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출입국 앞 집회

동계현장 활동투쟁의 마지막 날 출입국 앞 집회에 다녀왔어요. 이주노조를 비롯한 전철연 전해투 학습지노조 성진애드컴 등등 많은 연대단위 분들이 모였고,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그보다 늦게 집회가 시작돼서 주욱 함께 할 수 있었네요.
오늘 집회 중에 몇 가지 당황하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출입국 관리소장의 차가 나가겠다고 집회대열의 한쪽 길을 비키라는 데서 시작됐어요. 정당하게 집회신고를 한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출입국소장차가 나가겠다고 비키라니 기가 찰 일이죠. 출입국 차가 나가기 전에는 차가 들락거릴 때 길을 터주곤 했었어요. 그런데 출입국 소장의 뒤에 있던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시하고 집회를 진행하는데, 뒤차에 있던 어느 아저씨가 나오더니 나가야겠다고 비켜달라고 하며 언쟁이 시작됐고, 같은 이유로 다른 시민들과 계속되는 마찰이 생겼죠. 옆에 경찰들이 있었음에도 집회대열과 몇몇 시민들 간의 충돌을 훔훔한 모습으로 몰라라 하는 경찰들의 행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더군요. 한겨울에 아스팔트로 내몰려서 살자고 니네만 배부르고 등따습지 말고 우리도 좀 살자고 하는 사람들한테 와서 바쁘니 길 좀 트라고 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한참 지나서야 폴리스라인이 쳐지고 집회가 계속될 수 있었어요.

오늘 집회에 있던 동지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어요. 그 분노에 더 많은 사람이 지지를 보내고 함께하고 악착같이 사리 물고 이어가자면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근본적인 문제와 그 정당성도 중요하겠지만 분노가 뻗어가는 방향이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을 하게 돼요. 화를 내지 말고 싸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자는 것이죠. 우리가 분노하는 방식이 우리의 문제의식을 더 빛나게 할 수도 아주 감춰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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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결의문 낭독을 하게 됐는데, 열심히 준비 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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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몸짓패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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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영석 동지 “…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과 오늘도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 모두 제각기 제 길을 가지만 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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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조 까지만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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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조 마숨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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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걸찬 전철연 동지와 이주노조 토너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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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문 낭독 중인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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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시원시원한 발언 멋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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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서 주먹 불끈 쥐는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렸으면 제 길 바쁘다고 비키라는 헛나발은 못 할 텐데 말이죠.

강제추방반대 쿠키를 드세요.

믹스라이스의 지은씨가 만든 프라이팬이에요. 이걸로 만든 쿠키를 먹으면 뭉클할 것 같죠. 22일 11시부터 쭉~ 서강대 도서관 옆에서 작은 대안무역이 열리는데, 이 때 맛보실 수 있어요. 23일 2시부터 국가인권위 앞에서 이주노조 집회가 있는데, 이 때도 이 프라이팬으로 만든 쿠키를 먹을 수 있고, 먹다 남은 것은 국가인권위로 보낼 생각이랍니다. 지은씨의 이런 생각이 아주아주 즐거워요. 외에도 작은 대안무역은 9, 10월 동안 여기저기서 계속 된답니다. 그때 마다 이런저런 구경도 할 겸, 쿠키도 먹으면서 즐거운 난장에 함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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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대안무역에서는 방글라데시의 자히드 공동체에서 보낸 옷가지/액세서리와 함께 지난 8월부터는 샤말 타파가 보내준 네팔의 옷과 액세서리, 네팔의 라디카 동지가 만들고 있는 비즈공예품 등을 함께 판매 하고 있어요. 얼마나 예쁜지 사람들도 작품들을 따라 빛나는 것 같아요. 부스에서 아는 척 하세요, 이것저것 덤으로 마구마구 드릴게요. 마음이래도. 🙂

작은 대안무역 일정 – 쿠키고 드시면서 이쁜 작품들도 감상하시고 비장의 실크스크린도 준비하고 있어요. 실크스크린은 기빙엑스포 기간 동안만 할 예정인데, 티셔츠나 옷가지를 가지고 오시면 거기에 글씨를 새겨드려요. ‘No war’, ‘Stop crackdown’ 또는 당신들이 원하는 아무 글귀나, 당신들의 옷에 당신들의 마음을 새겨보세요.

