. 좋아하는 코너에 가서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직원들의 행동반경을 가늠해두고 시작하는 거죠. 책은 안 보고 게름 게름하며 그들의 좌표범위와 운동량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 대상이 영향을 받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잊어선 안 되겠죠. 그러다 기회다 싶으면 몬창몬창하지 말고 한 번에 휙~~ 참고로 한 번도 못해본 일이에요. 그냥저냥 도서관에서 빌려보겠다고요? 네 반납기일을 지키는 것 잊지 마시고요. 겨울에 때 아니게 비 온다고 우산대용으로 쓰지 말고요, 아무리 리포트가 넘쳐도 밑줄 쫙쫙 그어가며 짜깁기 흔적 남기지 말아 주세요.
씹떡껍떡한 소릴랑 그만하고 아저씨 말로는 1년하고 몇 개월 만에 찾았다는 일산 집현전에 갔어요. 그새는 아니지만 길 건너엔 2층 매장도 생겼네요. 『과거와 미래 사이』 『페미니즘의 도전』 『골렘-과학의 뒷골목』 등등의 책을 샀어요. 요 책들이 벌써 헌책방에 나왔느냐고요? 세상 살다 보면 책깡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 집현전 같은 경우는 예전에도 말했지만 새책들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아주마씨의 동생 되시는 분이 어디 출판사에 다녀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출판단지도 있잖아요. 소문엔 교수들이 일산에 많이 산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증정본이라고 해서 “누구누구 혜존”, 피 튀겨가며 책 사도 쟁여 놓기만 할 때가 있는데 지들이 공짜로 받은 책 다 읽겠어요. 여하튼 요런 이유와 아무런 상관없이 신간도 신간이지만 재고 도서라든지 새책 같은 헌책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가 집현전이랍니다. 직접 들러보세요. 참 b님을 위한 『캐치-22』도 샀어요.
가방에 책이 한 짐 가득이네요. 읽지도 않고 뿌듯해질 때는 요때뿐이죠. 작심하고 나왔으니 홍제동 대양서점에도 들러야죠. 대양서점은 용산 뿌리서점과 더불어서 책값이 참 싼 곳이에요. 아버지는 1매장 아들은 2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1매장은 여타의 동네 헌책방과 별다를 게 없이 이러루한데, 2매장은 헌책뿐만 아니라 오래된 lp와 골동품 얄개 영화포스터 같은 것이 한데 아우러 사뜻한 박물관 같아요. 널치난 몸도 쉬어가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죠. 대양에서 짬뽕을 시켜 주기에 맛나게 먹고, 커피로 입가심하고 인삼차를 후루룩 마시고 슬렁슬렁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몇 권의 책을 뽑았죠. 대양에도 한 코너에 새 책들이 즐비하지만 그보다는 구석구석 숨은 책들을 찾는 즐거움을 택하고, 그냥 보면 뭐하나 노느니 염불한다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여성학 책들을 한데 추렸어요. 누군가에게 한 방의 축복이길 바라요. 대부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겠지만 아예 검색이 안 되는 책들도 더러 있어요. 가지런히 꽂아 뒀으니 다녀와 보세요.
『다른 목소리로』 – 너무나 유명해서 그닥 할 말이 없지만 스타이넘이 요 책을 두고 “인간 사회에 여성의 삶을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사회 자체를 완결한 책”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어요. 여하튼 여성학과 심리학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책이랍니다. 수 세기 동안 남성의 경험이 흡사 인류의 경험인양 사기 치던 기존의 발달 이론에 똥침을 가한 책이죠.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 게센인이 아닌 이상 요걸로 위안 삼으세요.
『내부로부터의 혁명』 – 진즉에 절판인지라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데,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인도에서 요가 배운 뒤에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관련해서 쓴 것입니다. 1,2 권으로 나왔는데, 1권은 어쩌다 헌책방에서 반짝하는데 2권은 잘 안 보여요. 다니다 보면 만날 날이 있겠죠. 저도 몇 년 전 오늘처럼 무작정 다니다 우연히 만났던 책이에요. 요전에 봤던 벨 훅스의 『사랑의 모든 것』에서도 짧게나마 언급을 하고 있어요.
