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25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고귀한 자산을 던져버렸다. 국기와 국가가 잘 못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개인이 거기에 반대할 권리 말이다. …….. 그리고 그와 함께 애국심이라는 기괴하고 웃기는 낱말에서 정말로 존중할 만한 모든 것도 버렸다.”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에 대한 몇 마디와 “3월20일 반전행동에 손잡고 가요”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괜스레 말을 늘리다 밥이 탔다. 내 밥.. ㅠㅠ 여하튼 반전평화를 외치던 양심들은 얼토당토않은 애국심에 묻혀 가려졌고 석유 확보와 무기 소비를 통해 자국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려는 부시의 광기는 여전하고 거기다 경제경제 나발불며 좋아라 따라가는 놈들이라니.

나야 아등거리며 할 수 있는 게 3월 20일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게 다다. 아무도 3월 20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그 야만의 세력들에게 보여줘야지!!! 손에 손잡고 시청앞으로!!!

돌베게에서 출간된 마크 트웨인 전쟁을 위한 기도 중 36 – 85페이지를 옮긴다. 존 그로스의 삽화가 함께 들어 있는데 케테 콜비츠를 좋아한다면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지 싶다.

“O lord our God,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help us to tear their soldiers to bloody shreds with our shells;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흘리게 하소서.

help us to cover their smiling fields with the pale forms of their patriot dead;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help us to drown the thunder of the guns with the shrieks of their wounded, withing in pain;
우리를 도우시어 천둥 같은 총성을 저들의 부상병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내지르는 비명 속에 잠기게 하소서.

help us to lay waste their humble homes with a hurricane of fire;
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help us to wring the hearts of their unoffending widows with unavailing grief;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help us to turn them out roofless with their little children to wander unfriended the wastes of their desolated land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가지없이 떠돌게 하소서.

in rags and hunger and thirst, sports of the sun flames of summer and the icy winds of winder,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한풍에 노리개가 되어

broken in spirit, 영혼은 찢기고

worn with travail, 노고에 지친 몸으로 헤매게 하소서.

imploring Thee for the refuge of the grave and denied it
주님께 안식할 무덤을 간구하더라도 거절하시고

for our sakes who adore Thee, Lord,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blast their hopes,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버리시고

blight their lives,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protract their bitter pilgrimage,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make heavy their steps,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water their way with their tears,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stain the white snow with the blood of their wounded feet!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We ask it, in the spirit of love of Him Who is the Source of Love,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and Who is ever-faithful refuge and friend of all that are sore beset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and seek His aid with humble and contrite hearts.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Amen 아멘."

2월 달력을 넘기면서 끄트머리 글을 가져온다.
“용기를 내어서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발레리.

3월은 힘차게! 으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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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파티 등등

20

점점 요상한 기능만 하나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 9px | 10px | 11px 가 보이시죠? 바디부분의 폰트를 조절해 줍니다. 다른 곳은 그닥 불편할 것 같지 않아서 그대로 뒀고, 내용부분만 폰트 적용이 되게끔 했습니다. thegirliematters의 소스를 그대로 베꼈는데, 자바스크립트도 css와 마찬가지로 링크를 통해 불러 오고 있더군요. 전체적으로 소스가 말끔해 질 수 있겠지만, css도 헤매고 있는지라 천천히 봄이 오면 정리도 할 겸 시험해 볼까 합니다. 정리 혹은 리뉴얼에 대한 압박은 이 블로그가 익스플로러 전용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창과 호환이 안 되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특히 모질라에서는 절망적이지요. Links 맨 아래에 Random Blog를 달았습니다. 블로그코리아에 등록 된 곳들 중에 아무곳이나 가게 됩니다. 재밌겠죠? ;;;
다른 블로그를 볼 때마다, 역시 기능보다는 내용이야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까딱거립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깨닫곤 하죠. 얼마나 게으르냐면 깨닫기’만’ 합니다.
아시는 분들만 아시겠지만 어제의 고기파티는 성황리에 끝맺었고, 남은 고기는 목요일쯤해서 마저 해치울까 합니다. 회비는 현지, 근미 자매가 다 낸 관계로 목요일 날 오시는 분들은 양심만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남 몰래 후원해 주신 어머님께 감사를.
아침에 밑반찬을 몇 가지 준비해 주시면서 누구누구 오냐고 묻더군요,
“재홍이가 올 것 같아요“
“재홍이 여자친구도 같이 오니?”
“그렇죠 같이 오겠죠”
“그래, 니 여자친구도 오니?”
“………………………….(엄마 전 여자친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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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25