9월 22일 11시 – 5시 서강대 도서관 옆
24일 서울역 반전국제행동 ?
30일 7시 이프 – 여성전용파티(피도눈물도없는밤) – 선유도 공원 (이 때는 판매는 안 된다고 해서 작은 대안무역의 작품들을 전시하려고 합니다. 여성분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서 맛난 것을 딥따 많이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저런 작품들 구경도 하고 배부르게 먹기도 할 수 있다니 당신들이 부러워요)
9월 30일 ~ 10월 2일 11시 – 7시 대학로(부스는 흥사단 앞 정도) 기빙 엑스포(이주노동자 방송국, 버마행동과 함께해요.)
10월 3일 나눔 꽃 아시아 문화축제 – 파주 (‘아시아의 친구들‘과 함께해요.)
8일 제7회 월경 페스티벌 – 홍대 (‘피자매 연대‘와 함께해요.)
작은 대안무역은 판매뿐만 아니라 함께할 활동가 분들을 기다려요. 언제든지 오셔서 같이 신나고 유쾌하게 진탕 놀아 봐요!

불법체류자 그리고 난민

버마행동(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며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 대표 뚜라와의 만남
한국의 한 세기와 퍽 닮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다. 독립운동과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화 운동. 다른 점이 있다면 버마는 세기를 넘긴 후에도 민주화 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투쟁은 버마 안에서 뿐만 아니라 타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뚜라씨가 이주한 한국은 “누구 보다 닮아서 누구보다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의 말을 담을 곳이 없는 사회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단지 ‘불법체류자’일뿐이다. 뚜라씨를 비롯한 많은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버마뿐만 아니라 한국정부와도 싸우고 있고, 그 투쟁은 좀처럼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강간허가 중단하라!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버마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1962년 네윈(Nay Win)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인하여 군사정권이 들어선다. 그 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군사독재로 인하여 버마 전체가 피폐해졌고, 현재는 아시아 최빈민국 중 하나로 전락했다.
“그간에 일어난 군부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88년 8월 8일 군부독재에 대항한 전 국민적 항쟁이 있었는데 약 3만 명 정도가 희생당했다.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디페인(Depayin) 대학살과 군대에 의한 집단적인 샨(Shan)주 여성강간은 비단 그 지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곳만 조사가 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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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 여성 실천 네트워크(The Shan Women’s Action Network – SWAN)’는 버마군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자행된 강간 사례를 기술한 “강간 허가증(License to Rap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출판한 바 있다. 2002년 발간 된 보고서(1996년부터 2001년까지 조사)는 샨주의 625명(이후 2004년까지 조사에서 188명의 사건이 추가)의 여성들에게 자행된 173건의 강간과 다른 형태의 성범죄를 다루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의 83%는 군 사무관들의 의해 부대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65%는 집단강간이었다. 강간을 당한 25%의 여성들은 사망했으며, 시신이 그 지역공동체에 상세히 공개되기도 했다. 이들 강간 피해 여성 중 30%는 18세 이하였으며 가장 나이가 어린소녀는 8살이었다. 이 ‘문서화 된’ 사건 중 단 한 건 만이 상급 지휘관에게 처벌 받았을 뿐이고, 오히려 제보자들이 버마 군에 의해 감금과 고문,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버마정부의 인권유린은 비단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마을은 마을 사람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기도 하다. 여자들이 강간에 무방비로 노출 돼 있다면 남자들의 경우는 강제노역에 끌려가게 된다. 마을에 군대가 들어오면 막사를 짓는 것부터 해서 그들이 먹고 살 모든 것을 마을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 군대가 마을을 떠날 때, 남자들의 경우는 그들의 짐꾼으로 이용된다. 군대가 가지고 이동하는 짐 중의 상당수는 마을에서 약탈한 물건들이고, 짐꾼으로 끌려간 대다수의 남자들이 전염병이나 노역에 시달려 죽게 된다. 살아서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혹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처음부터 남자들을 불러내서 반정부군이 아닌지 몰아붙이고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한다.”

버마군사정부는 외부위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군대를 증강시키고 있고, 버마 국민들의 보건과 교육애는 국내총생산(GDP)의 1%도 안 되는 비용을 쏟는 반면 국방비로 40%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버마 정부군의 수는 강제징집을 통해 두 배로 늘어 40만을 훌쩍 넘어서고 있으며, 이는 세계 15위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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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인(Depayin) 학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다. 학살당한 후 냇가에 죽은척했던 몇 명만이 살아서 증언했을 뿐이지만 당시 군대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8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군대는 승려와 마을 사람인척 위장해서 그 학살을 벌였다. 그들이 그렇게 위장한 것은 아웅산 수찌 여사와 NLD(버마민주민족연맹)를 흡사 승려와 국민들이 반대해서 죽이려 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2002년 5월 6일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아웅산 수찌여사는 전국을 돌며 NLD에 대한 지지와 버마군사독재에 항거할 것을 호소했다. 아웅산 수찌에 대한 버마 국민들의 지지가 점차로 확대되어 갈 때, 2003년 5월 30일 디페인에서 아웅산 수찌와 NLD의 부의장인 우틴우(U Tin Oo)를 비롯한 NLD의 지도부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었다. 버마 정부는 약 1000명의 아웅산 수찌 여사의 지지자들과 5000명의 반대 세력 간의 충돌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을의 인구는 500명 안팎이었고, 마을사람들과 아웅산 수찌 지지자들은 합쳐야 1000명 미만 이었다. 5000명의 폭도들은 군부와 그들에 의해서 조직된 사람들이었고 비무장이었던 아웅산 수찌 여사와 그 지지자들을 향해 쇠봉 쇠못 죽봉 등등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버마군사정부와 국제사회는 디페인 학살에 대해 어떤 조사도 하지 않았고 단지 NLD와 버마의 몇몇 단체들만이 조사보고에 착수했을 뿐이다.

