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위한 운반 가방 / 도나 해러웨이

도나 해러웨이의 <Receiving Three Mochilas in Colombia Carrier Bags for Staying with the Trouble Together>, 2019 를 옮긴 겁니다.  어슐러 k. 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을 인용하는 부분들은 이전 번역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콜롬비아에서 세 개의 모칠라를 받기
함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위한 운반 가방
Receiving Three Mochilas in Colombia
Carrier Bags for Staying with the Trouble Together
Donna Haraway 도나 해러웨이 (부깽 옮김)

어슐러 K. 르 귄을 기리며

1980년대 후반 어슐러 K. 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을 처음 읽었을 때, 그 글은 내 존재 자체를 뒤흔들었다.((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은 진화론 속 서사에 대한 내 사유와, 『영장류의 시각: 현대 과학 세계의 젠더, 인종, 자연(Primate Visions: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dern Science)』(뉴욕: 라우틀리지, 1989)에서 영장류 행동 연구의 역사 속 ‘여성 채집자’라는 형상을 사유하는 방식을 형성했다. 르 귄은 인간 진화의 운반 가방 이론을 엘리자베스 피셔에게서 배웠다. 그 시기는 1970~1980년대, 페미니즘 이론 속에서 크고 대담하며 사변적이고 세계적인 이야기들이 타오르던 때였다(엘리자베스 피셔, 『여성의 창조(Women’s Creation)』, 뉴욕: 맥그로힐, 1975).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처럼,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또한 SF적 실천이었다. 이 글에 인용된 르 귄의 문장들은 모두 Ursula K. Le Guin,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런던: Ignota, 2019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도, 거대한 위험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삶의 이야기들을 매듭 짓는 과정 속에서 여전히 나를 풀어헤치고 다시 엮어낸다. 2019년 8월, 나는 보고타, 부카라망가, 산타마르타에서의 강도 높은 2주간의 현장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류학, 과학기술학, 예술, 환경인문학 분야의 동료이자 친구들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그들의 작업에 참여시켰다. 그들의 작업은 다음을 위한, 그리고 다음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땅과 물의 보호와 회복, 토착민 공동체의 번영, 도시 거리 사람들을 위한 비폭력적 공간 만들기, 작물 파괴와 마약 전쟁, 개발 사업으로 삶이 무너진 농민들에 대한 보상, 아프로-콜롬비아인들의 삶과 문화를 지지하는 일, 깊고 넓은 자연적·사회적 정의와 돌봄의 실천. 이토록 겹겹이 쌓인 복잡성과 되살아나는 고통의 땅에서 내 친구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밀한 평화와 공적인 평화를 꿰매고, 매듭짓고, 짜고, 수놓으며 일하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다시금 풀려나가더라도 말이다. 콜롬비아의 내 친구들은 뼛속 깊이 알고 있다. 르 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일의 중요성을.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하는 일을.

우리가 다른 이야기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다른 개념들을 사유하기 위해 어떤 개념들을 사유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로보로스가 다시금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용의 시간(dragon time) 속에서 세계 짓기(worlding)가 스스로 이어가는 방식이다. 용의 용감한 제자였던 르 귄의 이야기들은 살아 있는 것들의 재료를 모으고, 나르고, 이야기하기 위한 넉넉한 가방이다. “잎사귀, 박 껍질, 그물, 주머니, 띠 천, 자루, 병, 냄비, 상자, 용기. 담는 것. 받는 것.”