『페미니즘과 문학』 – 출판사에서는 더 못 찍을 테고, 대학 구내 서점 같은 곳에 재고가 남은 걸 본 적은 있어요. 일레인 쇼월터의 ‘페미니스트 비평 황야에 서다(다시 나왔지만)’나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과 폴리스’ ‘중심에 있는 어머니’ 등등 중요한 텍스트들이 실려 있어요.
『페미니즘 이론』 – 페미니즘의 교과서 같은 책이라죠.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 요것은 『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란 제목으로 개정돼서 다시 나왔어요. 안 읽어 봐서 올마나 바뀌었는가는 모르겠네요.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 성 정체성에 대한 ‘nature’냐, ‘nurture’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죠.
외에도 『현대 여성 해방 사상』 『가족은 반사회적인가』 『페미니즘과 종교』 『한국의 여성과 남성』『여성해방의 이론 체계』 등등 다양한 여성학 관련 책이 즐비하더군요.
암암한 기억을 좀 더 쥐어짜 보면 페미니즘 서적 외에도 몇몇 특별한 책들이 있었어요. 가령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1,2,3, 양장케이스 같은 것 말이죠. 찾던 사람에게는 춤출 일인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짐이죠. 9만 얼마였던 책값이 올라서 12만 원이나 하는 책인데, 책값이야 엿장수 맘이라고 1/3 가격 혹은 말 잘하면 1/4에 살 수 있을 거예요 . 상고사를 다루는데 내용도 재미난 것은 물론이고, 만화도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죠.
그리고! 『모피를 입은 비너스』도 있었어요. 요것은 들뢰즈 『매저키즘』에 부록으로 실려 있긴 하지만 ‘인간사랑’보다 ‘과학과사상’의 번역이 더 잘 읽혔어요. 게다가 표지도 더 이쁜걸요! 사드에게 『안방철학』(규방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왔더군요)이 있다면 마조흐에겐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있죠.
당연히 기억 못 하는 책이 훨씬 더 많아서 뭐가 더 있는지는 역시나 직접 나들이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두 책방의 약도는 홍제동/대양서점, 일산/집현전을 참고 하세요.


대양 서점에서는 저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아방가르드 예술이론』과 『아마조네스의 꿈』을 샀어요.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86년에 출간된 것인데 같은 해에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으로도 심설당에서 나왔었죠. 이미 제본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척 어렵게 ‘독해해야’했던 책이었죠. 두 번역을 비교해 보았는데, 적절하게 합치면 잘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기회가 있을랑가는 모르겠네요. 원저의 제목을 그대로 따른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영어를 중역한 것이고,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는 독어를 번역한 것인데, 때로는 중역이 더 훌륭할 때가 있기 마련이죠. 도스또예쁘스끼의 범우사판과 열린책들판을 생각해 보세요.