커피포트를 밖으로 내놨다. 방안에 커피 향이 잔잔한 게 며칠은 좋더니 놈팽내와 합쳐져 궁상스럽다. 그보다도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듯해서 줄여볼까 하는 심산으로 손이 덜 가는 곳으로 치웠다. 올 들어 비운 커피만 어제로 1200그램을 넘겼다. 약탕기도 아니고 계속 지글지글 끓는 포트도 고생스러웠을 게다. 내 속이 아픈 줄 모르다가 ‘아니 내가 입맛이 안돌다니’란 생각을 짚다보니 아무래도 원인이 커피였지 싶다.
관계란 언제나 일방향이다. 나는 말하고 너는 듣는다. 너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동시에 말할 순 있어도 동시에 들을 수는 없다. 내가 그 잠깐을 기다릴 줄 알았다면 혼자서 ‘동시에 들을 수 없는’ 적막을 예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유도 공원을 걸으면서, 나는 내내 ‘기억’에 대한 생각을 한다. 오래 멀찍이 떨어진 것들은 미화되고 근래의 안 좋은 일들은 부쩍 드러나기 마련이다. 결국 요전의 일들을 먼데의 기억으로 위안받고 있는 셈이다. ‘선택적 기억’이라면 이왕 위안모드로 돌아가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기억이란 게 꼭 향기 같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고 아프다. 나는 네가 곁에 있으면 그립지 않을 것이다. 부재야 말로 기억의 숙주이다.
그림을 그려야지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렸을 때 내가 문득거리며 등을 톡톡치며 알은체한다. 나는 반갑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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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열사여

21

오랜만에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게 겸연쩍을 만큼 드문 산행이지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감탄과 감사를 보냅니다. 백운대에서 바람은 가슴을 휑하니 뚫고 갑니다. 묵고 곯은 것들도 덕분에 얼마만큼 가셨습니다. 모든 게 관계없지만 그 관계없다는 말이 가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김진균 성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내내 투쟁하시던 때와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가 분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가 산재치료 중 병원 난간에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기억하시죠? 작년에 6명의 노동열사를 보냈습니다. 34년 전 전태일 열사의 유서와 김주익 열사의 유서 박일수 열사의 유서가 변하지 않은 나라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노동자가 아닙니까? 당신의 어머니는 노동자가 아닙니까? 당신의 아버지는 노동자가 아닙니까? 손잡고 기대면서 함께 가야할 사람들을 우리가 차별하고 있습니다. 겨우 나도 노동자인데 그 앞에 ‘비정규직’이 붙으면 사람이 아니게 되는 세상입니다. 노동자라는 이름에 누가 그 쓰디쓴 모욕과 굴레를 덧 씌우고 있습니까. 국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우리는 침략전쟁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나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 됐고, 아무도 내가 어디에 섰는지 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 야만의 시대를 침묵해야 합니까. 나는 나와 관계없는 데도 못 견디겠습니다. 그것을 이유로 또 못 견디겠습니다. 나는 내가 약자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약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약자라는 것을 알지만 당신과 내가 함께 있는데도 약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경계가 아니라면 그 선을 애써 무시할게 아니라 이제는 허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홀로 걸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다른 고귀한 발들과 보조를 맞춰 함께 걸으면 우리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사빠띠스따의 절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지 맙시다. 제발 죽지 맙시다. 살아서, 갈기갈기 찢기고 짓씹혀도 그래도 살아서 싸웁시다.

진보넷에 실린 박일수 열사 유서입니다.