그런 상호적인 이야기들을 건네며, 나의 동료들은 나에게 세 개의 아주 다른 담는 가방, 세 개의 모칠라(mochila)를 주었다. 그것들은 ‘다르게 살아가고 죽어가기’의 지속적인 과정을 위해 서로 함께-되기(becoming-with)를 길러내는 데 필요한 특별하고 강력한 것들을 모으기 위한 가방들이다. 이 가방들이 모으는 이야기들은 죽이는 이야기들(the killing stories)(([옮긴이] 죽이는 이야기(the killer story)는 ‘멋진 이야기’(죽인다!)와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닌다.)), 생명을 빨아먹는 무기화된 과학과 기술, 마약과 돈에 흠뻑 젖은 흡혈 시장들, 그리고 역사를 자기 형상대로 빚어내려 애쓰는 모든 찌르는 이야기(prick tales)(([옮긴이] “prick tales”은 어슐러 K. 르 귄의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에서 “막대기와 창, 칼, 즉 치고 찌르고 후려치는 긴 것들”로 은유된 남성적 영웅 서사를 비틀며 등장한 표현이다. prick은 속어로 남성 성기이자 오만하고 하찮은 남성을 가리킨다. 해러웨이는 이를 과학·기술·자본이 결탁한 정복과 폭력의 서사, 곧 ‘남근적 이야기들’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Prick,”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Prick_(slang) ))들을 잠재울 수 있다. 이 가방들 중 어느 것도 살육의 들판(killing fields) 바깥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정반대다. 그 각각은 모칠라를 만드는 이들과 그것을 지니는 이들을 지금, 이 위태로운 세계들 속에 위치시킨다. 모칠라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한다. 이 운반 가방들은 그들의 사람들을 더 세계 속의 존재로, 그리고 지금 진정 무엇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여전히 다르게 될 수 있는지를 분별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각각의 모칠라는 두터운 현재와 풍요로운 미래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삶과 죽음의 방식들을 위해 역사를 다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절실한 질문으로부터 자라나며, 또한 그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 르 귄의 통찰에 따르면 이야기의 적절한 형태란 의미를 담고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품는 속이 빈 자루와 같다. 각각의 모칠라는 씨앗과 별의 세계에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gripping tales)와 기묘한 리얼리즘(strange realism), 진지한 소설(serious fiction),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옮긴이] SF는 도나 해러웨이가 확장한 개념으로,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을 넘어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실뜨기(String Figures),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등을 포괄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SF는 “서로 얽히고 엮이는 존재들과 무늬들을 꾸며내며, 서로 함께-되기(becoming-with)의 실천을 지속하는 방식”이다. 즉, 세계 짓기(worlding)의 과정으로서, 따라가고 엮어내는 사유이자 실천이며 이야기하기의 형식이다.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크툴루세인에서 친족 맺기』(더럼: 듀크 대학교 출판부, 2016), 2-3쪽) ))를 담는 가방이다. 이 세계들은 다양한 종류의 인간과 인간-이상의(more-than-human) 사람들, 그리고 서로를 죽이고 행성을 메마르게 빨아먹는 대신 그보다 더 나은 일들을 하는 종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나는 각각의 모칠라, 각각의 운반 가방이 나에게 몸으로 느끼게 해준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려 한다. 이 가방들 중 어느 것이든 들거나 몸에 두르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응답하고 서로 함께-되는(become-with) 능력들의 매듭짓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림 1.
1. ‘플로르-세르(Flore-Ser)’는 말 그대로 ‘꽃이 되다(flower-be)’를 뜻하며, ‘florecer’, 즉 ‘번성하다’라는 스페인어 단어처럼 들린다. 이 말은 물과 생명을 수호하는 여성 협회(AMARÚ)의 여성들이 만든 파란 리넨 가방에 수놓아져 있다.

2. 천연색 양모의 넓은 줄무늬 가방은 시에라 네바다 데 산타마르타의 아루아코(Arhuaco)족 연장자 여성이 정교하게 매듭지어 만든 것이다. 그녀의 손녀 아티(Ati)는 산타마르타의 막달레나 대학교에서 원주민 학생 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 가방을 민족지학자 윌리엄 마르티네스 두에냐스(William Martinez Dueñas)와 아스트리드 로레나 페라판 레데스마(Astrid Lorena Perafan Ledezma)에게 팔았다. 두 사람은 나의 콜롬비아 방문을 도왔고, 그 가방을 내게 선물했다.

3. 녹슨 붉은빛의 기하학적 무늬가 있는 모칠라는 콜롬비아 북동부 라과히라(La Guajira)의 와유(Wayúu) 여성들이 면사를 코바늘로 떠서 만든 것이다.

