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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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자료는 mht로 저장하곤 해요. 여성주의 저널 일다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올 초 일다에 문제 제기를 했던 자게의 글이 없어졌고, 나중에 data.ildaro.com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조차도 없어졌더군요. 게다가 도서출판 일다 사이트(book.ildaro.com)를 아무런 공지 없이 없애버린 건 독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에요. 작년에 일다 출판호프를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와서 도운 건 다음 책을 기다리는 마음에서였을 거예요. 그러니, 왜 출판을 안 하게 됐는지, 그 출판기금은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지 혹은 사용했는지, 어째서 도서출판 일다가 사라졌는지 정도는 사이트를 없애기 전에 알려야지요. 왜냐하면, 그건 그냥 기본이에요.
일다를 나온 기자들의 문제제기 글과 함께 일다 편집진의 글, 비상근 기자라고 칭하며 달린 댓글, 개인정보를 담당한다는 오승원의 댓글 등등이 함께 지워졌네요. 부끄럽고 여전히 낯깍인다는 생각에 흔적을 지운 거면, 늦었지만 사과를 하는 게 맞습니다. 그게 순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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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편집진에게 반인권적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변화의 노력을 보일 것을 재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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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저널 일다를 떠나며, 일다의 변화를 촉구한다에 대한 일다 편집진 답변은 일다 자유게시판 – 독자님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다 자유게시판 – 일다 편집진에게 재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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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편집진에게 반인권적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변화의 노력을 보일 것을 재촉구합니다.
편집진의 답변은 대단히 실망스럽습니다. 편집진은 반인권적, 반여성적 발언에 대한 어떤 사과도 없이, 취재 기자 4인이 대외적으로 제기한 문제를 낯깎여 하며 비껴갈 뿐입니다.
일다가 단순한 ‘언론’이 아닌 ‘여성주의 언론’을 표방한다면, 일다의 책무는 비단 기사를 통해 현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사를 작성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여성주의적 방식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편집진이 지향하는 바가 일다 사이트에 공시된 여성주의와 다르지 않다면, 취재기자가 말하는 여성주의와도 같은 것입니다.
취재기자 4인이 앞선 글을 통해 밝힌 내용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맥락도 없이 잘라 나열하거나, 상황을 완전히 왜곡시켰”다는 편집진의 답변이야말로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진의를 왜곡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취재진은 “개인적인 비방 메일”을 보낸 바 없습니다. 일다 상근 기자 7명이 공유하고 논의를 해가는 [일다기자메일링]을 통해 문제를 지적하고 회의를 제안했습니다. 다시 한 번 편집진에게 반인권적 발언에 대해 사과를 촉구합니다.
‘편집권’이 막말과 인신공격을 정당화하는 수단인가?
취재기자 4인이 제기한 문제는 ‘편집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편집권을 행사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문제는 기사 내용이나 기사가 드러내는 관점이 아닙니다. 핵심은 기사 생산 과정과 일다 조직 내부에서 여성주의가 전혀 실천되지 않고, 그에 대한 고민과 변화의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악한 재정’과 ‘편집권’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집권’이 막말과 인신공격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편집진은 앞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언론의 생명과도 같은 편집권을 ‘수직적 위계구조’라고 보아선 안 된다”고 말하며 취재기자 4인의 문제제기를 “언론으로서의 일다에 대해 다른 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로 덮어버리고 있습니다. 취재기자와 편집진 사이에 서로 ‘다른 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취재기자는 기사 생산, 운영 등을 포함해서 일다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곳’으로 인식했고, 편집진은 취재기자는 기사만 쓰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를 고수했다는 점일 뿐입니다.
기자가 기사에서 담보해야 할 공정성이 있다면, 편집진 역시 편집권의 행사 과정에서 담보해야 할 공정성이 있습니다. 취재기자 4인은 단지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거나 기사의 방향과 내용을 주도적으로 정할 수 없었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편집진이라는 위치를 근거로 취재기자에게 험한 말을 하거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태도, 기자 명을 바꾸거나 운영과 고용 등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조차 ‘편집권’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상황을 비판한 것입니다.
과정을 경시하고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문화는 여성주의저널 일다가 그간 기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비판해오던 지점입니다. 여타의 사회 조직에서 드러나는 반인권적 발언이나 비민주적 위계는 지탄의 대상이고, 일다는 기사를 생산해 내야 하는 ‘언론’이기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까. 효율성만을 들먹이며, 상명하달식 소통구조로 생산되는 기사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일방적인 운영과 고용 결정 등은 ‘편집 영역’을 넘어선 것.