불법체류자인가 난민인가
“작년 5월에 난민신청을 냈다. 일주일후 한차례의 조사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묵묵부답이다. 1년이 넘는 동안 몇 차례 출입국에 연락을 해 봤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이제는 연락도 잘 안 된다. 또 실태 조사를 하면서 통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것이 문제가 돼서 직접 통역을 하겠다고 나서봤지만 출입국에서 거부하곤 했다.”

한국정부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이후 2000년까지 단 한 명의 난민도 허용하지 않았다가 2001년에 들어서 1명을 인정하고, 현재(2005년 7월 기준) 39명이 난민인정이 된 상태이다. 지금까지 301명의 난민 신청자가 있지만 인력부족을 핑계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인력부족’은 05년 8월16일 출입국에서 한 말이고 이것이 한겨레를 통해 가시화 됐을 때 출입국은 소위 보도해명자료(05.8.23)를 통해서 ‘난민심사 업무는 법무부 출국관리과에 2명 및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2명이 전담하고 있고, 기타 전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41명의 겸임요원을 지정·운영’하고 있다고 이의 제기를 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더 큰 문제점이다. 다시 말하면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는 이들과 난민신청을 담당하는 이들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버마행동에서 나를 비롯해 11명이 난민신청을 했지만 2명은 신청자체를 거부당했다. 그들은 불법체류 벌금을 내야만 신청접수를 받겠다고 하는데, 이는 법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출입국이 정말 이를 몰라서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단속반의 입장에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난민신청을 하기 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난민신청은 결코 한국에서 오래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신청 후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버마가 민주화되기 전에는 고국에 돌아 갈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룬 것들 가족들 모두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반평생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누가 좋아서 내 흔적들을 버리고 싶겠는가.”

이들 모두 한국정부가 규약한 ‘난민협정’에 합당한 요건을 갖추고 있지만 난민인정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뚜라씨의 말처럼 난민신청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과거를 등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현재에서도 계속 과거를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잃어버린 과거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실상 난민이라는 것은 체류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난민 심의를 하는 동안에는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교육이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직업을 구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는 본인 명의의 통장 개설이나 휴대폰조차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버마행동 활동가중 팀인(Tim Yin)동지는 불법체류자로 청주보호소에 수감된 후에 난민신청이 접수 됐다. 현재 120일 넘게 청주 보호소에 수감 중인데, 난민 인정이 나기까지 통상 4-5년이 걸리는 걸 감안 한다면 얼마나 오래 보호소에 머물지 알 수 없다”

보호소에 수감된 어떤 이주노동자도 범죄자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인권유린과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지난 5월 이주노조 위원장 아노아르 역시 출입국의 표적단속으로 인해 청주보호소에 수감되어 있는 중이다. 국가인권위는 지난 6월 법무부에 ‘불법체류 외국인 강제 단속 및 연행에 관한 명시적인 법적 근거 조항’에 대해 ‘법무부가 법적 근거로 제시한 △출입국관리법 제46조(강제퇴거의 대상자), 제47조(조사), 제48조(용의자의 출석요구와 신문)는 원칙적으로 임의 조사를 규정한 조항이고 △동법 제102조(통고처분)와 사법경찰관리직무법 제3조 제5항은 행정범죄에 대한 수사 및 처분에 대한 절차를 규정한 것이며 △출입국관리법 제51조 제1항의 보호 조항은 사전 보호명령서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므로 무차별적인 단속 및 연행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했으나, 출입국에 의한 이주노동자들의 불법적인 단속과 구금은 계속 자행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가?

지난 6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버마어로 개안됐다. “에치흐니 공떼이카 엠미 빠무꾸에뚜(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우리가 가진 역사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연대’란 어느 때이고 곧 실천일 수밖에 없다. 비단 어떤 ‘사실’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뛰어 들어야 한다. 그 때 대면하는 ‘사실’과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실’간의 괴리에서 우리 사회의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만난 뚜라 역시 그런 사람이다.

