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작은대안무역을 함께하며
매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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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e L'enfer bouquins
노동절, 작은대안무역을 함께하며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과 오늘도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 모두 제각기 제 길을 가지만 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오늘 홍대 공중캠프에서 작은대안무역이 열려요. 방글라데시에서 새로 보내온 옷들과 이쁜 액세서리 등등을 만 날 수 있답니다. 갑자기 한 사진 작업이라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예뻐요. 옷 마다 디자이너와 만든 이가 표시 돼있고, 하나하나 직접 염색하고 손바느질한 작품들이에요. 작은대안무역의 옷들도 구경하시고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만들어 가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방송 1주년도 축하해주세요.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1주년 기념파티가 있습니다.
약도를 보면 대강 어디쯤이라 짐작하시겠지만 홍대전철역보다는 신촌전철역에서 걸어오시는 게 조금 더 빠릅니다. 7011, 271 버스를 이용하신다면 산울림 소극장 앞에서 내리면 됩니다. 뭐시냐 고기 집들 쭉 늘어진 기찻길 있죠? 바로 그 라인입니다. 드.디.어. 작은대안무역도 오랜 겨울 방학을 끝내고 기지개를 켭니다. 바깥 활동이 없는 동안 서로 많은 고민을 나눴는데 그 고민들이 활동 속에서 확장되고 변화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노동절(서울 시청 앞)과 전야제(없나요?)에서도 봐요~!
오늘 몇몇이 청주 보호소 아노아르 면회를 가기로 했다가 사정상 다음으로 미뤘었다. 그러던 차에 아노아르가 풀려난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목동으로 갔다. 지난해 5월 14일 강제연행 되고나서 지금까지 보호소 감금으로 건강이 심하게 나빠져 보호해제 된 것이다. 그가 있던 청주외국인보호소는 청주교도소의 한 부분이다. 말이 보호소이지 실제로 감옥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출입국 관리법은 구금된 미등록 이주자들의 보호소 감금을 20일을 넘지 않게끔 하고 있으나 아노아르가 구금된 기간은 그 20일의 17배에 달한다. 이주노조를 죽이기 위한 표적단속이었다는 점과 연행 당시의 출입국의 폭행 등등을 두고 행정소송을 진행할 때부터 보호해제로 나왔어야 함에도 340여 일을 불법적으로 감금한 것은 한 개인에 대한 명백한 인권유린이다. 아노아르는 그 1년 가까운 보호소 생활로 당뇨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로 기억장애까지 얻은 상태이다.
바깥에서 다시 아노아르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다. 어서 건강이 회복되고 이 투쟁을 이어갔으면 그리고 악착같이 이기기를 바란다.
출입국에 꽃다발을 들고 올 날이 생길 줄이야. 비루님과 함께 준비한 꽃다발이다. 아노아르를 기다리는 중에 연대단위 몇몇 남정네들이 ‘꽃다발은 여자가 줘야지’라는 발언이나 ‘기쁨조’운운하는 꼴을 보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연대하되 저 대책 없는 남정네들끼리의 연대는 끊으면서 가야 하는 것은 이판저판 다를 게 없다.
연대단위와 출입국 간에 절차문제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500만 원의 보호해제 보험금을 내고 드디어 아노아르 이주노조 위원장이 나왔다.
비루님께서 만든 피켓, 아름다워라~ ‘보호해제 흥, 숨어 버릴 거야’라고 했다가 약하다는 말에 ‘투쟁할 거야’로 바꿨다.
이 모습을 보면서 사실은 조금 웃었는데, 연대단위와 출입국 간의 실랑이라는 것이 ‘뭐 그리 절차를 일일이 따지고 챙기느냐는 것’이었는데 이런 절차가 하나 더 생길 줄이야 🙂
언젠가는 잎이 무성해지고, 아이도 훌쩍 자라겠지.