1월 9일 회의 때까지 문제가 될만한 상황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문제 제기 역시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기한 문제에 대한 깊은 논의는 번번이 막혔고,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서조차 이의를 제기하면 인신공격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일다의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할 수도, 더는 간과할 수도 없었기에 대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나윤, 김영선(나루), 부깽, 조이승미 기자는 각각 2006년 12월, 2007년 1월, 4월, 8월부터 반/상근으로 일해왔으며, 그 이전부터 일다에 기사를 작성해 왔습니다. 나윤 기자는 출판업무를 담당하면서도 기자로서 기사를 써왔습니다. 2007년 일다 기자소개 페이지는 편집부, 보도부, 출판부 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데스크’, ‘취재기자’ 등의 호칭은 편집진이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일다는 편집진이 말했듯 재정구조가 열악하고 소규모인 만큼 구성원 간의 합의가 더더욱 필요한 언론입니다. 일방적인 운영과 고용 결정 등은 ‘편집 영역’을 넘어선 것이며 편집진 임의로 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일다가 어느 개인의 사조직이 아닌 이상 운영과 고용 등의 사안을 정하는 데 구성원 간의 합의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여성주의’를 표방한 언론으로서 갖추어야 할 책임.
취재기자 4인은 일다의 어려운 여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나윤 기자를 제외한 취재기자 3인은 반상근 기자로 일하며 40만 원의 급여를 받았습니다. 이후 부깽 기자는 2007년 10월부터 60만 원, 조이승미 기자와 김영선 기자는 2007년 12월부터 60만 원을 받았습니다. 명목은 반상근 이었으나 편집진은 취재기자들에게 외부에 직함을 말할 때 ‘상근기자’로 소개하도록 했으며, 실제 결합 수위도 상근기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취재기자 4인은 일다에서 기자로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이는 일다가 표방하는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다에서 일하는 동안, 취재기자로서 수행하는 일들이 과연 일다가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취재기자가 ‘기자 정체성’을 의문시한 것은 1월 11일 편집진과의 회의에서 이미 전달했듯, 편집진이 모든 문제를 ‘기자 정체성’이나 ‘편집권’으로 환원하며 덮어버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일다 기사와 그에 담긴 관점을 존중하는 만큼, 기사를 만드는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일다 기사가 훌륭했던 지점은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고 잣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잣대를 일다 안으로 돌렸을 때, 일다는 기사가 비판하는 사회보다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취재기자 4인의 요구는 이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일다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일다의 편집진이 진정 변화를 모색한다면, 문제를 덮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먼저 사과하십시오. 그리고 고민하고 성찰하십시오. 취재기자 4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일다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008년 1월 29일 김영선(나루), 나윤, 부깽, 조이승미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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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저널 일다를 떠나며, 일다의 변화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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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저널 일다를 떠나며, 일다의 변화를 촉구한다
여성주의저널 일다와 더는 함께할 수 없어 유감스럽습니다.
1월 15일 부로 김영선(나루), 나윤, 부깽, 조이승미 등 취재기자 4인은 여성주의저널 일다를 떠납니다. 취재기자 4인은 일다 내부의 운영방식과 소통구조가 일다가 지향하는 여성주의에 반(反)한다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일다에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이에 일다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일다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밝힙니다.
● 취재기자 4인은 박희정 대표, 조이여울 전 편집장, 윤정은 현 편집장 등 편집진 3인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1. 반(反) 여성주의적 가치관과 발언
2. 일방적인 편집권 행사 및 불평등한 의사소통구조
3. 기자들을 일다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태도와 불신
4. 문제 제기 시 기자 자질을 언급하며 사생활을 들먹이고 비방하는 태도
5. 효율성을 강조하며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
● 문제를 제기한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 (수)
김영선 기자가 사의를 밝힘. 조이승미 기자가 운영방식 및 소통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던 중 회의가 중단됨. 편집진은 각자 일정이 있어 회의날짜를 다시 잡아보아야겠다며 사무실을 나감. 그러나 취재진 4인은 편집진 3인이 외부에서 자신들만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
– 1/10 (목)
취재진이 편집진에게 일다의 운영 방식 및 소통 구조, 반여성주의적 태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메일을 발송, 목요일 마감 거부.
– 1/11 (금)
메일에 대한 편집진의 답신 도착. 오후 6시 회의. 취재기자 4인 모두 사의 표명.