내 첫 가방을 ‘플로르-세르’라 부를 것이다. 그녀는(([옮긴이] 플로르-세르(Flore-Ser)는 ‘태어났다(born)’는 표현과 인칭 대명사 she로 지칭됨으로써, 해러웨이가 말하는 기이한 친족(oddkin)의 잉태 과정을 수행적으로 드러낸다.)) 이미 앞면에 모호하게 가정법이자 명령법인 동사 형태로 수놓인, ‘번성’을 뜻하는 이 유망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친구이자 동료인 타니아 페레스-부스토스(Tania Pérez-Bustos)는 2019년 8월 보고타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온 직후 이 가방을 내게 주었다. 플로르-세르는 환경 정의와 성적·재생산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한 연대체의 직물 행동주의(textile activism) 속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내가 본 것은 청록색 자궁 안에 섬세한 흰 꽃뿐이었다. 2주 동안 나는 민족지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타니아가 기이한 친족(oddkin)(([옮긴이] ‘기이한 친족(oddkin)’은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혈연이나 종(種)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사물, 이야기와 관계가 서로에게 응답하며 얽히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 ‘기이한 친족’은 첫 번째 모칠라 플로르-세르를 중심으로 구체화된다. 플로르-세르는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짜는 직물적 관계망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며, 그 안에 해러웨이 자신과 동료들이 ‘담김’으로써 새로운 관계적 친족의 일부가 된다. 플로르-세르는 이러한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이자, 그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응답하는 하나의 기이한 친족(oddkin)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의 잉태에 관해 가르쳐 준 것을 보고 느끼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 가방에 내 콜롬비아 방문의 조각들을 하나씩 담아냈다. 다종(multispecies)의 환경적·사회적 정의와 돌봄을 위한 그들의 일과 놀이 속에서, 콜롬비아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타니아는 섬유 예술과 그 실천자들을 공예 디자인과 공학 디자인 안에서 함께 엮어낸다. 그녀는 특히 콜롬비아 카르타고의 칼라도(calado) 자수에서, 삶과 직물의 ‘풀어헤침과 수선이라는 얽힌 실천들(entangled practices of unraveling and mending)’을 연구한다.((타니아 페레스-부스토스, 「돌봄으로 사유하기: 공예 자수와 기술의 민족지학에서 풀어헤침과 수선」, 『지식의 인류학 저널(Revue d’Anthropologie des Connaissances)』 11:1, 2017. )) 타니아는 함께 일하는 여성들이, 이 힘든 시기에 천천히 손바늘을 움직이며 꿰매는 일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치유와 파괴된 공동체의 재결속, 그리고 땅과 물, 강제 이주, 여전히 가능한 미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고 전한다. ‘플로르-세르’는 ‘엘 모비미엔토 리오스 비보스 안티오키아(El Movimiento Ríos Vivos Antioquia)’의 여성들이 만든 것이다. 이 가방은 그들의 땅과 물인 카우카강 유역에 건설되고 있는 거대한 수력발전 프로젝트 ‘이드로이투앙고(Hidroituango)’에 맞선 생계 수단이자 저항 수단이다. 이 여성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마지막으로 잘 보존된 건조 열대림 자연문화(naturalcultural) 생태계 중 하나에 속한 다양한 인간들과 수많은 다른 생명 종들로부터 나왔으며, 그들과 연대한다. 이 프로젝트에 맞서 영토와 물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이 여성들은 자신들이 신체-영토(cuerpo-territoria)라 부르는 것을 지키며, 모든 형태의 남성적 지배에 맞서 싸운다. 자수를 통한 이야기하기는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르 귄이 말한 ‘별들의 가방(the bag of stars)’ 속에 삶의 이야기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가방 속에 나와 내 동료들을 담았다. 내가 그 가방을 멘다면, 응답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이 가방을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의 집으로 가져왔다.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수놓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천연색 양모의 넓은 줄무늬를 가진 내 두 번째 가방은 시에라 네바다 데 산타마르타의 아루아코(Arhuaco)족 연장자 여성이 정교하게 매듭지어 만든 것이다. 각각의 무늬는 한 세대의 여성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이야기를 나타낸다. 그녀의 손녀 아티는 산타마르타의 막달레나 대학교(La Universidad de Magdalena) 원주민 학생 협회 회장으로, 이 가방을 민족지학자 윌리엄 마르티네스 두에냐스(William Martinez Dueñas)와 아스트리드 로레나 페라판 레데스마(Astrid Lorena Perafán Ledezma)에게 팔았고, 그들은 나의 콜롬비아 방문을 도왔으며 이 모칠라를 나에게 선물했다. 아티는 그 대학에서 나와 다른 동료들과 함께한 공개 대화에도 참여했다. 오늘날 이러한 가방들은 젊은 아루아코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외부 세력의 지속적인 정착과 개발 계획, 강제된 불법 작물 재배와 정부의 제초제 살포, 암살과 협박, 기후 변화, 생태 관광, 댐 건설, 광산 채굴에 맞서 싸우고 있다. 코기, 위와, 칸쿠아모 등 다른 원주민들과 연대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땅과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 가방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거주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은 나를 삶과 땅을 위한 대담하고 지속적인 매듭짓기에 연결시킨다. 그 가방을 멘다는 것은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일을 의미한다.

세 번째 가방도 비슷한 서사들을 담고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그것들은 죽이는 추상(killing abstraction) 속의 어디에도 없는 아무데도 아닌 곳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장소에 자리한 이야기들이다. 녹슨 붉은빛의 기하학적 무늬가 있는 모칠라는 콜롬비아 북동부 라과히라(La Guajira)의 한 와유 여성이 면사를 코바늘로 떠서 만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이 가방은 콜롬비아 인류학자 레오나르도 몬테네그로(Leonardo Montenegro)에게서 받았다. 그는 앵글로-아메리칸(Anglo-American), 글렌코어(Glencore), BHP 빌리턴(BHP Billiton) 등 다국적 기업들에 맞서 땅, 물, 생존을 지키려는 와유 공동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상황은 참혹하다. 아이들과 동물들이 물과 식량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끝없는 가뭄 속에서 농작물은 타들어간다. 이 빈곤과 갈증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노천탄광인 세레혼(Cerrejón) 탄광의 결과이며, 이 지구를 태우는 연료의 가공과 운송을 위해 물을 끝없이 탐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예컨대 란체리아(Ranchería)강의 댐으로 인해 세레혼은 하루 1,700만 리터의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라과히라의 주민 각자는 하루 평균 0.7 리터의 물만으로 살아가야 한다.((가이아 재단(The Gaia Foundation), 「물, 영토,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받는 콜롬비아 원주민들」, gaiafoundation.org (2019년 9월 15일 접속). )) 광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준군사조직의 살해 위협은 흔하며, 와유족을 그들 조상의 땅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후손들과 원주민 공동체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과 땅을 위해 함께하며, 세계에서 강력한 연대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도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운반 가방 속에 담겼다. 불타는 질문은 이것이다. 필요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함께 말하고, 필요한 세계들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가며, 치명적인 세계들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불에 그을린 듯한 적갈색(burnt umber)의 색조와 무늬를 지닌 이 부드러운 직물의 풍성한 감촉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강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생명을 유지하는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자양분을 제공한다.