라디카와의 인터뷰

지난 3월 6일 고려대에서 라디카 동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염없이 게을러서(바쁘기도;;;) 이제야 녹취를 풀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서 올립니다. 389일간의 농성이 있었으나, 농성 해단식이후 농성투쟁단이나 이주지부(현 이주노조) 여타의 연대단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막 끝났을 즈음엔 연대단위로써 평가 같은 것을 쓰려고 준비를 하다가, 그보다는 이주 분들의 목소리로 농성에 대해서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라디카 외에 몇 몇 이주동지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냥 목소리만 잘 저장해 두고 있답니다. 😉 그 중 하나를 풀어 올립니다. 편의상 말이 짧습니다.
부깽 : 이주노동자는 남한사회에서 약자이다. 그 앞에 여성이 붙었을 때 이주여성이라고 했을 때, 일상이나 투쟁 중에 더 큰 불편이나 차별은 없었나.
라디카 : 농성 할 때 처음엔 같이 싸우러 왔는데 여성, 남성 느낌이 없었다. 농성하면서부터는 쪼끔 느낌이 있었다. 어디 갈 때나, 집에 갈 때나. 회의 할 때, 세 명이 있었는데 소하나, 링링.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남성들과 한국 사람들만 회의를 했다. 처음엔 그랬다. 우리한테는 한 번도 안 물어보고, 그래서 맘이 많이 다쳤다. 우리도 싸우러 왔다. 그러다 한 달 가까이 소하나하고 우리끼리 얘기했다.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우리는 당신들한테 말도 못하고 그런 얘기를 한 뒤 조금 바뀌었다.
부깽 : 투쟁 현장이라지만 여성과 남성의 독립된 공간이 없었다.
라디카 : 처음엔 우리가 들어갈 때 여성자리 나성자리 구분이 없고 같이 있었다. 그 땐 남자친구 있어서 3번 텐트에 같이 있었고, 링링도 남편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소하나는 링링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힘들었다. 불편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생활했다. 우리가 여러번 말했다. 우리는 여성이니까 우리 자리 따로 만들어야 돼. 그때 문제도 많이 생겼다. 잠 잘 때도. 그때는 머리 아프고 정신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중에는 4번 텐트는 여자텐트가 됐다.
부깽: 4번 텐트를 여성들이 이용하게 된 게 농성 반년이 훨씬 지나서다. 두 달 쯤 지나서 얘기했을 때 한국 활동가나 같이 농성하던 사람들의 배려는 없었나?
라디카 : 우리가 텐트별로 밤에는 회의를 했다. 그때 우리가 얘기했다. 제가 3번 텐트 네팔공동체에, 소하나 링링이 4번에서는 얘기를 하고. 그렇게 하다가 그 얘기가 상황실회의에서 얘기하고 그랬다.
부깽: 그 얘기 후에 바로 됐나?
라디카: 아니다. 그 안에서도 얘기가 많았다. ‘여기 투쟁하러 온 건데 여성 남성이 뭐가 중요하냐’ 그런 얘기가 많았다. 투쟁하는 것은 맞지만 여성들 우리 3명하고 한국 여성들도 같이 있잖아. 다 합쳐서 하면 괜찮을 텐데, 그때는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내가 얘기 하다가하다가 3개월 더 지나서 4번 텐트 여성이 이용하게 됐다.
부깽: 농성 초반에 단식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라디카: 처음 단식을 시작할 때 우리는 민주노총도 다 알고 하는 줄 알았는데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단식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민주노총에 가서 얘기하는데 그때 그분들(민주노총)이 ‘우리는 몰랐다 상황실이 우리에게 안 알려줬다. 그래서 몰랐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었다. 단식 시작 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왜 했냐? 단식하는 이유가 뭐냐?’ 단식하는 이유가 뭔지 선전을 하고 여러 단체에 알려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여러 단위에 알리지 않았고, 그거 알려줘야지 사람들이 관심가지고 연대했을 텐데.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금 그랬다.
부깽: 단식 이후에 몸은 어떤가?
라디카: 단식 있을 때 여기 골반부분이 이상하게 아팠다. 단식 시작하기 이주일 전부터 아팠다. 단식해서 약 먹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약 안 먹고 30일까지 단식하고, 한 달 동안 단식하고, 단식 끝나고 일주일 있다가 너무 많이 아파서 약 먹었다. 단식 할 때는 너무 아파도 참았다. 동지들 석방 할라고 약도 안 먹고 그냥 했는데. 근데 딱 끝나고 너무 힘들고 아파서 예전에 그때 의사가 준 약을 먹었다. 그때는 너무 늦었다. 단식 끝나고 안양에 가서 병원에 다니고 집에 왔는데 많이 아팠다. 한 달 넘어서 병원에 갔다. 여기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도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아프고, 내가 혼자 스스로 했다. 병원에 다니는 거,
부깽: 단식 2주 때 몸이 아프다는 것을 농성장에 알리지 않았나.
라디카: 텐트에 얘기 했다. 그때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근데 그 때는 내가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부깽: 단식 중단하라는 말은 안했나?
라디카: 그 말을 했다. 자주했다. 근데 아무 이유 없이 단식 풀어라 그런 얘기 많이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목적이 있는데 아무 결과 없이 어떻게 단식을 그만 두냐며 상황실장과 많이 싸웠다.
부깽: 처음에 단식 시작했을 때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말을 안했다 알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걸 단식하는 동지들이 알게 된 게 얼마나 지나서였나?
라디카: 아마 15일 넘어서 인거 같다. 보름이 지나서 민주노총에 갔었는데 말을 안 해서 우리가 단식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하는 말이 “너희들 언제부터 하는지 몰랐다. 안 말해줘서 몰랐다.”
부깽: 단식 날짜가 며칠이었나? 기간?
라디카: 2월 17일부터 3월18일까지 30일 가까이 했다.
부깽: 단식을 푸는 과정에서 식사는 어땠나?
라디카: 따로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농성장에서 식당에 나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돈 아까워서 어떻게 밖에 나가서 먹나, 나는 단식 풀고 안양 이주여성 센터에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치료 받았다. 시실라 언니가 많이 도와주고 그 뒤에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알아서 돈 달라고 해서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부깽: 농성장에서 따로 챙기지는 않았나?