– 1/14 (월)
윤정은 편집장으로부터 취재기자 4인에게 각기 전화 연락이 옴. 퇴직금과 월급 정산, 인수인계에 관한 내용이었음. 조이승미 기자가 사직이 아닌 교섭을 원한다 밝히자 윤정은 편집장이 “왜 말을 번복하냐”며, “편집장으로서 말하는데 지금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언성을 높임. 사무실에 도착해 대화를 요구하는 조이승미 기자에게 윤정은 편집장은 “깨끗이, 깔끔히 끝내라”면서 퇴직금만을 반복적으로 말하며 사직을 권고함.
– 1/17 (목) 취재기자 4인 “여성주의저널 일다를 떠나며, 일다의 변화를 촉구한다” 공개
● 취재기자 4인이 크게 다섯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된 배경 중 최근 사례들과 이에 대한 편집진 3인의 대답을 간략히 적습니다. 아래 사례들은 단편적이거나 이례적인 경험이 아니며, 기자들이 일다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느껴왔던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1. 반(反) 여성주의적 가치관과 발언
사례1) 일다 글쓰기 강좌를 기획하며 장소를 물색하던 지난 8월, 일다 사무실 옆 건물 2층 강당을 사용하자는 제안이 있었음. 김영선, 나윤 기자가 계단 때문에 휠체어 장애인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윤정은 편집장은 “장애인들도 이미 사회가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지, 언제까지 양보할 줄 모르느냐.”며 “떼를 써서 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함. 그러자 조이여울 전 편집장도 “장애인 운동권이 그런 부분이 있죠.”라고 동의함. 당시 논쟁이 격했음.
이후 취재기자들이 이에 대해 반인권적 발언이었다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자, 윤정은 편집장은 “그 말 한마디로 내가 가진 장애인에 대한 관점을 평가하려 하냐?”며 “우리가 장애인 단체도 아니며, 내가 한 얘기는 나의 장애인 친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라고 대꾸함. 조이여울 전 편집장은 “정은님이 장애인 친구가 얼마나 많은데”라고 두둔함.
김영선 기자에게는 “왜 독자모임 때는 장애인 이동권 고려해서 장소 정하자는 얘기를 안 했느냐.”며 “교조주의적이다.”고 비난함.
사례2) 취재진은 편집진이 구조적이고 집단적인 불평등의 문제를 성인지적 관점 없이 여성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함. 가령, 편집진이 맥락과 상관 없이 “여자가 더하다”는 말을 빈번하게 하는 것이 반여성주의적이라고 취재진은 지적함. 박희정 대표는 “현상적으로 여자가 더할 때가 있는데, 그걸 더하다고 하지 무어라 하냐?”고 말함.
기자들이 “일다가 말하는 여성주의적 가치관이 도대체 무엇이냐?” 질문하자, 이에 대해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고 “당신들은 여성주의가 무엇인 줄 알고 들어왔냐?”고 반문을 반복함. 조이여울 전 편집장은 “일다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온 것 같다.”고 말함.
2-1. 일방적인 편집권 행사
사례1) 1월 3일, 조이승미 기자가 기사를 넘기자 편집진으로부터 MSN 메신저를 통해 “가명을 정해달라.”고 연락 옴. 조이승미 기자가 “왜 가명이 필요하냐?”라고 질문함. 그러나 편집진에게 답변이 없었고 조이승미 기자는 일단 가명을 정해서 넘겨줌. 이후에도 조이승미 기자가 가명의 필요성에 대해 재차 질문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한 채, 기사는 가명으로 보도됨.
1월 9일, 평가회의 때 충분한 설명과 동의 과정 없이 기자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보도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조이여울 전 편집장은 “기사의 질이 떨어져서 도저히 상근기자 이름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고 말했고, 윤정은 편집장은 “조이승미 기자를 위했던 것”이라고 대답함.
사례2) 11월 말, 조이승미 기자가 A 토론회 취재 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조이여울 전 편집장과 상의해 기사를 작성하지 않기로 함. 조이여울 전 편집장은 김영선 기자에게 조이승미 기자와 논의했던 바에 대한 일말의 설명 없이, 단지 “조이승미 기자가 못 쓰게 됐다.”며 A 토론회 기사를 작성할 것을 말함. 이에 김영선 기자가 보도함.
당시 조이승미 기자는 김영선 기자가 해당 기사를 쓴다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음. 보도 직후 조이여울 전 편집장에게 “어떻게 다루지 않기로 한 기사를 다른 기자에게 넘길 수 있느냐”고 항의함. 이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김영선 기자 역시 1월 11일 “한 기자와 논의 후 작성하지 않기로 한 기사를 어떻게 설명 없이 떠넘길 수 있는가” 물었고, 조이여울 전 편집장은 “편집권 행사이다.”라고 답변함.