http://cast.jinbo.net/news/show.php?docnbr=29893 故 박일수씨가 남긴 유서 전문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 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좃지나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 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차별과 멸시, 박탈감, 착취에서 오는 분노.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현대 좃지나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패, 착취, 비리. 직영노동자들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하는 행패와 멸시, 고위 관리직 이사부터 하위 관리직 팀장, 반장까지 안 썩은 곳이 없고, 상납이라는 추악한 고리에 향락 접대에 연결 안된 개새끼들이 없다. 윗물이 그러하다면 협력업체 총무, 경리까지 노동자 임금을 도둑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현실 피해자는 하청노동자다. 상납되는 검은 돈,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피를 빨고 돈 잔치를 하고 있고, 향락접대비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땀과 피로 술 퍼마시고 개지랄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좃지나 공장에서 관행처럼 뿌리 박혀있는 추접하고 더럽게 썩어있는 현대 좃지나 공장의 현실이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 존엄성은 개만도 못한 처지로 땅에 떨어져 있고, 크게는 이 나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우롱하고 기만하는 처사이다. 이렇게 썩고 곪아터진 현대 좃지나 공장 관리자 개새끼들부터 근원적으로 개혁이 되어야 한다. 2003년 12월 29일 오후 6시경, 현장 복귀 문제와 체불임금 문제로 000 000는 인턴기업사장 박진용과 논의하던 중 나에게 한 말이었다. ‘연말이 되어 윗사람 떡값문제로 바쁘다’고, 이런 더럽고 추악한 행태는 인턴기업 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 좃지나 공장 전체의 실태다. 대한민국 대기업 하는 곳 썩을 대로 썩어있는 현대 좃지나 공장을, 이 암울한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직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현대어용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떻게 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 비정규직노동자로 살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개좃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신성해야 될 일터가 부정, 부패, 비리, 착취, 멸시, 불신, 박탈감 이런들이 현대 좃지나 공장의 현실이다. 2003년 7월 22일 유인물을 통해 처우개선, 차별 경영을 개선해 달라 강력히 요구한 바 있으나 바른말하고 목소리 내는 자는 작업을 시키지 않고, 부당해고로 문제를 숨기려 하는 자본가와 관리자들 행패와 더럽고 추접한 작태를 당하면서 이 억울함과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이런 억울함을 노동부에 고발해 봐야 부당해고비 몇 푼 받으면 끝난다. 근원적인 문제개선은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손가락이나 빨아라 라는 차별경영을 비통한 마음으로 당하면서 또 한번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한다. 이렇게 악질 차별경영을 하는 회장 및 고위관리자 개새끼들 대가리 두 조각 내어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인턴기업사장 박진용 집안 삼촌인지 사촌인지 현대 좃지나 공장 이사로 재직 중 얼마전 미포조선 이사로 옮긴 줄 알고 있다. 웃기는 것은 미포조선에다 업체를 하나 더 문을 연단다. 업체사장 2년만에 땅값 비싸다는 삼산동에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고 친동생에게는 땅값 비싼 삼산동에 식당을 차려주고 고향에다 땅을 사고, 차를 바꾸고, 미포조선에다 업체를 차리려면 공탁금만 해도 얼만데 일반 사람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런 악질 협력업체 사장은 이사회에서 매장되어야 한다. 인터기업 노동자인 후배 한사람. 외국으로 취업 나갈 기회가 있어 근로자 원천징수 사본이 필요해 세무서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인터기업 근로자로 등록이 안되어 있다 한다. 근무한지가 일년이 넘었는데도 상황으로 보아 세금탈세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현대 좃지나 공장 사내복지 시설을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는다. 하청노동자는 콘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 찾아 헤맨다. 한 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되어 있는 건물 내부에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 90%가 불법파견근로로 현장에 투입되다 보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를 받는다. 작업하기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에게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대 좃지나 공장 현실이다. 직영노동자 몇 백명 중에 한 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고와 공동체 의식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 측은지심 시각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직영노동자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하청 비정규직 현실이 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그리고 현대 좃지나 공장 외부 일반적인 사람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족들조차 이 나라 지도자들 법을 집행하는 고급공무원들 노동자 바람막이를 해줘야할 노동부 공무원들도 몰라서도 안하고 알아도 안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이렇다 하여 나도 그렇게 살수는 없다. 이 나라가 요만큼이나 민주화가 된 것은 세상이 쥐꼬리만큼 변하게 된 것은 이 사회 구조를 아파하고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안 주어지는 이 현실에 약자가 보호받아야 되는 법이 외면하는 현실에 한계에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자, 개혁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식 남겨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고통스럽게 떠나버린 열사들이 있었기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이 사회가 노동자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어야 한다. 부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박일수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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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날아라 썬더보드호