『아마조네스의 꿈』은 바바라 워커의 소설이에요. 원제는 짐작하신대로 ‘아마존Amazon’이에요. 『흑설공주 이야기』같은 동화 뒤집어 보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아마존’도 일찍 번역이 됐네요. 안티오페라는 여성왕국 아마존의 무사가 20세기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떨어지면서 생기는 일이에요. 이거 내용을 말하기 아쉬울 정도로 옛날 수업 중에 몰래 반찬 집어 먹던 달근달근한 게 있네요. 🙂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읽기
페미니즘 비평을 큰 틀 안에서 보자면 가부장적인 윤리적/인식론적 가설 토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객관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 ‘객관성’과 ‘권위’가 어떤 전제 위에서 작동해 왔는지를 다시 묻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방식은 페미니스트마다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발전해 왔다.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에서 토릴 모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전통 아래서 영미권 페미니즘 비평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을 교차시킨다. 이 책의 관심은 ‘누가 더 급진적인가’의 판정이 아니라, 비평의 방법과 원리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낳는지에 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선명하다. 페미니즘 비평의 실천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 문학 텍스트의 문제는 페미니즘 정치의 우선순위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영/미 구분에 대해 자넷 토드의 지적대로 사회주의적 전통에 있는 ‘영국 페미니즘’과 ‘미국(백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이가 사용하는 ‘Anglo-American’과 ‘French’는 국적이나 출생지 같은 국가적 표지를 세밀하게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이는 이 이름들이 “순수하게 국가적 구획”이 아니며, 비평가의 출생지와도 무관하다고 명시한다. 이 구분은 각 전통이 텍스트를 읽는 규칙을 통해 정치성을 어떻게 드러내거나 가리는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 책의 한 축을 이루는 영미권 비평은, 신비평이 문학을 현실과 분리된 자율 영역으로 상정하는 ‘형식주의적 환상’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그 환상을 되풀이할 위험을 드러낸다. 모이는 미국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신비평의 비역사성(ahistoricism)을 꾸준히 공격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비판이 신비평의 미학적 이상을 “비판 없이 채택”하는 방식으로 회수되었다고 지적한다. (번역에서 ahistoricism을 ‘무역사주의’로 옮겼지만, 여기서는 통상적 용례에 따라 ‘비역사성’으로 표기한다.)
영미권 페미니즘 비평 내부에서도 모이가 먼저 짚는 것은 ‘텍스트를 무엇으로 보는가’의 차이다. 케이트 밀렛의 작업은 남성 작가 텍스트가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성적 위계에 정면으로 돌입하면서, 작품 속 말하기의 위치들을 섬세하게 가르기보다 텍스트를 곧바로 하나의 ‘발언’으로 읽는 경향을 드러낸다. 서술자와 인물의 말, 작품이 구성하는 아이러니와 거리, 발화의 전략이 충분히 분해되지 않은 채, 텍스트는 곧장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증거로 제시된다. 모이는 이를 단순한 무지로 몰기보다, 밀렛이 문학을 “반영(reflection)”으로 가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그 반영의 매개가 텍스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지 끝내 밀어붙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본다. 밀렛의 독해는 권위주의적 읽기를 흔드는 데에서는 날카롭지만, 여성 텍스트를 같은 방식으로 읽어도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곧바로 멈춘다. 남성 텍스트를 “혐오”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반권위주의가, 여성 텍스트의 장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존경해야 할 여성 작가’라는 형태로 권위를 되살릴 위험이 남는다.
이 문제의식을 다른 결로 끌고 가는 인물이 메어리 엘만이다. 엘만은 “여성을 하나의 현실적 대상이라기보다 말/단어로서의 여성”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며, 여성에 대한 통념이 문학적 수사와 묘사 관습 속에서 어떻게 굳어지는지 파고든다. 모이가 보기엔 엘만의 장점이 여기에 있다. ‘여성 경험’의 진정성을 척도로 삼기 전에, 여성성 자체가 이미 언어적 관습 속에서 만들어지고 반복된다는 사실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세운다. 다만 엘만의 이 출발점은, 가부장제를 문학 바깥의 역사·정치적 관계로 풀어내기보다는 문학적 관습의 분석에 더 오래 머무르게 만들기도 한다.