라디카: 말을 했는데, 해준다고 했는데, 하루 이틀 정도만 챙기고 이후엔 안했다. 우리도 무서웠다. 단식이 처음이고 어떻게 식단을 챙겨야 하는지 몰랐다. 돈이 아까워서 농성장에 돈이 없어서 하루에 두 번 세 번 (챙겨) 먹어야 하는데, 돈 문제로 바깥에 나가서 먹을 수 없었다. 다른 동지들한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깽: 실은 이때 농성장에서 단식하셨던 분들이 편의점에서 혼자 죽 사먹는 걸 계속 봤다.
라디카: 농성장에 돈이 없었다. 우리가 미안해서 돈 달라는 소리도 못했다. 그래서 혼자 해결했다. 거기서 알아서 했어야 하는데, 우리도 말을 하다가 말았다.
부깽: 치료는 어떻게 했나?
라디카: 농성장에 있을 때는 의사들이 자주 와서 병원도 데려가고 그랬다, 그리고 몸에 병 있다고 약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단식하고 있어서 약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단식 끝나고 이후에 두 달 있다가 더 아팠다. 계속 참았다. 단식 풀고 일주일 있다가 약 먹었다. 먹을 때는 안 아프고, 그 담에는 조그만 염증이 생겼는데 그 뒤에 커져서 많이 아팠다.
부깽: 단식에 대해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라디카: 단식 끝나가지고 농성장에서, 솔직히 얘기하면은, 우리 단식했던 사람들 생각은 우리 병원에 데려가서 건강검진을 받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안했다. 상황실에서 준비한 게 아니라 연대단위에서 와서 텐트 안에서 (건강검진을) 한 게 다였다. 상황실에서는 여기서 하니깐 신경 쓴 것 같지는 않다. 거기서(상황실)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나하고 단식했던 사람들 화가 많이 나고 너무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때부터는 농성에 대한 희망이 많이 줄었다. 농성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단식 때 염증이 커져서 이렇게 된 거다. 지금까지 약을 먹고 있다. 일은 계속 못 하고 있다. 약은 3개월 정도 더 먹으면 된다. (라디카는 지금도 여전히 일주일에 3번씩 병원에 가고 있다.)
부깽: 농성장 내에서 갈등이 있었나? 사안에 대한 결정들이나 그 결정과정에 대해 이주동지들의 참여 문제를 들어보고 싶다. 다시 농성을 한다면 꼭 이건 준비하고서 하자고 생각한 거나, 이건 미흡했다고 생각한 게 있나?
라디카: 그때 우리는 농성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냥 ‘우리 권리 때문에 싸워야 돼’라고만 생각했고, ‘한 달 정도만 싸우겠지’라고 생각했다. ‘한 달 까지는 싸울 거야’ 그러면 우리 문제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농성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싶다. 여성동지들이 너무 힘들었다. 여성 남성 따로 독립된 공간이 있을 거라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소하나에게 농성에 함께 참여하자고 말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링링도 참여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농성을 다시 한다면 여성 공간을 따로 만들고 시작해야한다. 그걸로 많이 싸웠다. 소하나는 특히 많이 싸웠다. 혼자 힘들게 싸웠다. 나와 링링씨는 애인이 있었는데 소하나는 혼자였다. 소하나는 너무 힘들었다. 다시 농성을 하면은 이주노동자 말이 우선 됐으면 좋겠다. 지난 농성처럼 한국 활동가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가 돼야 한다.
부깽: 해단식 이후에 농성장을 떠나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때 어려운 점이 있었나?
라디카: 나도 다른 동지들처럼 방세 줄 돈도 없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도 못하고 너무 어려운 상태였다. 어려운데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래서 액세서리 만들어서 학생들이나 친구들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살았다. 나는 그렇게 했지만 나보다도 같이 농성했던 다른 동지들이 방도 없이 갈데없이 더 힘들었다.
부깽: 이런 생계 문제로 민주노총이나 상황실에 건의 하지는 않았나.
라디카: 얘기가 나왔지만 나는 너무 열받아서 회의에 가지 않았다. 방도 없고 갈 데도 없는데 어떻게 해주세요. 이런저런 요구를 했는데 안 해줬다.
부깽: 제작년부터 작년까지 1년 넘게 농성투쟁을 했다. 다시 이렇게 하라면 할 수 있겠나?
라디카: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 농성할 때 부족한 것들 이주노동자들이 몰랐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많이 배웠다. 이 배운 것들로 새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깽: 농성투쟁 이전에도 투쟁 경험이 있나?
라디카: 아니 처음이다. 농성 시작할 쯤 집에 가려고 했었다. 단속이 너무 심해서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회의가 있었는데, 샤말타파를 만났다. 샤말타파의 말을 듣고, 회의에서 나온 얘기를 듣고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깽: 별 얘기 안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다음엔 진짜 맛있는 커피를 사겠다.
라디카 : 기대하겠다.
——————
고려대 근방에 아는 데라곤 보헤미안 하나였는데, 문이 닫힌 바람에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곳을 찾아 30여분을 헤매다 결국 다시 고대과학도서관(?)으로 돌아가서 자판기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눴다. 이후에도 라디카 동지를 여러 번 만났지만 아직까지 맛난 커피를 대접하진 못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녹취를 풀면서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라디카는 단식 얘기를 하면서 내내 울었다. 4명의 동지들이 단식투쟁을 했었는데, 라디카 외에 마숨과 단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까지만동지는 단식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대신했다.
한참 지난 뒷얘기 – 라니카는 그간 잠시 일을 했지만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지금은 피자매연대에 달거리대를 만들어 파는 것과, 비즈공예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가는데, 지금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는 상황이다. 가장 치열한 투쟁은 아주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것들,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들과 싸우게 된다. 우리의 구호와 연대는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또한 우리들의 사적 영역을 바꾸자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들, 사적 영역이 모인 것들, 그게 바로 세상이다.