23

보일러 사태(사태? 암 사태지)로 영 개운치도 않고, 만원 전철에서 사람들에 치여 짜증이 갑절이 되는데, 순간 저어기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 ‘날아라 날아라 썬더보드호 비추어라 비추어라 천년여왕아~♬’ 집에 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한다. 역시! 그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무한한 향수를 돌보는 이들이 있다. 소리바다에서 김국환 아저씨가 부른 천년여왕과 은하철도999를 다운 받는다. 하록 선장은 검색이 되질 않고 있어. 애꾸눈 선장 애꾸눈 선장♪♩ ~ 으아아 듣고 싶다!
일요일마다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눈곱 떼고 TV앞에 자리를 틀어잡고 한주를 손꼽아 기다리다 본 만화, 우주해적 캡틴 하록, 천년여왕, 은하철도999 등등 마쓰모토 레이지가 준 내 유년의 선물들. 이젠 대강의 내용도 가물가물 하고 인물들의 이름이나 겨우 기억하는 정도지만, 그 어린 날의 주변들이 생각에 생각을 붙들고 온다. 손 트고 콧물 질질거리던 겨울, 털귀마개, 벙어리장갑, 썰매, 그게 전부인 것 같던 세계 속에서 만난 메텔과 철이 하록선장, 안드로이드들.
오랜 반과거들로, 얼토당토않게 온 기억들로 숨통이 트인다. 이렇게도 하루가 위안이 되는구나. : )
Galaxy Express 999
마쓰모토 레이지 작품들간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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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의 묘약

29

‘토요일이네‘라고 짧게 뱉는 말이 한 주의 긴장감을 일순 풀어버리는 탄성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주 토요일, 좀 더 편히(여기서 얼마나 더 편해질 수 있을까 만은)쉬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보일러 공사를 구경 참견 세면 먼지를 들이마시며 얼렁뚱땅 보낸 견적이 43만원 이었다. 주말 비용치고는 꽤, 꽤? 좇나 많이 나갔지만 앞으로 아껴가며 잘 살아야지 위안하며 넘겼다. 겨우 넘겼단 말이다.
사흘 후 아랫집에서, 물이 또 새요,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옹송크려지더만 습관처럼 몇 날이 아프다. 오늘 드디어 토요일, 끔찍한 토요일, 다른 시공사를 찾았다. 견적 80만원(합계 123만원) “이것도 갈아야 하고 저것도 갈아야 하고…….” 이렇게 갈다간 가을에 풍년 나겠어 얼쑤. 300D를 포기하고 ‘그래 내 주제에 무슨 dslr이야’하며 D70이 나와도 ‘에잇 역시나 그림의 떡이야’ 하며 ‘내 주제를 알자 알아야해’ 하며 그렇게 이불 뒤집어쓰고 하며하며하며 꾹꾹 참았는데, 보일러만 멀쩡했어도 다 살 수 있었어. 설레고 행복에 겨워 ‘토요일이닷’ 탄성을 지르며 아무리 추워도 출사를 계획하고 ‘이까짓 세상쯤이야 다 찍어 버려’, 그렇게 깔봤을 텐데.
공사는 하루 종일 걸릴 것이래. 그래서 오늘 할 수가 없고 내일(내일? 일요일? 일요일은 빨간 날이잖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것 같데, 아랫집에 물이 흥건하니 오늘은 우선 보일러를 잠그라네. 온수는 더더군다나 써서는 안 되고, 오늘의 서울 날씨, 온도 최고-1℃, 최저 -7℃, 마음은 절대온도 0K,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아. 진공 상태가 된 머릿속을 수직 운동하는 단어를 멈출 수가 없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 머리를 뚫어도 좋으니 꺼져버리란 말이야.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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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24

1. 레비나스에서 비극이 불가능한 이유.

필립 네모가 "어떻게 사유가 시작되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레비나스는 "이별이나 폭력적 장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의 단조로움에 대한 의식, 이와 같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나 망설임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고통, 비극이 바로 사유의 시작임을, 특히 레비나스적 사유의 시작임을 암시해 준다. 레비나스 고통의 철학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점에서 칸트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1) 변신론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2) 오직 도덕적 악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한계 안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며 (3) 윤리적 맥락에서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4)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 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변신론의 종말은 어떤 논리로 논박되었거나 또는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비합리적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특히 아우슈비츠와 같은 20세기 사건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신론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보고 있다.