모이가 ‘영미권 비평’의 핵심 난점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는 지점은, 쇼월터(그리고 패트리샤 스텁스, 마샤 홀리 등)에게서 발견되는 전통적 휴머니즘의 잔존이다. 여기서 정치란 “올바른 내용이 올바른 리얼리즘 형식으로 재현되는가”의 문제로 재정의된다. 울프가 실패한 작가로 판정되는 이유는 ‘여성의 진실한 그림(truthful picture of women)’을 주지 못했고, ‘강한 여성상’으로 독자가 동일시할 이미지가 부족하다는 식의 요구 때문이다. 그 요구는 “형식주의를 버리고 진정성(authenticity)의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선언과 맞물리며, 리얼리즘은 다시 ‘일관된(비모순적) 지각’의 규범으로 굳어진다. 이때 ‘현실’과 ‘경험’을 강조하는 언어는 정치의 토대처럼 보이지만, 곧바로 “무엇이 현실적인가”를 판정하는 권위를 비평가에게 되돌려준다. 비리얼리즘적 형식은 ‘현실 도피’로 밀려나고, 텍스트는 ‘여성의 경험을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는가’의 문제로 축소된다. 모이는 이 흐름 속에서 리얼리즘 요구가 ‘여성 롤모델’ 요구와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 충돌을 덮는 것이 다시 ‘진정성’이라는 규범이라고 짚는다. ‘현실’이 비평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순간, 비평의 문법은 ‘should/demand/requirements’ 같은 처방적 어휘로 기울어지고, 텍스트는 정치가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판정받는 대상으로 바뀐다.
이 흐름에서 영미권 내부에서 시작된 “이론적 성찰”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아네트 콜로드니는 “페미니즘 비평”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아직 없다는 사실을 전면에 놓고, 여성 글쓰기의 고유성을 말할 때 곧장 자연/본성 논쟁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경계한다. ‘여성적 양식’을 찾겠다는 욕망이 곧 ‘남성적 양식’의 대칭항을 발명해야 하는 의무로 이어질 때, 비평은 비교의 틀 자체를 다시 자연화할 수 있다. 콜로드니는 각 작품의 특수성을 먼저 존중하는 귀납적 방법을 제시하지만, 이 방법이 곧바로 또 다른 모순(개별성의 존중과 ‘반복되는 여성성’의 추출 사이)을 안게 된다는 점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모이가 예고하는 대안이 ‘정치화된 독해’다. 책의 서두에서 호출하는 버지니아 울프 사례는, 그 독해가 실제로 무엇을 겨누는지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모이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면서, 영미권 페미니스트 비평이 울프를 불편해했던 이유를 먼저 드러낸다. 특히 엘레인 쇼월터가 울프의 양성성(androgyny)을 ‘도피’로 규정하고, 『자기만의 방』의 문체적 장치들(유희, 과장, 반복, 시점의 이동, 인칭의 가면)을 ‘진지함의 결여’로 판독하는 방식은, “페미니즘적 텍스트는 이래야 한다”라는 규범적 기대가 독해를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는지 노출한다. 쇼월터가 울프를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서사 전략에서 ‘거리를 두어야(detach)’ 한다고 말하는 순간, 텍스트의 형식과 전략은 정치적 의미를 생산하는 장이 아니라, 정치에 도달하기 위해 벗겨내야 할 ‘표면’으로 격하된다.
모이가 옹호하는 울프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울프의 양성성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통일된 자아와 단일한 관점이 가능하다는 가부장적 환상을 흔드는 글쓰기의 전략으로 읽힌다. 『자기만의 방』이 끊임없이 주체 위치를 이동시키고, 경험을 한 번에 ‘투명하게’ 고백하지 않으며, 자신을 패러디하거나 위장하는 방식은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장난이 아니라, “정체성”과 “경험”이 곧바로 정치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의심하게 만든다. 울프의 텍스트가 독자를 하나의 ‘안전한’ 위치에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모이가 말하는 정치성의 한 양식이 된다. 정치화된 독해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텍스트가 아니라 ‘통일된 자아, 단일한 시점, 리얼리즘과 진정성의 규범’ 과 같은 독해의 전제를 문제 삼는다.