작은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작은 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안녕하세요, 오늘! 토요일 홍대 아우라에서 작은 대안무역이 열립니다. 어제 자히드 가족과 마을공동체에서 옷을 보냈는데, 이번엔 큰 사이즈의 옷도 많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옷들 중 최고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오늘 아우라에서 새로운 예쁜 옷들과 액세서리- 카드, 팔찌, 목걸이, 귀걸이, 배지 등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엔 없지만 나시와 반팔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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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에 자수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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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를 놓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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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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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히드
그리고 지난 반전집회 때부터 네팔 라디카 동지의 비즈공예품을 함께 판매하고 있어요. 라디카 동지는 작년 농성 중에 30일간의 단식으로 지금까지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지속적으로 못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집에서 비즈공예품을 만들어 그 수익금으로 병원비와 생계유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라디카,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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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여성행진 때 라디카 동지
홍대 아우라 – 산울림 소극장 맞은편
Party Benefit & Jam (four!)
cover charge / 입장료 10,000 won
2005.7.9 / Saturday July 9, 2005 8 PM – 11:30 PM
{performing live}
PAUNA (modern rock)
Elephant 808 (electronica driven folk)
ANOKHA (high energy rock beat fusion)
Stop Crackdown (rock)_이주노동자밴드
일요일 평택평화행진 때 비가 오면 작은 대안무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배지 구경하세요~

배지
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에서 이번에 찍을 배지와 이전 배지들입니다.
1, 5는 새로 찍을 배지이고, 4번은 가장 단명한 배지이기에 아마도 귀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 7은 명동성당 농성단 대표였던 샤말타파입니다. 작년 2월에 출입국에 잡히고 4월에 강제출국 당했답니다. 이미 나와 있는 배지의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앞으로 찍을 계획이 없습니다. 곧 귀해지겠죠? ;; 3번과 6번이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3번은 그물총을 쏘는 출립국관리소에게 똥침을 놓는 모습이고, 6번은 여성이주노동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이주노동자’가 더해지면 이 사회에선 없는 존재처럼 돼버리곤 합니다.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죠.
3개에 2천원입니다. 배달은 안 되고 집회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대량구입 하신다면 배송도 고려를 ;;; 물론 더 비싸게 주고 사는 것은 환영입니다. 수익금은 이주노동자 후원을 위해 쓰입니다.
이쁜 걸 찜해두시고, 귀한 게 뭘까 생각해보시고, 선택하시는 거예요.
조만간은 19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4시부터 6시까지 열리는 평화를위한난장과
20일 역시 대학로에서 열리는 320반전집회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마구마구 사세요 ~