나는 필리핀의 현대 수렵-채집민 집단 아그타를 대상으로 한 도발적인 공동 연구로 글을 맺으려 한다. 이 연구는 르 귄이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에서 보여준, 거대한 진화 이야기를 기꺼이 다루려던 그 태도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대니얼 스미스(Daniel Smith), 필립 슐래퍼(Philip Schlaepfer), 케이티 메이저(Katie Major), 마크 다이블(Mark Dyble), 애비게일 E. 페이지(Abigail E. Page), 제임스 톰슨(James Thompson), 니킬 차우다리(Nikhil Chaudhary), 굴 데니즈 살랄리(Gul Deniz Salali), 루스 메이스(Ruth Mace), 레오노라 아스테테(Leonora Astete), 마릴린 응갈레스(Marilyn Ngales), 루시아 빈시우스(Lucia Vincius), 안드레아 람베르그 미글리아노(Andrea Ramberg Migliano), 「협력과 수렵-채집민 이야기하기의 진화(Cooperation and the Evolution of Hunter-Gatherer Storytelling)」,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 8:1853, 2018. )) 연구자들은 오랜 기간 많은 이야기와 이야기꾼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이 공동체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형적인 사회과학적 방법들을 설계했다. 그 결과 아그타 응답자들은 사회에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아무리 유용하고 기능적일지라도, 이야기꾼을 그 어떤 이들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이 발견을 생물학적 적합도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를 고집했다. 뛰어난 이야기꾼일수록 더 매력적인 짝이 되고, 사람들은 숙련된 이야기꾼에게 유용한 것을 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협력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경쟁적 생물학적 번식 이점의 이야기로 설명하는 이런 서사의 끝없는 지배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지만, 이 연구에는 여전히 사랑할 만한 부분이 많다. 연구자들은 숙련된 이야기꾼의 비율이 높은 캠프일수록 협력 수준이 높아졌다고 보고했다.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꾼이 있는 캠프에서 살기를 선호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협력과 성적·사회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른과 아이들 모두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또 듣고 싶어 하며, 그 이야기들은 흥미로운 등장인물들과 풍부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음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뛰어난 채집가보다 좋은 이야기꾼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며, 실제 그들의 행동은 이러한 자기 평가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이야기들은 공감 능력을 확장하고, 타인, 심지어 낯선 이들에게까지 더 환대하는 관점을 키워주는 방식으로 가치가 부여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이야기하기가 인류 진화에서 협력을 조직하고 촉진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는 내가 선호하는 그럴듯한 이야기(just-so stories)들의 토끼굴 속으로 금세 빠져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적어도 아그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꾼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 이 연구는 도발적이다. 만약 그들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설계와 확산 과정에 의미 있게 참여하며, 그 모든 과정이 그들의 안녕에 기여한다면, 더 많은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아그타족(the story-loving Agta)에 대한 이야기를 보편화하거나 실체화하는 것에 단호히 저항한다. 그러나 르 귄과 엘리자베스 피셔, 그리고 잘 빚은 항아리나 정교하게 매듭지어진 가방의 형태를 한 이야기들 속에서 서로 잘 살아가고 잘 죽는 강력한 실천을 노래해 온 세대의 이야기꾼들과 함께, 나는 아그타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이야기하기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삶을 다시 엮고 새로운 형태의 친족(kin)을 만들어갈 가능성들을 모은다. 이야기로 빚어진 이들(The Storied Ones)은 여전히 가능한 번영을 위한 무늬를 변형하고 발명하는 강력한 존재들이다. 플로르-세르(꽃이-되다).

르 귄이 그녀의 짧지만 위대한 에세이에서 우리에게 말했듯이, “때로는 그 [영웅적]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더는 전해지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이 거친 귀리밭, 이 이방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몇몇은, 옛 이야기가 끝날 때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함께 끝장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긴박감을 안고,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와 말을 찾아 나선다.”


참고문헌 (Bibliography)