울프를 둘러싼 판정의 언어를 한 번 거꾸로 세워보면, ‘정치화된 독해’가 무엇인지 비로소 선명해진다. 정치화된 독해는 텍스트에 정치적 메시지를 덧붙이는 일이 아니다. 텍스트가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 그 의미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유통되는 조건, 비평이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가르는 과정 자체가 성별화된 전제와 결합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문학이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형식주의적 환상을 지워내는 것이 페미니스트 비평의 한 정의가 될 수 있다면, 정치화된 독해는 바로 그 ‘분리’를 가능하게 했던 권위의 장치들을 겨냥해야 한다.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고 어떤 기준으로 판정하는지, 그 기준이 누구를 배제하며 무엇을 자연화하는지까지 드러내는 것, 그 과정이 정치의 자리를 비평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
반대로 프랑스 이론 계열은 본질주의를 압박하는 데서 강한 힘을 보여주면서도, 정치성을 다른 방식으로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 언어·욕망·주체의 분열을 통해 가부장적 인식론을 흔드는 순간들이 있는 반면, 그 흔들림이 역사성과 물질성의 장에 닿지 못하면 비판은 초역사적 구조로 고정되기 쉽다. 모이는 이 문제를 ‘난해함’이나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이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는가의 문제로 취급한다. 그래서 모이의 구분은 두 전통을 서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비판적 논쟁의 장을 여는 데 있다.
프랑스 이론을 말할 때 ‘보봐르를 버리고 차이를 택했다’는 도식이 자주 호출된다. 모이는 이 도식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프랑스 페미니즘의 “새 세대”가 보봐르의 ‘평등’ 욕망을 거부하고 ‘차이’를 옹호했다는 통설을 소개한 뒤, 그 그림이 훨씬 복잡하다고 말한다. 보봐르는 여전히 프랑스 페미니즘의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남아 있고, 그의 상징적 지지와 사회주의·반본질주의 계열의 공존은 ‘평등/차이’의 단순 대립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모이가 강조하는 것은 ‘누가 더 프랑스적인가’가 아니라, 보봐르의 ‘타자’ 분석이 이후 이론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서술되고 이동하는가 하는 문제다. 크리스테바의 관심사들(계급과 젠더를 함께 사유하려는 욕망, 여성성의 구성)을 보봐르와 나란히 놓고, 이리가레의 비판이 때로 보봐르의 타자론을 포스트구조주의적으로 다시 쓰는 것처럼 읽힌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모이는 보봐르가 정신분석을 거부한 지점이 프랑스 여성운동의 맥락에서 『제2의 성』을 “가장 낡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식수·이리가레·크리스테바가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에 크게 빚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읽기 위해서는 라캉의 핵심 개념들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 따라온다. 라캉의 상상계/상징계 구분, 언어의 획득과 ‘아버지의 법’이 주체를 분열시키는 과정, 주체가 결핍의 기호 아래에서만 ‘말하는 존재’로 서게 된다는 설명은, 단지 난해한 이론의 요약이 아니다. 이 장치는 ‘정체성’과 ‘경험’을 투명한 출발점으로 삼아 정치성을 확정하려는 욕망에 제동을 건다. 프랑스 이론의 급진성은 그 제동 자체에 있다. 문제는 그 급진성이 어떤 사회적 관계의 장으로 이어지는가, 어디에서 멈추는가다. 모이가 “프랑스 이론”을 ‘차이의 찬미’로만 읽지 말라고 요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열린다.
이 책에서 모이는 프랑스 이론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호출한다.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이는 그 차이를 따라가면서, 프랑스 이론이 흔히 ‘차이’의 찬미로 요약될 때 놓쳐지는 정치적 쟁점을 되살린다.
엘렌 식수: 이항대립의 전장과 ‘여성적 글쓰기’의 양가성
식수에게 서구 철학과 문학은 끝없는 위계적 이항대립의 연쇄로 얽혀 있다. 자연/역사, 자연/예술, 자연/정신, 정념/행동 같은 대립쌍은 결국 남성/여성이라는 근본적 ‘쌍’으로 되돌아간다. 식수는 이 대립이 단순히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항이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다른 항을 파괴해야 하는 전장이라고 말한다. 승리는 활동성과 결합되고 패배는 수동성과 결합되며,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은 언제나 승자의 자리에 놓인다. “여성은 수동적이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수의 유명한 진술은, 여성에게 ‘긍정적 공간’이 부여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고발이다.