MB아저씨 면회

b님은 3.20 관련해서 얼마 전 한겨레에서 본 기사를 얘기한다. “스크린 앞에서 죽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라는 요지의 소말리아 관련 기사였나 보다. 어떤 글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찾을 수 없다. 전쟁도 일상도 어느 하나가 부각되면 그와 동질의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이라는 레토릭으로 감춰진다. 그러나 어딘가에 중심을 실어 주는 것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의 소외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데 있다. 어떤 현상이나 세계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발견이나 관찰에 의해서만 이뤄 어질 수 없다. 발견과 관찰로 이루어진 세계는 그것이 유토피아든 척박한 디스토피아든 판타지일 뿐이다. 그 세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세계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안다고 믿던’ 세계와 비교해 볼 일이다.
오늘 MB아저씨 면회를 다녀왔다. MB아저씨는 389일간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했던 네팔 노동자다. 출입국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게 금요일이다. 토요일 일요일은 면회가 안 돼서 오늘에야 가게 됐는데 오늘 못 갔으면 크게 서운했을 것이다. 어디로 이송됐는지를 몰라서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아침에야 ‘목동출입국관리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은 아무도 오지 않았었고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만이 다녀갔단다. 섭섭하고 그보다 야속했을 것이다. 그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투쟁하던 사람이다. 이주지부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심을 가졌어야 할 일이다. 자히드의 눈물과 MB아저씨의 눈물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 눈물을 구분 짖는 것이야 말로 형평의 문제이다.
라쥬형과 통화를 하는데, 이주지부의 누군가가 아침에 ‘화성보호소’에 다녀왔단다. 그 사람에게 나는 면회가 끝난 직후 전화를 했었다. ‘MB동지는 목동에 있고 내일 추방이라 오늘 말고는 면회를 할 수 없다’, 그는 “화성에 있는 게 아니라 목동에 있나요?”라고 물었다. 다녀왔으면 알 일이다. 토너아저씨와도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는다. 나는 후딱 ‘그냥 잘 지내요’라고 답한다.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겠다. 그 인사에 정확히 답하고 싶다. 늦더라도.