사례3) 일방적인 편집권 행사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편집진들은 “일다는 여성주의 공동체나 세미나 팀, 웹 커뮤니티들 또는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웹진과 다른 곳”이라고 말했음. 한편 조이여울 전 편집장은 “우리(편집진)가 다른 언론에서 휘두르는 만큼 편집권을 내세우지 않으니까, 취재기자들이 편집권이 무엇인지조차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함. 이어 “다른 언론에서는 아예 편집장이 방을 따로 쓰고 취재기자가 편집장한테 바로 가지도 못한다.”라고 말함. 또한 윤정은 편집장은 “심지어 변호사도, 교수도 글을 주고 편집은 알아서 하라고 했다.”라고 말함.
1월 11일, 조이승미 기자는 편집진 2명과 취재기자 1인이 돌아가며 같이 편집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음. 1월 14일, 윤정은 편집장은 “조이승미씨는 절대로 일다에서 편집장 할 수 없다.”고 말함.
2-2. 불평등한 의사소통구조
사례1) 편집진은 박희정 대표가 1월부터 취재부장으로 상근활동을 재개할 것임을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함. 당시 취재기자들이 “어떤 사람을 고용할 것인지에 대해 구성원 모두의 합의가 필요하다.”라고 문제를 제기함. 이후 1월 11일, 취재기자들은 박희정, 부깽 기자의 고용 당시 구성원들과 논의가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며, 편집권이 운영권 및 고용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
12월 말, 급여 기준이 편집진 두 사람에 의해서만 결정된 점과 재정 상황에 대해 취재기자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며, 각자의 월급 및 수입 지출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공유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함.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편집진은 앞으로는 논의 구조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부분 받아들이면서도 “원래 일다는 우리(조이여울, 윤정은) 둘이서 많은 것을 결정해왔다.”라는 대답만을 반복함.
사례2) 사이트 개편을 기획하며 기사 카테고리에 대해 논의한 바 있음. 편집진은 ‘여성’ 카테고리를 별도로 두지 말자는 입장이었고, 취재진은 여성주의 저널로서의 색깔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음. 긴 시간의 논의 끝에 ‘여성’ 카테고리를 넣기로 합의함.
2개월 후 1월 2일 회의 때,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보고사항에 “사이트 기획안을 쓰다 보니 ‘여성’과 ‘사회’ 카테고리의 경계가 불분명해 ‘여성’ 카테고리를 빼겠다.”는 내용을 담고, 기자들에게 통보함.
사례3) 1월 9일 회의 말미에 조이승미 기자가 의사소통구조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자 윤정은 편집장이 “그만 말하라고!” 반말로 소리를 지름.
1월 11일 회의 시, 나윤 기자가 윤정은 편집장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윤 편집장은 웃음을 섞어 빈정거리며 조이승미 기자에게 “미안해요, 사과할게요.”라고 말함. 논의자리가 끝나갈 무렵 윤 편집장은 “미안한데, 그때 내가 그만 말하라고 했던 것은 배도 고팠고, 회의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김영선 기자가 사의를 밝히더니 조이승미 기자까지 이야기를 끌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함.
1월 14일, 윤정은 편집장은 조이승미 기자에게 “회의 시간이 끝났는데 또 논의를 하려고 드는 건 비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말해 결국 사과를 번복한 것과 마찬가지임.
3. 기자들을 일다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태도와 불신
사례1) 일다 사무실이 같은 건물의 맞은편 방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중,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조이승미 기자에게 “서로 친한 김영선 기자, 나윤 기자, 부깽 기자 셋이 붙어 앉지 않도록 조이승미 기자가 자리 배치 시 편집부에 협조해주길 바란다.”고 말함.
1월 11일, 취재기자들이 그런 식의 발상 자체가 어이없다고 문제를 제기함. 그러자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조이승미 기자가 어떤 말을 들을 때, 자신을 위하는 이야기인지 자신을 해하는 이야기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라며 “조이승미 기자가 왕따 같아서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라고 변명함.
1월 14일,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조이승미 기자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냐”며 화를 냄.
사례2) 1월 9일 기획회의 시, 사이트 개편을 논하던 중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새로운 사이트에는 로그인 기능이 없을 것이라 말함. 이에 부깽 기자가 로그인 기능은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사이트 기획안을 다른 기자들도 공유하면서 개편에 대해 논의하자고 말함. 그러자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기자들을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메일로 공유하겠다.”라고 답변함.