변신론의 몰락으로 야기된 것은 (적어도 서양 전통 안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이제 어떠한 의미, 어떠한 유용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결국에는’ 좀 더 나은 선을 이룩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론이 변신론이었고 이것이 무너지자 이제는 고통의 의미, 고통의 유용성 자체가 또다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이렇게 못박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다. 고통, 비극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 비극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레비나스에서 윤리적 사실주의의 한계

레비나스의 핵심적인 윤리관 중의 하나는 "타인을 위한 나의 의로운 고통"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나의’ 고통 또는 ‘너의’ 고통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괴로워한 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한 무의미한 고통이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고통 또는 ‘우리의’ 고통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통을 뒤집어 놓는다. 그의 관심은 내가 받는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받는 고통에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관심은 타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물음에 관련해서 관심의 축을 ‘나’ 또는 ‘우리’로부터 ‘타인’으로 회전시킨 점에서 레비나스의 독창성이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관심 축의 전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받는 고통 중에서, 예컨대 아내나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가운데, 자기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각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발견의 과정은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고통 자체가 아무리 집단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고통 자체로서는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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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ls / 기타노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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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ls

사랑은 단순한 신체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특히 대상을 열렬히 사모하는 경우에,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다. 또 사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증거하는 힘이기도 하다. – 메를로 퐁티

돌스 (Dolls) / 기타노 다케시 – 타자와 만나기, 사랑하기
영화는 라는 로 시작되고 있다. 이 분라쿠를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보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공연을 담은 영화를 보고 있다. 그보다 바깥에서 나는 이 영화 Dolls를 본다. 메이도노 히캬쿠가 끝나면서 인형극의 두 주인공인 추베에와 우매가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내 시선이 머물게 되는 곳이고, 나와 두 인형 사이의 간극(분라쿠와 그것을 공연장에서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것을 담은 영화를 보는 영화 속 사람들)이 허물어지는 곳이다. 간극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보일 몇 개의 짧고 진부한 이야기들이 영화 ‘속의’, 분라쿠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나도 현실에서는 이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담론은 시작된다. 타인과 만나서 엮이는 것 말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가는 마츠모토, 그는 앞으로 보장된 삶을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정신이 나간 옛애인(사와코)에게로 간다.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뒤 붉은색 끈으로 서로를 묶는다. 사랑을 위한 최초의 준비는 현재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에서부터, 나 ‘이외’의 것을 ‘나’와 묶으면서 시작된다. – 사랑의 관계로 묶인 타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당신에게 결핍된 단 하나의 존재이다.

dools

추억의 속도는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다(dolls). 오직 묶인 끈만이 있다. 감독은 관객에게 당신들의 체험을 끄집어내라고 한다. 얼굴의 빈자리는 관객(사랑의 제3자)을 위한 자리이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무엇보다도 끈으로 엮인 유일한 존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얼굴(표정)을 잃는 것이다. 동시대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친다. 바람개비는 무심히 그러나 격렬히 돈다. 그리고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가면’인가. 교통사고의 상처를 안고 모습을 감춘 아이돌 스타 하루나. 그녀를 몇 년째 흠모하는 소년(누쿠이)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그녀를 찾아간다. 눈을 찌름으로써 소년은 ‘타인’에서 ‘타자’로 위치를 이동하게 된다. – 타인이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이라면 타자는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 감독은 계속해서 당신은 사랑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 사랑은 하루나(타자)와 누쿠이(나) 사이의 불공평에서 출발한다.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내 안에 가둘 수 있는 눈을 잃은 후에, 모든 주도권을 잃은 후에 현현한다. 누쿠이야 말로 하루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소통 가능한 타자이다. 우리는 ‘나’를 온전하게 알아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던가. 상호성이 더는 신기루나 오해 소강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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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들고 30년 동안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료코), 추억은 멈추지 않고 거슬러 오래전 약속을 끄집어 온다. 문득, 자신을 끝까지 기다리겠다던 장소에 도착한 남자(히로) – 기억은 거짓말처럼 옛사랑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서로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랑은 모든 틈을 메우고 망각시킨다(고 믿는다.) 그(그녀) 역시 행복하다. 생애 어느 때보다, 그녀(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만으로 ‘가장’ 행복하다.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한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울림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인 것이다. 엄청난 우연들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구조 자체이어야 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단풍을 들이민다. 단풍은 사랑의 색깔이다. 아픈 시간들, 4월의 바람과 뙤약볕의 여름을 지나고 나서야 얻은 핏빛의 색깔 –  당신은 저 아름다운 단풍을 시들 때까지(시들지 않는 단풍은 없다.) 지켜보겠는가, 가장 붉게 피었을 때 박제시키겠는가? 사랑은 소멸의 시효를 가지고 있다. 소녀(하루나)와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누쿠이)은 사고로 죽는다. 그 죽음은 소년을 계속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지속시켜 준다. 그는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단풍처럼 시들지 않을 것이다. 옛사랑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야쿠자 두목은 킬러의 총에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만을 안고 죽음에 다다른다. 최고의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것이 설사 핏빛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음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킨다. 탐미적 수사 혹은 사의 찬미라고 말하며 ‘이것도 사랑일 수 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감독은 찬물을 쏟아 붙는다. 소년이 자신의 사랑을 동결하며 흘린 핏 자국을 그것이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비누거품으로 쓱쓱 문질러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이돌 스타와, 옛 애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 사랑은 주관적 사유만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관계의 끈으로만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남기마련이다. 그들의 행복만큼 ‘딱 그만큼’의 고통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 사랑의 그림자는 고통으로 – 타자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남는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환희는 없다.