4
이 꿈에서 저 꿈으로
마음은 옷을 벗고
늙은 살 늙은 말(馬)
아아 병이 올 것 같아
기어갈 힘이 없어
따뜻한 무덤 속에 들어가
감기가 들면 감기약을 먹고
누군가 죽으면 부의금을 내리라
5
아무도 없다
누구나 가 버린다
그리고 참으로 알 수 없는 날에 나는
또 다시 치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고,
가리라
저 앞 허공에 빛나는 칼날
내 눈물의 단두대를 향하여
아픔이 아픔을 몰아내고
죽음으로 죽음을 벨 때까지
마침내 뿜어오르는 내 피가
너희의 잔에 행복한 포도주로 넘치고
그때 보아라 세상의 어머니 아버지여
내가 내 뿌리로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것을
나의 불모가 너희의 영원한 풍요가 되는 것을
그리고 마음껏 기쁘게 마셔라
오늘의 나의 피, 내일의 너희의 포도주를
기침을 하며 최승자를 읽는다. 기침을 할 때마다 단전에서부터 양 어깨까지 가슴팍 전체가 아프다. 겨우 몇 행을 읽고 나면 벌어진 생살을 굵은 소금으로 절인 뒤 쥐어짜는 것 같은 기침이 난다. 마음으로 견디지 못하는 것들은 몸으로 견뎌야 하는 법인데, 밑천인 몸을 너무 번 놓고 말았다. 며칠 아프면서 내 몸부터 사랑하자고 그러면서 살자고 내내 벼기면서도 내 몸을 사랑하자는 게 퍽 설다.
기침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동생 부탁으로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 달라는데 점원이 “신분증 보여 주세요.”라고 말한다. 마스크를 내렸다. 점원이 “죄송합니다.”란다. 덩달아 나도 “제가 죄송해요.”라고 말한다. 아씨 죄송할 게 뭐람.
동계현장 활동투쟁의 마지막 날 출입국 앞 집회에 다녀왔어요. 이주노조를 비롯한 전철연 전해투 학습지노조 성진애드컴 등등 많은 연대단위 분들이 모였고,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그보다 늦게 집회가 시작돼서 주욱 함께 할 수 있었네요.
오늘 집회 중에 몇 가지 당황하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출입국 관리소장의 차가 나가겠다고 집회대열의 한쪽 길을 비키라는 데서 시작됐어요. 정당하게 집회신고를 한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출입국소장차가 나가겠다고 비키라니 기가 찰 일이죠. 출입국 차가 나가기 전에는 차가 들락거릴 때 길을 터주곤 했었어요. 그런데 출입국 소장의 뒤에 있던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시하고 집회를 진행하는데, 뒤차에 있던 어느 아저씨가 나오더니 나가야겠다고 비켜달라고 하며 언쟁이 시작됐고, 같은 이유로 다른 시민들과 계속되는 마찰이 생겼죠. 옆에 경찰들이 있었음에도 집회대열과 몇몇 시민들 간의 충돌을 훔훔한 모습으로 몰라라 하는 경찰들의 행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더군요. 한겨울에 아스팔트로 내몰려서 살자고 니네만 배부르고 등따습지 말고 우리도 좀 살자고 하는 사람들한테 와서 바쁘니 길 좀 트라고 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한참 지나서야 폴리스라인이 쳐지고 집회가 계속될 수 있었어요.
오늘 집회에 있던 동지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어요. 그 분노에 더 많은 사람이 지지를 보내고 함께하고 악착같이 사리 물고 이어가자면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근본적인 문제와 그 정당성도 중요하겠지만 분노가 뻗어가는 방향이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을 하게 돼요. 화를 내지 말고 싸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자는 것이죠. 우리가 분노하는 방식이 우리의 문제의식을 더 빛나게 할 수도 아주 감춰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목사님은 결의문 낭독을 하게 됐는데, 열심히 준비 중이네요.
이화여대 몸짓패 ‘투혼’
연영석 동지 “…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과 오늘도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 모두 제각기 제 길을 가지만 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
이주노조 까지만 동지
이주노조 마숨 동지
헌걸찬 전철연 동지와 이주노조 토너 동지
결의문 낭독 중인 목사님
아주 시원시원한 발언 멋졌어요~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서 주먹 불끈 쥐는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렸으면 제 길 바쁘다고 비키라는 헛나발은 못 할 텐데 말이죠.