엘리자베스 피셔(Elizabeth Fisher), 『여성의 창조(Women’s Creation)』, New York: McGraw-Hill, 1975.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영장류의 시각: 현대 과학 세계의 젠더, 인종, 자연(Primate Visions: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dern Science)』, New York: Routledge, 1989.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London: Ignota, 2019.
타니아 페레스-부스토스(Tania Pérez-Bustos), 「돌봄으로 사유하기: 공예 자수와 기술의 민족지학에서의 풀어헤침과 수선(Thinking with Care: Unraveling and Mending in an Ethnography of Craft Embroidery and Technology)」, 『지식의 인류학 저널(Revue d’Anthropologie des Connaissances)』 11:1, 2017.
Daniel Smith, Philip Schlaepfer, Katie Major, Mark Dyble, Abigail E. Page, James Thompson, Nikhil Chaudhary, Gul Deniz Salali, Ruth Mace, Leonora Astete, Marilyn Ngales, Lucia Vincius, and Andrea Ramberg Migliano, 「협력과 수렵-채집민 이야기하기의 진화(Cooperation and the Evolution of Hunter-Gatherer Storytelling)」,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 8:1853, 2018.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오래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하룻밤을 푹 자도 잊히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훌쩍 넘어도 가시지 않는 것.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오멜라스다. 어슐러 k. 르귄의「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오멜라스’는 살렘(오리건)-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그 오멜라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난 것처럼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은 건조하지만 메말라 있지 않다. 스릴이 넘치는 것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지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아’하고 감탄해 버리는 그런 소설들이다. 당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오멜라스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며 여전히 오멜라스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면을 알기 전에는 퍽 괜찮다고 생각해 온 곳. 내게는 이전에 일하던 아드리(adli)라는 곳이 똑 그랬다.

오멜라스는 얼마나 멋진 이상향인가? 성직자 없이도, 군인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곳. 진실을 보기 전까지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곳이다. 오멜라스의 가장 외진 곳 지하에는 한 아이가 버려진 채로 고통받고 있다. 아이가 비참해지면 질수록 오멜라스의 겉보기는 더 화려해진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 그 모든 것은 아이의 처절함과 정반대에 선다. 진실은 오멜라스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직접 겪고도 ‘설마, 그럴 리가’라며 애써 덮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것쯤은 ‘사소하다’며 계속 오멜라스를 누린다. 혹은 떠나는 이들에게 ‘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 오멜라스는 뭔데?’라는 비난을 던진다.

“…….고통스럽다면 반복하라! 그러나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더는 할 말이 없다. 더는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즐거움을 축복할 수도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나듯 하루나 이틀 정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떠나기도 하고,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떠난다. 넷이 함께 떠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아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리고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은.

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 Local Caption *** Ursula Le Guin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서막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 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르 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며,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바뀌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성별이분법 자체가 뿌리째 뒤흔들린다.

르 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의 한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간다.
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두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실수를 하곤 한다.
제1차 에큐멘 조사원 보고서는 겐리 아이 같은 사절단을 위해 충고를 남겨 놓는다.

“여러분이 게센인을 만난다면 남자와 여자가 있는 양성사회에서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성 또는 반대 성 사이의 양식화 된 즉 남녀 간의 상호작용을 기대하고 그들에게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에 상응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성적 상호작용이 보여 주는 그러한 양상은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을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우리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인가?”

게센 행성은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야? 여자야?’ 같은 질문이 아예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어슐러 르 귄은 인간의 성별화 변용을 통해 사회구조와 개개인들이 그들의 많은 부분을 성별 구분을 통한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더불어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에큐멘 조사단원의 보고는 계속된다.

“행성 겨울에 오게 될 선발대원이 아주 침착하거나 나이 든 사람이 아닐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쉬우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남자는 으레 그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여자는 그의 여성다움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겨울 행성에서 그러한 것은 통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만 존중되고 판단될 뿐이다. 그것은 사실 소름끼치는 경험이다.”

어슐러 르 귄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를 통해서 상대방을 성에 상관없이 한 인간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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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아홉 생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마틴’과 ‘퓨’는 ‘라이브라’ 행성 실험 기지에 파견되어 있다. 그 둘의 임무를 지원하고자 ‘10클론’이라는 한 사람의 창자 세포로부터 만들어진 10명의 복제인간이 기지를 방문한다.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복제 인간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그들 모두가 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퓨’가 10클론 중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하는 것을 보고 근친상간인지 자위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자가 개별적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머리와 10개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론의 특성으로 그들은 주어진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해내지만, 결국 사고로 아홉의 클론은 죽고 ‘카프’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카프는 생애 처음으로 ‘다중 자아’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서서히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아홉 생명」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실렸는데, 어슐러 르 귄이 보낸 원본 원고에서 ‘사소한’ 부분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필명 또한 ‘어슐러 K. 르 귄’이 아니라 ‘U. K. 르 귄’으로 표기됐다. 어슐러 르 귄은 이에 대해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자신을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며 성적 편견을 보였던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말한다. 비록 「플레이보이」를 통해 SF가 대중적으로 크게 전파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들의 수준은 소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플레이보이」가 바꿨다는 ‘사소한’ 부분은 ‘마틴’과 ‘퓨’ 두 남성에 관한 부분이다. 어슐러 르 귄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나타내지만, 플레이보이는 이를 흡사 우정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살아남은 카프가 퓨에게 던진 “마틴을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플레이보이」는 “마틴을 좋아하나요?”라고 바꾸어 놓았고, 퓨의 “그래, 사랑해”라는 대답을 삭제했다.