dolls
빨간 끈으로 서로를 묶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츠모토가 사와코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장소, 그들의 추억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장소)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반과거’ 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이다(하루나를 위한 하모니카, 히로를 위한 도시락, 사와코를 위한 목걸이). 사랑의 정경은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처럼 뒤늦게야 만들어진다. 하지만 토스카의 아리아가 울려야 할 시간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구속도 없이 완전하다. 이 사랑은 어떻게 보존되거나 혹은 되돌릴 수 있을까. 그들은 처음으로 손을 맞잡으면서 사랑(사람)의 얼굴(표정)을 되찾는다. – 이것이야말로 기타노 다케시의 대답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달갑지 않은 사명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똑같은’ 생의 무게를 요구한다. 함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아파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그 온전한 사랑은 아무런 목적(표정)없이, 엮었던 관계의 끈이다. 그 끈은 누구도 남아서 더 고통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고통(육체)을 지고 죽음까지 즉시 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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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 무협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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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무협학생운동 표지
김영하 무협학생운동

김영하의 등단 작품은 누가 뭐래도 95년에 발표한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어설픈 시뮬라크르와 나르시시즘 그리고 반전을 적절하게 섞여 나온 퓨전 소설. (제목도 그런가? 김이소의 ‘거울 보는 여자’와 ‘칼에 대한 명상’을 싹둑 잘라서 붙여 논 듯한, 김이소 소설이 나중에 나왔을까? 웃자고 한 말이니 패스 ^^)
김영하의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 남진우를 대상으로 한 거 아니냐는 의혹을 남겼던『흡혈귀』? 일그러진 욕망과 판타지가 뒤덮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니면 김영하 스스로 최고로 꼽는 『검은 꽃』? 무엇이어도 좋다. ‘김영하의 소설엔 서사가 없어’라는 평은 『검은 꽃』으로 시들었고, 도시에서 자라서 어릴 적의 경험이나 입담이 부족하다는 소설쓰기의 핸디캡은 도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다. 작가 후기가 소설 전체를 반전시켜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썩 개운하진 않지만, 『아랑은 왜』를 떠올려 봐라.
스스로 김영하의 팬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의 소설 아닌 것도 찾아서 읽어보고 그의 궤적을 쫒고 있겠지. 나름대로 전작주의자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김영하의 첫 번째 소설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등단 작이 첫 소설일까? NO
꽤 오래전 절판 되었고, 김영하의 이름이 한층 부각되면서 다시 찍어내자고 했다지만, 본인이 크게 탐탁지 않았다던 소설이 있다. 『무협 학생운동/ 김영하 / 도서출판 아침 / 1992』
이게 뭐야 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말하자면 80년대 학생운동을 무협소설의 형식으로 극화한 것이다. 그도 가능 하겠다싶은 것이 당시에는 군부독재라는 악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선의 이분법이 들어맞았으니, 즉 적과 아군이 분명했으니 꽤나 재미난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공안부 짜바리들이 그랬단다. “이젠 x발 무협지 읽으면서 니들 잡으러 댕겨야 하냐?”.
73억 꼼쳐뒀다 발각된 전두환은 전두마왕으로 노태우는 노갈, 안기부는 안기마귀, 백골단은 백건단, 주사신공의 그 최고 일절 자주권… 등등 얼핏 보면 아주 흥미롭지만 더도덜도말고 여기까지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도저히 ‘그 김영하가 이 김영하 맞아?‘ 라는 생각을 떨 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김영하는 잘 쓰는 정말 재밌게 말하는 작가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이 소설은 김영하를 통시성안에서 보게 해준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힘들었을 일이 주르륵 멋대로 연상이 되니 말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쓰면 늘기 마련이다’의 최고의 예가 될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