이 고발을 밀어붙이며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를 제안한다. 그것은 ‘여성 저자’의 생물학적 성과 직결되는 표지가 아니라, 이항대립의 폐쇄를 갈라 열고, 기표의 유희와 텍스트성의 개방성을 통해 남근-로고스 중심 논리를 흔드는 글쓰기의 방향이다. 모이가 식수를 읽을 때 핵심은 여기서 생기는 양가성이다. 한편으로 식수는 가부장제의 인식론을 텍스트의 형식과 언어의 층위에서 공격한다. 다른 한편으로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명명 자체를 혐오한다고 말하며, 남성/여성이라는 이름이 이미 이항대립의 감옥이라고 경고한다.
모이가 붙잡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가 어떻게 생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름에 걸리지 말라”는 명령은 분명 해방적이지만, 전선을 세우고 연대를 조직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이름과 범주가 불가피하게 요구되기도 한다. 식수의 급진성은 언어를 흔드는 힘을 갖지만, 그 흔들림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변형시키는지에 대한 문장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모이는 이를 ‘식수의 약점’이라기보다, 프랑스 이론이 빈번히 겪는 탈정치화의 경향으로 진단한다. 언어의 전복이 사회적 전복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뤼스 이리가레: ‘동일자’의 체계와 모방의 전술
이리가레는 남근중심 담론이 자신을 보편으로 정립하는 방식을 ‘동일자(the Same)’의 논리로 추적한다. 여성은 독자적 주체라기보다 남성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한 거울로 배치되고, 여성성은 언제나 타자의 자리에서 정의된다. 이리가레의 글쓰기가 고대 철학, 정신분석, 수학적 도식, 알파벳의 변주를 끈질기게 호출하는 이유는, 남성 중심의 기원 서사와 진리 담론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방법’의 층위에서 이미 여성 배제를 내장하고 있음을 폭로하기 위해서다.
이때 이리가레의 핵심 전술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모방(mimesis)이다. 남성 담론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 말하면서 그 과잉을 통해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모방은 굴종이 아니라 전복의 전략이며, “보편”이 사실은 특수한 위치의 자기 찬양이라는 사실을 노출시키는 장치가 된다. 정치화된 독해는 여기서 이리가레의 ‘난해함’을 미학적 취향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난해함이 겨누는 권력의 구조, 곧 여성이 의미 생산의 자리에서 어떻게 배제되는가를 구체적 문제로 되돌린다.
다만 모이가 이리가레에게서 강하게 지적하는 약점은, 이러한 비판이 역사적 특수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할 때 ‘초역사적’ 구조 비판으로 고정된다는 점이다. 모이는 이리가레의 『반사경(Spéculum)』이 “비역사적이며(ahistorical)” 역사적 특수성을 다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성의 위치를 거울로 만드는 장치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 계급·국가·가족·노동 같은 구체적 장에서 벌어지는 변형 가능성은 희미해진다. 이리가레의 급진성은 철학적 중심을 흔들지만, 그 흔들림을 물질적 관계의 분석으로 연결하는 문장이 약해질 때 정치성은 관념적 층위에 머물게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주변성의 이론, 정체성에 대한 의심, 그리고 ‘동질화’의 위험
크리스테바는 여성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보다, ‘주변적인 것’에 속한 부정성과 거부를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전략적으로 배치하려 한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주변으로 규정하는 바로 그 논리를 뒤집어, 주변의 부정성을 통해 남근중심 질서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다.