사례3) 취재진은 편집진이 현재 일하고 있는 구성원은 불신하고 과거 함께 일했던 이들이나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외부 사람들만을 신뢰한다는 문제를 제기함. 이에 편집진은 “일다를 만들어왔고 현재 만들어나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으면서도 그 역할에 따른 대우나 사례는커녕 고마움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한 많은 일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동문서답함. 박희정 대표와 윤정은 편집장은 “일다가 5년 동안 어떻게 꾸려져 왔는데, 돈도 한 푼도 안 받고 일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취재기자 4인이 일순간에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답함.
4. 문제 제기 시 기자 자질을 언급하며 사생활을 들먹이고 비방하는 태도
사례1) 취재진은 평가회의 때 아무런 구체적인 기준이나 근거 없이, 이미 보도된 기사에 대해 편집진으로부터 “기사 질이 떨어진다.”거나 “다른 기사를 베낀 것 같다.”는 비방을 듣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 편집진은 “이 정도는 기자로서 성장하려면 들어야 할 말”이라거나 “그렇게 신랄하게 말하지도 않았다.”라고 대답함.
사례2) 11월, 일다 호프를 앞두고 CMS 후원자들에게 호프 홍보, 출판 홍보 등을 할 일이 생겼음.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조이승미 기자에게 통화내용에 관한 내용을 정해 백여 명의 CMS 후원자에게 그대로 전화 홍보할 것을 지시했음. 조이승미 기자는 사흘 동안 후원자들에게 연락하는 전화 업무를 했음.
약 한 달 후, 조이승미 기자가 조이여울 전 편집장에게 일다 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음. 그러자,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조이승미 기자가 CMS 후원자들에게 전화 홍보를 한 것을 갑자기 언급함. “기자답지 못하게 텔레마케터 서비스직 여성처럼 통화했다.”라고 문제 삼음.
취재기자들이 1월 11일, 편집장의 일방적 지시로 이루어지는 일 분배와 텔레마케터 서비스직 여성을 비하하는 듯하며 기자를 비난하는 위와 같은 평가는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음. 그러나 편집진은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음.
사례3) 사무실 안에서 공공연하게, 편집진이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기자의 사생활에 대해 뒷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지적했음. 편집진은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음.
5. 효율성을 강조하며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
사례1) 취재기자 4인은 맥락과 상관없이 효율성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함. 편집진으로부터 “2~3명이 일할 때보다 7명인 지금 효율성이 더 떨어진다.”는 말을들었을 때, 우리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밖에 취급당하지 않는 듯했다고 말을 함. 이에 대해서는 편집진은 대답하지 않았음.
● 취재기자 4인은 일다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점에 책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1월 11일 회의 시, 조이여울 전 편집장이 인정했듯 일다는 이미 문제를 자유롭게 제기하고 토론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다는 폐쇄적인 의사소통 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쌓여왔던 문제 의식이 1월 9일 기획회의를 계기로 크게 불거졌으며, 편집진의 반응은 구조에 대한 모든 문제 제기를 기자 자질론으로 환원시키거나 개인에 대한 인신 공격에 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하고자 했던 조이승미 기자에게는 퇴직금만을 언급하며 퇴사를 권고했습니다.
이렇듯 내부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취재기자 4인은 일다를 아끼는 독자들과 이 문제 의식을 나누며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 여성주의저널 일다는 소개글에서 일다의 가치와 지향에 대해 “새로운 여성들의 역사를 써나갑니다. 소수자의 편에 서서 인권을 말합니다. 다양하고 발전적인 여성주의 담론을 만듭니다. 민주적인 소통과 참여를 바탕으로 성장합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취재기자 4인은 이러한 지향점에 동의했기 때문에 일다에서 일해왔습니다.
취재기자 4인은 언론으로서의 일다가 갖추어야 할 편집진의 권한, 공정성 등이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박희정 대표, 윤정은 편집장, 조이여울 전 편집장 등 편집진 3인을 기자로서 신뢰하고 존중합니다. 다만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언론으로서 편집권의 행사 방식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구성원들의 평등한 참여를 담보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취재기자 4인은 일다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의 변화 가능성을 믿으며,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이 일다가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이기를 바랍니다. 취재기자 4인은 일다가 여성주의 언론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가지며,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취재기자 4인은 일다의 편집진 3인에게 그간 있어왔던 반여성주의적, 반인권적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일다가 보다 수평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 일다가 지향하고 있는 여성주의 가치들을 단지 기사라는 결과로만이 아니라 기사를 생산하는 과정과 일상에서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 2008년 1월 17일 김영선(나루), 나윤, 부깽, 조이승미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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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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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검정 노트북은 젊은 날 작가로서 안나 울프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보며,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원주민의 갈등, 작가로서 안나와 한 개인이자 여성인 안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검정 노트북이 끝날 때 안나는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젊은 날에 수치심에 찬 냉소를 보낸다.