르 귄은 퓨의 “… 우린 서로 외로웠어.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라는 말을 통해, 어떤 젠더 정체성이나 섹슈얼리티를 지녔든 존재들이 서로에게 닿으려는 친밀함과 연대의 가능성을 그린다. 퓨와 마틴의 사랑은 특정한 성이나 규범에 갇히지 않은다. 그저 서로의 외로움에 응답하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어슐러 르 귄의 SF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 곳곳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아나키즘의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상상하라’고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상상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세계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감각과 사고 그리고 관계의 방식을 끌어올린다.

The Birthday of the World

The Birthday of the World
어슐러 K. 르 귄의 「The Birthday of the World and Other Stories」세상의 생일과 다른 이야기들-을 선물 받았습니다. : ) 헤인 시리즈의 결정판입니다!!!? ;;;
Coming of Age in Karhide
The Matter of Seggri
Unchosen Love
Mountain Ways
Solitude
Old Music and the Slaves Women
The Birthday of the World
Paradises Lost
수록 된 단편 중 ‘세상의 생일’은 얼마 전에 번역이 됐고, 르 귄에게 네 번째 네뷸러상을 안겨줬던 solitude와 팁트리상을 받은 Mountain Ways와 The matter of Seggri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중반에 발표한 작품이 다수인데 Paradises Lost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발표하는 것이라네요.
즐겁냐고요? 물론이죠. 게다가 마구마구 설레고 있답니다. 🙂
조만간 리뷰를 올릴게요.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 어슐러 르 귄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1986  (옮긴이 부깽)

 

초기 인류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 온대와 열대 지역에서는, 그 종(種)의 주된 식량이 식물이었을 것이다. 구석기, 신석기, 그리고 선사 시대에 이 지역에서 인간이 먹은 것의 65~80%는 채집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오직 극지방의 북극권에서만 고기가 주식이었다. 매머드 사냥꾼들은 동굴 벽화와 우리의 상상 속을 화려하게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남고 배를 불리기 위해 했던 일은 씨앗, 뿌리, 새싹, 줄기, 잎, 견과, 열매, 과일, 곡식을 모으는 일이었다. 거기에 단백질을 늘리기 위해 벌레와 연체동물을 더하고, 그물이나 올가미로 새, 물고기, 쥐, 토끼, 그리고 다른 엄니 없는 잔챙이들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그리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농업이 발명된 이후 남의 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농민보다 훨씬 덜 일했고, 문명이 발명된 이후 임금 노동자보다도 훨씬 덜 일했다. 보통의 선사시대 사람은 일주일에 약 15시간 정도만 일해도 꽤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15시간만 생계를 위해 일한다면, 다른 일들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서, 아마도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아기도 없고, 만들거나 요리하거나 노래하는 솜씨도 없고, 생각할 만한 흥미로운 거리도 없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매머드 사냥을 나섰을 것이다. 솜씨 좋은 사냥꾼들은 고기 덩어리와 상아 더미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돌아왔고, 그리고 이야기를 가져왔다. 차이를 만든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이야기였다.

내가 야생 귀리 낱알 하나를 껍질에서 씨름하듯 빼내고,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를 그렇게 빼냈다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란 어렵다. 그 사이 모기한테 물린 데를 긁었고, 울(Ool)이 웃긴 말을 했고, 우리는 개울가에 가서 물을 마시며 도롱뇽을 한참 구경했다가, 또 다른 귀리밭을 찾았다… 아니, 비교도 안 된다. 견줄 수조차 없다. 내가 거대한 털북숭이 짐승의 옆구리에 창을 깊숙이 꽂아 넣는 동안, 우브(Oob)는 거대한 상아에 꿰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피가 진홍빛 격류처럼 사방으로 치솟았으며, 매머드가 쓰러지면서 부브(Boob)를 짓눌러 곤죽으로 만들어버렸고, 나는 그 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을 꿰뚫어 뇌까지 관통하는 화살을 쏘았다는 이야기와는.

그 이야기에는 액션(Action)만 있는 게 아니다. 영웅(Hero)이 있다. 영웅은 강력하다. 어느새 들판에서 귀리를 줍는 남자와 여자, 그들의 아이들,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의 솜씨, 사색하는 이들의 생각, 노래하는 이들의 노래까지 모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영웅의 이야기 속에 징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훗날 『3 기니』로 완성될 책을 구상하던 시절, 자신의 공책에 ‘용어집(Glossary)’이라는 제목을 적어두었다.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용어집에서 heroism(영웅주의)은 ‘botulism(보툴리즘)'((식중독의 한 종류))으로, hero(영웅)는 ‘bottle(병)’로 정의되어 있었다. 영웅을 병으로 보는 것, 그것은 냉철한 재평가다.

이제 나는 제안한다. 병이야말로 영웅이다.

단순히 진이나 와인 병이 아니라, 더 오래된 의미에서의 용기,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다.