하루 전 날

내일 고려대 학생회관식당에서 “수도권 노조” 기금 마련을 위한 이주노동자 후원 주점이 있다. “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이하 지지모임)“에서는 ‘자히드 후원’을 위한 부스를 차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배지를 팔고 모금함과 유인물 대자보 피켓 등등을 준비하고 다른 단위와 함께 할 수 있는 수익 사업을 찾고 있었다. 부랴부랴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와중에 상당히 당황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부스는 차리되 모금함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연대단위에서 CD판매를 하겠다는 계획을 주최 측에 전달했더니 이주지부의 설명은 ‘근 몇 달간 여러 단체에서 이주문제를 가지고 주점을 열었다. 주점에 참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외부의 시선은 그 단체를 구분 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이주지부로 인식한다. 이주지부는 이렇게 자주 주점을 여는데 그 수익금으로 대체 뭘 하냐는 구설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모금함이 주점 내에서 돌 때 주점에 있는 사람들이 부담을 갖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부터 기가 찬다. 분명히 다른 단체에서 다른 타이틀을 가지고 주점을 열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주점으로 얼마의 수익이 생겼고, 그 사용 내역이 어떻다는 것을 공개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그런 구설수가 두려 울리도 없고 애초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모금함이 주점 내에서 도는 것이 부담스럽다? 주점 티켓을 팔거나 물건을 파는 것은 부담이 아니고 모금함은 부담스럽다는 말인가? 주점 티켓부터 시작해서 어느 것도 강제적이지 않다. 부담되면 물건을 안사고 모금함에 돈을 안 넣으면 그만인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돕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연대하듯 우리는 자발적 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활동가중 누군가는 “지지모임에서 ‘자히드 후원’을 타이틀로 부스를 차린다는데, 여러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자히드 문제”에 대한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을 전했단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들이 의견을 통일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그 갈등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헷갈려하는 동지들도 있을 테고, 형평성을 들며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하냐는 문제로 고민하는 동지들도 있을 것이다. 자히드는 분명 이주지부의 조합원이다. 조합원이 강제추방 당하고 그로 고통 받고 있다면 이주지부 차원에서 먼저 나서서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돕고 싶지만 ”개인의 일“인지라 조직차원에서 끌고 가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된다기에 지지모임과 다른 연대단위가 ‘자히드 후원 사업‘을 계획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지모임이나 다른 연대단위가 왜 자히드 돕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동의는 어렵더라도 이해를 구한다고 하면 될 것을 동지들의 입장이 아직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형평성의 문제도 그렇다. 애초 누구는 돕지 않았으니 끝까지 돕지 말자는 말인가? 그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형평인가? 우리는 늦었더라도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까지일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중 누구든 자히드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 때 우리는 혼자여야 하는가?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고 노조를 만들고 모임을 꾸린 이유는 어려울 때 함께 하자는 더디더라도 서로의 고통을 맞들며 가자는 뜻이지 않던가.
우리는 언제나 추상과 싸워 와서 구체적인 현실이 닥쳐서는 이게 저건지 그것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등등의 말은 한 없이 추상적이다. 우리가 바꾸자는 것은 바로 개개인들의 삶이 아니던가. 고통은 바로 그 개인들의 삶속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우리가 말하는 연대하자는 개인적 고통이란 ‘사랑의 열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숨 쉬는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는 언제나 개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트라 켈리의 말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압축하고 있다. 투쟁은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는 데에서 비로소 시작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 질기게 간다는 것을, 그래야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가? 대체 사적과 공적의 구분은 어디서 어디까지이며 누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당신들은 정말로 사적 영역에서는 고통을 받고 그와 분리된 공적인 영역에서 운동을 한다는 말인가?
이런 소모적 언쟁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느 단위에서 함께 한다는 소리에 탄성을 질렀어야했을 밤이다. 주점 전날 이란 말이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2003년 11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있었다. 1년이 넘는 농성투쟁이 끝났을 때 그들에겐 지친 몸을 추스를 방 한 칸은 고사하고 먹을 쌀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혹독한 겨울의 그 기억들을 견뎌내고 속속 다시 공장으로 일터로 돌아가지만, 정작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단속추방이라는 보다 더 무지막지한 현실이다. 그렇게 자히드가 끌려가 추방당했고, 그제 MB아저씨가 잡혀서 화성보호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들은 명동성당 농성장을 끝까지 지켰던 분들이다. 이상한 체감이다. 단속추방이라는 말이 몇몇 사건으로 사람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내내 외치던 “단속추방 박살내자”가 보다 절실해 진다. 내 구호로는 막아내지 못한 것, 우리의 구호로 지키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인 것이다.
한국정부의 ‘고용허가제’ 시행 후 소위 말하는 ‘불법체류자’는 작년 이맘때쯤 정부 발표로 13만 7천명에서 18만 7천명으로 무려 5만명 이상이 늘었다. 한국정부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 불법체류자가 10만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고 떠버리며 무자비하게 단속추방만을 강행하고 있으나 이 법안은 명백한 실패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2005년 내에 비자가 만료되는 이주노동자가 13만 9천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용허가제’와 ‘산업연수생제’로 인해 불법체류자로 전락할 것이고 올 하반기에 들어서는 미등록이주노동자가 20만명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노동부와 법무부는 고용허가제와 산업연수생제의 과오를 인정하고 법안을 새로 책정하는데 애쓰는 것이 아니라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엄한 처벌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만을 보이고 있다. 대체 20만명을 어떻게 단속하겠다는 것인지도 의문이며, 그 단속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침해를 쉬쉬 덮어놓고 가겠다는 심사를 모르겠다. 얼마 전 화성보호소에 갔더니 앞에 대문짝만하게 “불법체류자 고용은 인권침해의 시작입니다“라고 붙여 놨더라. 지랄. 인권침해의 시작은 산업연수생제를 고수하는 한국정부와 기업들에게 있다는 것은 출입국관리소 개도 알 일이다. 엄연히 이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를 허벌나게 싼 노동력으로만 여기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 처분해 버리는 일이야말로 인권침해의 시작이란 말이다. 나와 색깔이 다르니 상관없다고? 출입국관리소는 색깔구분도 엄정히 하더라. 출입국에서 단속을 할 때 일본인이나 백인이 체류기한이 지났더라도 무자비하게 잡아서 보호소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출국 권고를 한다.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산재 치료 중 비자기한이 끝나 체류연장 신청을 했을 때, 체류보험금 1000만원을 내라는 것과 대조적이지 않은가? 영장 없이 마구잡이로 들이쳐서 끌고 가는 필리핀 노동자들과 대조적이지 않은가?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노말헥산에 중독된 태국여성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압축돼 나타나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또 어떤가?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현대판 노예제도라 비판 할 때마다 다른 나라도 똑 같다고 뻥치는 인간들을 상대로 이제는 더 말하기 짜증난다. 그 나라의 대부분은 몇 년 동안 한 사업장내에서 일했을 경우, 자동으로 노동비자가 연장된다거나 후에 영주권까지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4년이 지나면 무조건 불법이 되고 추방당해야 하는 한국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괴테의 말을 비틀어 “태초에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정책을 만드는데 기초가 되어야하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여야 마땅하다.
시행된 정책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싹 들어 바꿀 수 없다면 보완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 보완이란 것이 ‘단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강행하는 어리석음은 대체 어디서 기인할까? 미스테리한 인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