“이건 향수로 가득 차있다. 단어마다 향수가 서려 있다. 쓸 때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무엇에 대한 향수란 거지? 알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다시 경험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안나’는 적, 아니면 너무나 잘 알아서 보고 싶지 않은 옛 친구와 같은데.”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기록한 빨간 노트북은 정치 참여에 대한 좌절과 실패를, 노란 노트북은 안나와 마이클의 연애와 결혼을 토대로 남녀관계의 갈등과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제3의 그림자’라는 소설로 그려낸다.
파란 노트북은 안나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소설로 허구화 하는 것이 현실도피라 여긴 안나가 ‘일기’를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토미와 몰리가 다투는 곳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즉시 그 장면을 단편소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 -모든 것을 허구로 변형시키는 것- 은 일종의 도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나는 결코 단순히 일어나는 일만을 기록하지 않는 걸까?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모든 것을 허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일종의 수단임이 명백하다. (…) 이제부터는 일기를 쓸 테다.”

안나는 일기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주변에 의도적으로 방관해 왔거나 혹은 기억에서 억제해 왔던 경험의 조각들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네 권의 노트북들은 전부 사라지고 내부의 황금 노트북이 등장한다. 이 노트북은 파편화된 안나들 간에 내재하고 있던 긴장들을 해결하는 위치에 자리하면서 네 권의 노트북을 한 권으로 통합하고 있다.
또 다른 내부 소설로써 전체 소설을 감싸는 ‘자유로운 여성’에서 안나는 객관적인 서술자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를 사는 안나는 삶의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과거의 이상적인 안나와는 달리 더는 사람의 ‘유일한’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내부와 주변의 혼돈을 포용하며 이야기를 쓴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며 기대하는 역할 간의 갈등, 예술가로서 안나와 개인으로서 안나의 갈등, 이성과 감정의 괴리들로부터 안나가 획득하는 비전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으로 사회 이념과 신화, 가치체계가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고 테두리가 둘리기 이전의 상태’이다.
“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어디나 우리가 바라보는 구름처럼 변하지 않거나 해체되지 않는 생활 방식은 없다.”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은 안나의 비전을 이어간다. 여성과 남성 등의 성별 구분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분법적 원리를 벗어나,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삶의 실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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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소설로 일컬어지는 『황금 노트북』은 1962년 출간된 후부터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여겨졌다.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1973년 판 『황금 노트북』 서문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을 위한 트럼펫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논의를 일축한다.

“『황금 노트북』이 수많은 여성적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 나는 이 책이 페미니즘 운동 이후 창조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태도들이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쓰고 있다. (……) 이 책의 핵심, 그것의 구조,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이것저것으로 분리시키고 구분 지어서는 안 된다.”

『황금 노트북』은 1950년대 여성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레싱 역시 여성 권리를 명확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인데도, 서문을 들며 ‘작가는 페미니즘과 연계를 거부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리스 레싱은 당대 여성운동의 움직임과 그 과정 그리고 성과를 주시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서문을 통해 반대한 ‘분리’와 ‘구분’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페미니즘 진영의 큰 축이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경계로 해석될 수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남성도 적으로 간주하며 여성만의 자율적인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찬미하며 어느 정도 분리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여/남 구분에 따른 계층적이고 이중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도리스 레싱은 『황금 노트북』이 여/남 간의 투쟁으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이 국지적이라며 무조건 지지하기를 거부한다. 『황금 노트북』이 형식이나 주제에서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작품이 결코 ‘페미니스트 선언서’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에서 남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간의 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을 아우르며 여성문제를 ‘분리된 여성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이란 차원까지 확대한다.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서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들어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할 때, 도리스 레싱이야말로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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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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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 Local Caption *** Ursula Le Guin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 어슐러 르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고,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변하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이분은 뿌리째 뒤흔들린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온다.
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두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실수를 하곤 한다.
제1차 에큐멘 조사원 보고서는 겐리 아이 같은 사절단을 위해 충고를 남겨 놓는다.

“여러분이 게센인을 만난다면 남자와 여자가 있는 양성사회에서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성 또는 반대 성 사이의 양식화 된 즉 남녀 간의 상호작용을 기대하고 그들에게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에 상응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성적 상호작용이 보여 주는 그러한 양상은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을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우리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인가?”