담을 그릇이 없다면 음식은 빠져나가 버린다. 귀리처럼 싸우지도 않고 꾀도 부리지 않는 것조차도 말이다. 손에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배에 채워 넣는다. 배가 첫 번째 용기니까. 그러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어떨까. 추운 비가 내릴 때, 몇 줌의 귀리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작은 움(Oom)에게도 조금 주어 조용히 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배 한 번 채울 만큼과 한 줌 이상을 어떻게 집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비 속에서 눅눅한 귀리밭으로 가야 한다. 아기 우우(Oo Oo)를 넣어 두고 양손으로 귀리를 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잎사귀, 박 껍질, 그물, 주머니, 띠 천, 자루, 병, 냄비, 상자, 용기. 담는 것. 받는 것.

가장 처음의 문화적 도구는 아마도 담는 그릇이었을 것이다많은 이론가들은 가장 초기의 문화적 발명이란, 채집한 것을 담아 둘 용기와 그것을 나르는 끈이나 그물 같은 운반 도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피셔는 『여성의 창조』(McGraw-Hill, 1975)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 멋지고 크고 길고 단단한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영화((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유인원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쳤던, 아마 뼈였던 그것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살인을 해냈다는 황홀감에 젖어 으르렁거리며 그것을 하늘로 던졌고, 회전하던 그것은 우주선으로 변하여 우주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세상을 수정시키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멋지고 아름다운 태아가 은하수 주위를 홀로 떠다닌다. 물론 남아이다. 이상하게도 자궁도 없고 어떤 모태도 없이 말이다.

모르겠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우리는 막대기와 창과 칼, 치고 찌르고 후려치는 그 긴 것들에 대해 충분히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담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담는 그릇,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위한 용기(容器).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래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니 분명 생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기보다 앞선 것이었을 것이다. 무기는 늦게 나타난, 사치스럽고 부차적인 도구다. 쓸모 있는 칼과 도끼보다도 오래되었고, 꼭 필요한 내리치기, 갈기, 파기 도구와 나란히, 아니 그보다 먼저였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감자를 캐냈는데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갈 그릇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에너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도구와 함께,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으로 가져오는 도구를 만들었다. 나한테는 말이 된다. 나는 피셔가 ‘운반 가방 이론’이라고 부르는 인간 진화 이론의 지지자다.

이 이론은 이론 속에 넓게 깔린 모호한 영역을 설명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론들로 가득한 영역을 피해 간다. (그 터무니없는 영역은 대개 호랑이와 여우, 그리고 다른 강한 영역성을 지닌 포유류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이론은 나를, 개인적으로, 인간 문화 안에 놓이게 해주었다. 그전에는 결코 그런 뿌리 내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문화가 길고 단단한 물건을 사용하여 찌르고, 내리치고, 죽이는 데서 비롯되고 그 위에 정교하게 구축된 것이라고 설명될 때, 나는 그 문화에 특별히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참여하고 싶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릴리언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문명의 결핍이라고 오해한 것은, 여성의 ‘문명에 대한 충성심’의 결핍이다.”) 그 이론가들이 말하던 사회, 문명은 분명 그들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완전한 인간. 내리치고, 찌르고, 쑤시고, 죽이는 인간. 나도 인간이 되고 싶어서, 나 역시 인간이라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조건이라면, 무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죽이는 것이라면, 나는 인간으로서 심각하게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그렇지, 그들은 말했다. 네 정체는 여자다. 어쩌면 인간(human)조차 아닐지 모른다. 분명 결함이 있다. 이제 조용히 해라. 우리가 계속 ‘영웅으로서의 인간(Man) 상승사’를 이야기할 테니.

그러시든가, 나는 말한다. 오트밭으로 걸어가면서. 슬링엔 아기 우우(Oo Oo)를 넣고, 작은 움(Oom)은 바구니를 들고 있다. 당신들은 계속 이야기하면 된다. 맘모스가 부브(Boob) 위로 쓰러졌던 이야기, 카인이 아벨을 쓰러뜨린 이야기,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이야기, 불타는 젤리가 마을 사람들 위로 떨어진 이야기((드레스덴 폭격)), 미사일이 악의 제국에 떨어질 이야기, 그리고 ‘인간(Man) 상승’((the Ascent of Man,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다른 모든 단계들을.