크리스테바의 핵심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심이다. “정체성, 심지어 ‘성적 정체성’이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이론을 이끈다. 이 의심은 ‘여성적 글쓰기’나 ‘여성의 말하기’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일 수 있다는 주장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성/여성됨’의 이론을 갖기보다, 주변성·전복·이탈(dissidence)의 이론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은 강력한 반본질주의를 제공한다. 동시에 모이는 이 반본질주의가 특정 방식으로 정치적 약점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여성, 지식인 이탈자, 전위 작가, 노동계급의 투쟁을 “중심화된 권력 구조에 대한 투쟁”이라는 동일한 언어로 설명한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투쟁이 지나치게 쉽게 동질화될 위험이 생긴다. 모이가 “서로 다른 구체적 투쟁들의 다소 경솔한 동질화(glib homologization)”를 약점으로 지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화된 독해는 이 지점에서 크리스테바의 급진성을 찬양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주변성”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서로 다른 위치들을 한데 묶고 그 차이를 지워버릴 수 있는지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이 모든 논의는 어떤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페미니즘 비평이 스스로의 규칙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에 가깝다. 영미권 비평은 신비평의 비역사성(ahistoricism)을 비판하면서도, ‘현실’과 ‘경험’을 진정성의 척도로 세우는 순간 다시 처방적 어휘를 호출하게 된다. 프랑스 이론은 주체와 의미의 중심을 흔드는 힘을 갖지만, 그 흔들림이 역사적·물질적 특수성을 충분히 통과하지 못하면 비판은 초역사적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 모이가 겨누는 것은 어느 한 진영의 승리가 아니다. 서로 다른 독해의 장치들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가리는지 드러내고, 그 긴장 속에서만 페미니즘 비평이 자기 전제를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책의 매력은 이 긴장을 ‘조정’하거나 ‘봉합’하지 않는 데 있다. 정치성을 말하면서도 하나의 방법을 규범으로 세우지 않고, 개입을 말하면서도 개입의 언어가 스스로 새로운 권위가 되는 순간을 경계한다. 모이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무엇을 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고, 그 읽기가 누구를 배제하며, 무엇을 자연화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이 남기는 마무리는 선언이 아니라 과제에 가깝다. 비평은 결론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가능하게 했던 과정을 다시 드러내고 흔드는 자리에서만 정치가 된다.
덧붙이 –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비평의 서로 다른 전통을 교차시키며, 그 이론의 지형을 한 권 안에서 훑게 해주는 개괄서로도 손색이 없다. 좀 더 쉽게 접하려면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과 라캉(5장)에 관한 보론 격으로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듯싶다. 둘 다 매우 가벼운 책이다. 여기서 ‘가벼운’은 물리적 무게이다. 토릴 모이에 대한 다른 번역으로는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한신』에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문체」가 실려 있다. 함께 읽으면, 모이가 말하는 ‘정치화된 독해’가 단지 내용의 정치성이 아니라 문체와 방법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이 더 또렷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가장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의 『타자인 여성의 반사경』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 하고 있지만 그 첫 장이 『현대문학 비평론/한신』에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마주 향해 바라보기」가 『영미여성 소설론/정우사』에 번역됐을 뿐이다. 더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방에는 없다. 제발 번역 좀 해주면 꼭 “새”책으로 사서 읽으마. 무수히 많은 전공자를 두고, 없는 능력 시간 쏟아가며 원서로 읽기엔 왠지 좀 억울하다.
안티마인
pc통신을 시작할 때부터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할 것 없이 써왔던 닉이 있다. 인터넷이 한창일 때 온갖 사이트도 이 아이디로 가입을 하곤 했는데, 처음 빠꾸 맞은 게 네이버에서였다. 제 작년인가 naver에 가입을 하려는데 글쎄 이미 있는 아이디란다.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잊은 줄 알고 한참을 헤매다가 정말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굴까 퍽 궁금하다 말았는데, 민중의 소리 블로그와 바이러스 블로그에서도 antimine 이라는 아이디를 봤다. 대체 누굴까.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안티마인 이라는 아이디를 만들었을까. 내게 anti mine은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말라, 결코 머물지 말라 ‘너의’ 집안, ‘너의’ 방, ‘너의’ 과거보다 더 너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로 시작됐다. 내 것이라고 알게 모르게 이름 붙여진 것들, 관성이 되고 습관이 돼버린 삶, 거기에, 깊게 팬 흔적에 고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기표만 남아서 우왕좌왕 떠돌고 있다. 그들은 안티마인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을까.
부깽 자전거
12459.9km를 함께 달린 자전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