‘허거프다’는 ‘허전하고 어이가 없다’는 뜻이다. ‘허전하다’는 ‘서운하고 텅 빈 느낌이 있다’는 말이고, 다시 ‘어이’는 ‘어처구니’를 뜻한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맷돌을 돌리려는데 손잡이가 없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뒤섞인 기억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허거프다’를 좀 더 길게 풀어보면 ‘서운하고 텅 빈 느낌에 어처구니가 없다’란 뜻이 된다. ‘헤프다’, ‘슬프다’, ‘어설프다’처럼 ‘-프다’가 들어간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뜻을 지닌다. 오래 말할 힘은 없고 지금 딱 심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허거프다.”
조금 있다가 11시에 목동 출입국 앞에서 이주노동자 집회가 있다. 많은 동지들을 보게 될 텐데 ‘동지’란 말이 허릅숭이들의 ‘수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미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설사 디스토피아 일지라도 말이다. 『화성 연대기』를 읽어가는 것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고 과학이 골렘으로 변한 날들과 대면하게 되는 과정이다. 미래가 암암한 과거의 기억처럼 오다 어느 순간에 아긋한 조각들이 맞춰지고 진심으로 나는 화성인이 되는 것이다.
“They knew how to live with nature and get along with nature. They didn’t try too hard to be all men and no animal. That’s the mistake we made when Darwin showed up. We embraced him and Huxley and Freud, all smiles. And then we discovered that Darwin and our religions didn’t mix. Or at least we didn’t think they did. We were fools. We tried to budge Darwin and Huxley and Freud. They wouldn’t move very well. So like idiots, we tried knocking down religion. We succeeded pretty well. We lose our faith and went around wondering what life was for. If art was no more than a frustrated outflinging of desire, if religion was no more than self-delusion, what good was life? Faith had always given us answers to all things. But it all went down the drain with Freud and Darwin. We were and still are a lost people.”
“그들은 자연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다윈이 나타난 뒤로 우리가 저지른 크나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다윈과 우리가 가진 종교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아니, 적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바보였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를 쓰러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잃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 단순히 좌절된 욕망의 장식에 지나지 않고, 종교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면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모든 일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프로이트와 다윈과 함께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방황하는 인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는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과학에 기초한 sf보다는 환상문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복고풍 분위기나 앞의 인용처럼 종교적 에피파니(epiphany)도 물씬 풍기는 작품이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의 소설이 낡삭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외려 과학 지식에 기초한 sf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인종/여성차별에 대한 뉘앙스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이나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마초이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리사 터틀이나 조안나 러스, 어슐러 르 귄이 활동하기 전에 대체 그렇지 않은 작품이 없으니 르 귄이 “SUR –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에서 보인 관용으로(꼭 그것이어야 한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까뮈가 그르니에의 『섬』을 두고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고 말했던가. 더도 덜도 말고 『섬』에 두른 이 휘장을 화성연대기에 덧댄다고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이 『화성 연대기』로 인해 sf에 대한 내 편견은 산산조각이 났고 후에 번역된 거의 모든 sf를 보게 됐다. 그것은 다른 빛나는 SF 작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내게 단 한 명의 sf 작가를 꼽으라면 어슐러 k. 르 귄을 꼽을 것이지만 단 한편의 sf를 꼽으라면 『화성 연대기』를 꼽을 것이다.
덧 – 『화성 연대기』는 모음사 동서추리문고 두 군데에서 나왔지만 오래전에 절판인 상태고 헌책방에서도 꽤 안 보이는 책이다. 모음사에서 87년과 90년 두 번에 걸쳐 나왔는데, 내가 가진 것은 90년 모음사 판이다. 이 판형은 책 표지를 바꾸면서 ‘개정’이니 ‘재판’이니 하는 표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책 표지에 ‘대이 브래드버리’라는 우습지도 않은 실수를 했다, 정작 큰 실수는 마지막 한 페이지가 누락된 것이다. “마이클이 말했다” 마이클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으면 87년 판이나 동서추리문고 판을 찾아봐야 한다. 누구든 이 책을 읽는다면 마이클의 다음 말 때문만이 아니라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당장에 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헌데 도서관에도 90년 판밖에 없다면 굉장히 슬프겠지.
브레드버리의 단편은 『플레이보이 sf걸작선』같은 모음집에 간간이 실려 있고, 외에도 『화씨451』과 『멜랑콜리의 묘약』『살아있는 공룡』이 번역됐으나 단행본들은 아쉽게도 죄다 절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