게센 행성은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야? 여자야?’ 같은 질문이 아예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어슐러 르귄은 인간의 성별화 변용을 통해 사회구조와 개개인들이 그들의 많은 부분을 성별 구분을 통한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더불어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에큐멘 조사단원의 보고는 계속된다.

“행성 겨울에 오게 될 선발대원이 아주 침착하거나 나이 든 사람이 아닐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쉬우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남자는 으레 그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여자는 그의 여성다움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겨울 행성에서 그러한 것은 통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만 존중되고 판단될 뿐이다. 그것은 사실 소름끼치는 경험이다.”

어슐러 르귄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를 통해서 상대방을 성에 상관없이 한 인간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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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아홉 생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마틴’과 ‘퓨’는 ‘라이브라’ 행성 실험 기지에 파견되어 있다. 그 둘의 임무를 지원하고자 ‘10클론’이라는 한 사람의 창자 세포로부터 만들어진 10명의 복제인간이 기지를 방문한다.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복제 인간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그들 모두가 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퓨’가 10클론 중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하는 것을 보고 근친상간인지 자위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자가 개별적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머리와 10개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론의 특성으로 그들은 주어진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해내지만, 결국 사고로 아홉의 클론은 죽고 ‘카프’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카프는 생애 처음으로 ‘다중 자아’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서서히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아홉 생명」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실렸는데, 어슐러 르귄이 보낸 원본 원고에서 ‘사소한’ 부분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필명 또한 ‘어슐러 K. 르귄’이 아니라 ‘U. K. 르귄’으로 표기됐다. 어슐러 르귄은 이에 대해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자신을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며 성적 편견을 보였던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말한다. 비록 「플레이보이」를 통해 SF가 대중적으로 크게 전파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들의 수준은 소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플레이보이」가 바꿨다는 ‘사소한’ 부분은 ‘마틴’과 ‘퓨’ 두 남성에 관한 부분이다. 어슐러 르귄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나타내지만, 플레이보이는 이를 흡사 우정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살아남은 카프가 퓨에게 던진 “마틴을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플레이보이」는 “마틴을 좋아하나요?”라고 바꾸어 놓았고, 퓨의 “그래, 사랑해”라는 대답을 삭제했다.

어술러 르귄은 퓨의 “… 우린 서로 외로웠어.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라는 말에서 동성애를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성애로 묘사한다.

어슐러 르귄의 SF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 곳곳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아나키즘의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상상하라’고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고와 직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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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성소설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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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운동의 성서로 불렸던 『여성과 노동』의 작가 올리브 슈라이너(1855~1920)는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한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다. 그가 21세기를 살았더라도 저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디스토피아로만 단정 짓고 미리부터 끔찍해 할 필요는 없다.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Science Fiction)가 지향하는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현 사회와 인간을 되돌아보는 데 방점을 둔다. 실제로 SpeculativeFiction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에 꼭 다다르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새로운 말과 새로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때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F는 아직 오지 않은, 혹은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근간으로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놓친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이 말을 만드는 작업에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시간적, 공간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새로운 언어로 펼쳐진다. 이 말은 기존 언어 체계에 갇혀 있던 상상력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SF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고, 1960년대 뉴 웨이브와 함께 좌파 남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인종과 계급, 반전을 다루는 작품이 늘었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종속적이었다. 그 남성 작가들의 세계관을 통해 여성과 젠더가 드러나는 방식은 사회의 시선과 일반 남성에게 내재된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뉴 웨이브’의 기치를 두고 ‘페미니즘SF’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뉴 웨이브’는 SF에서 드러나는 테크놀로지의 상상력만큼,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언어와 사회적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엮이면서 소설의 언어나 서술 상의 변화를 통해 정치와 생활양식에 대한 급진적인 양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서서히 발표됐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고전적 소재였던 시간여행, 우주, 사이버 펑크 등에서 벗어나 새롭고 실험적인 주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기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와 성차를 규정짓는 방식에 균열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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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 러스의 말마따나, ‘SF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남녀 역할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될 필요가 없’었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뒤엎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조 속에 미묘하게 녹아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문제를 구호와 선언을 뛰어넘어 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제시했다.
페미니즘과 SF의 매혹적인 조합에 빠져들고자 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1994년 여성사에서 출간된 『세계여성소설걸작선』은 비록 SF라는 말은 빠져있지만, 훌륭한 페미니즘 SF의 길잡이다. 15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선집은 ‘뭘 읽어야 성에 차지?’ 하고 갈증에 탔던 이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다. 달근달근하며 서서히 아드레날린이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소설들로 꽉 차있어,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이 술술 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 오르내리던 조안나 러스나 『페미니즘 사전』으로 잘 알려진 리사 터틀의 단편들을 만날 수도 있다.