김영하는 진행형일까? 어디로?『무협 학생운동』 작가 후기의 끄트머리를 가져온다.
“…… 그리고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한 때는 같은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하였으니 지금은 자신의 등 뒤에 깔린 쇠사슬을 끌며 최루탄 연기 가득한 하늘로 날아간 영원한 이름, 한열이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
발굴지 : 일산 / 집현전 (약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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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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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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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무때(주방용) – 책 표지를 닦는 게 가장 탁월한 세제 중 하나이며 냄새가 역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세제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닦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동네 ‘무조건 천원 코너’에 가시면 안경 닦는 천 비스름한 거 살 수 있습니다. 안경 닦는 천보다 두껍고 크죠. 이 두 가지가 준비되면 대부분 책을 새책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물파스 – 책 표지에 볼펜이나 사인펜 자국을 지울 때 물파스를 한 번 바르고 닦습니다. 아주 말끔해지죠. 가려운 데나 벌레 물린 데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입니다.
도서관 인장이 찍힌 책
– 책 위에 아래에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도서관 인장이 찍혀 있는 책을 만나면 아찔하죠. 유한락스를 이용합니다. 초보자에게 약간의 무리가 있어서 처음에 할 때는 두 명이 함께 하는 게 좋습니다. 우선 물러터진 칫솔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마른 헝겊. 유한락스를 콜라 뚜껑만큼 콜라 뚜껑에 담은 다음, 동생이나 집에서 노는 사람 아무나 데리고 와서 책을 꽈악 누르라고 하면서 칫솔에 유한락스를 발라 한번 살짝 쓰으윽 칠해줍니다. 바로 마른 수건으로 유한락스를 닦아 냅니다. 아주 적은 양을 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책이 울어버릴 수 있습니다.
책 첫 장에 도서관 인장을 도저히 ‘못 참겠다‘하시면, 그 뒤에 안 쓰는 종이를 데고 유한락스로 살짝 문질러 주면 됩니다. 종이를 대는 이유는 뒷장이 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등에 스카치테이프 자국
책이 삐까뻔쩍하다가, 한 부분만 누렇게 뜬 경우가 있죠. 안은 한번 펴보지도 않아서 새 책인데, 겉에 그 누런 자국 때문에 이걸 살까 말까 망설이는 분을 위해서 특별한 세제를 소개합니다. 홈스타(욕실용)을 사용해서 닦아주면 그 누렇게 오래된 절대 지워질 것 같지 않은 때가 가십니다. 홈스타 같은 경우는 책 전반에 사용하는 것은 안 됩니다. 세제 자체에 돌가루 같은 게 있는지 책이 긁힐 수 있습니다. 여하튼 누런 부분만 살짝!
사포 – 흔히 빼빠라고 하죠. 잘 이용해야 합니다. 잘 못하면 책 전체가 뚱뚱해지고 보기 싫어지거든요. 두 가지를 준비합니다. 알이 고운 것과 중간 정도를 이용합니다. 책 위아래의 먼지를 털어 낼 때 쓰는 게 좋습니다. 글씨 지우려고 하다간 책이 망가지기 십상이니, 어지간하면 먼지 정도만 털어내는 데 이용하세요. 먼지가 10년쯤 묶은 외서 하드커버에 아주 적격입니다. 종이의 원래 색깔을 찾아 주죠. 한 30장 정도를 단위로 사포 질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한꺼번에 하면 책이 싫어하겠죠.
막강파워 절단기
누가 쓰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지만 가끔 실뜨기하듯 책을 깎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신집중하고 수양을 오래해야지 가능하죠. 책장에 묻은 오래된, 묶은 남모르는 자국, 누가 지거 아니랄까 봐, ‘94211-.. 어쩌고’하며 이름과 학번을 매직으로 써 놓은 책에 최고의 효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학교 앞 제본소 같은 곳에서 잘라달라고 하세요.
주의! – 대개의 책은 겉표지에 살짝 코팅이 됐습니다, 코팅이 안 된 책들도 있죠, 코팅 안 된 표지를 위의 세제를 썼다가는 아작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 있던데, 조심하시길. 코팅 안 된 책은 지우개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때를 끈질기게 지우개로 지워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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