만약 무언가를 담는 일이 인간적인 일이라면, 그것이 유용해서든, 먹을 수 있어서든, 아름다워서든 원하는 것을 가방이나 바구니, 말아 올린 나무껍질이나 잎, 혹은 자기 머리카락으로 짠 그물이나 아무튼 무엇이든 간에 넣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 그리고 그 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더 큰 주머니나 가방,  사람들을 담는 그릇인 셈인데, 그렇게 담아 온 것을 나중에 꺼내 먹거나 나누거나 더 단단한 그릇에 넣어 겨울을 위해 저장하거나 약주머니나 제단이나 박물관,  신성한 것을 담는 장소에 넣어두고, 다음 날에도 아마 거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 만약 그것이 인간적인 일이고 그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인간인 것이다. 온전히, 자유롭게, 기꺼이. 그렇게 처음으로.
우선 분명히 해두자. 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싸움을 피하는 인간도 아니다. 나는 늙어가는, 화가 난 여자이고, 손에 든 핸드백을 세차게 휘두르며 불량배들을 쫓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나 다른 누구도 그런 일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들판에서 귀리를 계속 모으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빌어먹을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차이는 이야기가 만든다. 이야기가 내 인간성을 내게서 숨겼다. 맘모스 사냥꾼들이 들려준 그 이야기, 내리치고, 쑤시고, 강간하고, 살인하는 이야기. 영웅 이야기. 보툴리즘이라는 멋지고도 치명적인 이야기. 죽이는 이야기.((죽이는 이야기(the killer story)는 ‘멋진 이야기’(죽인다!)와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닌다.))
때로는 그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더는 전해지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이 거친 귀리밭, 이 이방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몇몇은, 옛 이야기가 끝날 때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함께 끝장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긴박감을 안고,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와 말을 찾아 나선다.
그 이야기는 낯설다. 죽이는 이야기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지나친 말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온갖 말과 방식으로 삶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창조와 변형의 신화, 트릭스터 이야기, 민담, 농담, 소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인 이야기다. 물론 영웅은 자주 그것을 장악해왔다. 그게 그의 제국적 본성이자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장악하고 거느리며, 그것을 죽이려는 통제 불가능한 충동을 통제하기 위해 엄한 선언과 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자신의 대변자인 입법자들을 통해 이렇게 명령해왔다. 첫째, 서사의 올바른 형식은 화살이나 창의 형식이어야 하며, 여기서 시작해 저기로 곧장 가서 퍽! 하고 목표를 맞히는 것이다(목표는 쓰러진다). 둘째, 소설을 포함한 모든 서사의 중심 관심사는 갈등이어야 한다. 셋째, 그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소설의 자연스럽고 올바르고 알맞은 형식은 자루나 가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고,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약꾸러미와 같다. 그것은 어떤 것들을 서로, 그리고 우리와 강력하고도 고유한 관계 속에 담아두는 것이다.

소설 속 요소들 간의 관계 중 하나는 갈등일 수 있다. 그러나 서사를 갈등으로 환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나는 “이야기는 전투로 보아야 한다”고 쓰고, 전략과 공격, 승리 따위를 늘어놓는 글쓰기 지침서를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운반 가방/배/상자/집/약꾸러미로 생각해본다면, 그 안의 갈등, 경쟁, 긴장, 투쟁 등은 전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 자체는 갈등도, 조화도 아니다. 그 목적은 해결이나 정지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영웅은 이 가방 안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무대나 받침대, 혹은 정상에 서 있어야 한다. 그를 가방에 넣어두면 그는 토끼처럼, 감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SF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이 크고 무거운 자루를 들고 왔다. 내 운반 가방은 겁쟁이들과 덜렁이들, 겨자씨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알갱이들, 그리고 공들여 풀어보면 그 속에 파란 조약돌 하나와 다른 세계의 시간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작동하는 크로노미터 하나와 생쥐의 두개골이 들어 있는 정교하게 짜여 있는 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끝나지 않는 시작들, 입문들, 상실들, 변형과 번역들로 가득했고, 갈등보다 훨씬 많은 장난과 속임수, 함정과 망상보다 훨씬 적은 승리가 있었다. 멈춰버리는 우주선들, 실패하는 임무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생 귀리 껍질을 벗겨내는 일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로 만들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 쓰기가 쉽다고 누가 그랬는가?
만약 SF가 현대 기술의 신화라면, 그 신화는 비극적이다. ‘기술’ 또는 ‘현대 과학’(이 단어들이 흔히 쓰이듯, 검토되지 않은 약식 표현으로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과 첨단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은 영웅적 과업이다. 헤라클레스적이며 프로메테우스적이고, 승리로 구상된 것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된다. 이 신화를 구현하는 허구는 (인간이 지구, 우주, 외계 생명, 죽음, 미래 등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야기일 것이고, 또한 (과거든 현재든 종말과 홀로코스트를 그리는) 비극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술 영웅주의의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이라는-(살상의)-화살 같은 방식을 피하고 기술과 과학을 우선적으로 지배의 무기가 아니라 문화적 운반 가방으로 재정의한다면, 그 부수적 효과 중 하나는 SF를 훨씬 덜 경직되고 폭넓은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프로메테우스적일 필요도, 종말론적일 필요도 없으며, 사실 신화적 장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의 한 장르로 볼 수 있다.
이건 기묘한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도 기묘하니까.

제대로 이해된 SF는, 아무리 웃기더라도 모든 진지한 소설처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과 느끼는 감정, 그리고 사람들이 이 거대한 자루, 우주의 배, 될 것들의 자궁이자 지나간 것들의 무덤,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의 모든 것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묘사하려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인간(Man)을 그가 있어야 할 곳, 사물들의 질서 속 제자리 안에 두기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다. 들판에서 야생 귀리를 넉넉히 거두고 또 뿌릴 시간도 있고, 작은 움(Oom)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울(Ool)의 농담을 듣고, 도롱뇽을 지켜볼 시간도 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모아야 할 씨앗이 있고, 별들의 가방에는 여전히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