리사 터틀의 「남자의 여자」(The Wound)나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When It Changed), 존 발리의 「레오와 클레오」(Options),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등은 남녀 이외의 성별이 존재하는 사회, 생물학적 성징이 없던 인간이 특별한 계기로 성이 분화되는 사회, 한 가지 성만 남은 사회에 다른 성이 나타난다거나, 성전환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사회 등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 사회의 차별적인 성역할 분담이나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관이 실제로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페미니즘 SF는 성별 구획에 갇혀 살아가던 사회의 젠더 구조를 흐트러뜨리며,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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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출간 당시 엄청난 논쟁에 휘말렸다. 최소 8백 년 동안 남성이라고는 없었던 ‘와일어웨이'(Whileaway), 천 년 후의 지구를 무대로 하는 소설은 그 세계에 “그들이 돌아왔어요! 진짜 지구 남자들이요!”라는 외침과 함께 남성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치자면,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하던 ‘여성들의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라’는 주장들로 가득하다. 이런 이유로 당시 조안나 러스의 작품을 실어 주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갈 곳을 못 찾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후에 SF 역사상 가장 큰 획으로 일컬어지는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앤솔러지 『다시, 위험한 상상력』(Again, Dangerous Visions 1972)에 실리게 된다. 그 직후 SF에서 휴고상과 더불어 가장 권위 있는 네뷸러 상을 받는다. ‘와일어웨이’는 1975년 페미니즘 SF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피메일 맨』(The Female Man)으로 이어진다.
극으로 치달은 가정폭력을 다루는 팻 머피의 「식물 아내」(His Vegetable Wife)와 「나뭇잎 사이의 여인들」(Women in the trees) 그리고 코니 윌리스의 「섹스 또는 배설」(All My Darling Daughters), 수젯 헤이든 엘긴의 「그레이스 고모를 위하여」(For the Sake of Grace) 등은 SF만의 형식으로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행여나 끌어온 미래마저 우울해진다면, 이 책의 마지막을 어슐러 k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Sur)로 마무리 짓기 바란다. 딱 그만큼의 관용으로 남성들의 세계를 내려보며 ‘애쓴다’라고 한마디 되뇌면 충분한 위로가 될 것이다. 외에도 15편의 페미니즘 SF가 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맞닥뜨린 세계를 조롱하고, 분노하고, 때론 헤집으며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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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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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에 걸린 현수막이다. 마땅히 축하 받고 축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준비된 며느리”라고 칭할 때, 한 개인의 다양한 역사와 정체성은 생략되고 없다. 그 과정에서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역시 소멸되고 만다. 소멸된 개인으로서의 여성은 뜬금없이 ‘결혼’을 통해 ‘아내’이거나 ‘며느리’거나 ‘어머니’가 되는 것으로 사회에 귀속된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전문직 여성이면서도 “준비된 며느리”로 한정 지어지는 것은 여성이 이 사회에서 ‘여성’이며 동시에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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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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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페미니즘 비평을 큰 틀 안에서 보자면 가부장적인 윤리적/인식론적 가설 토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객관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 ‘객관성’과 ‘권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방법론은 페미니스트마다 제 각각의 입장을 견지하며 발전해 왔다.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에서 토릴 모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전통 아래서 영/미 페미니즘이론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영/미 구분에 대해 자넷 토드의 지적대로 사회주의적 전통에 있는 ‘영국 페미니즘’과 ‘미국(백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릴 모이의 ‘영/미’와 ‘프랑스’ 구분은 그들이 활동하는 지적 전통하에서 텍스트의 접근 방법을 토대로 하니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모이는 경험주의적 전통에 있는 일레인 쇼월터, 케이트 밀렛, 메어리 엘만, 샌드라 길버트&수잔 구바와 이에 대비되는 반본질주의적 특성을 갖는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텍스트 등을 분석하고 있다. 모이는 이들 텍스트의 탈정치화된 독해법에 대립해서 정치화된 독해법을 증명해 내려고 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 비평의 의의를 이론이나 방법론 차원을 넘어 정치성의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완전히 새로운 제3의 태도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담론의 장(싸움의 장)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깝다. 이 책의 역자들은 모이가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이라는 것이 수사적인 의미 외에 어떤 정치적 힘을 지니는지”에 회의를 가지며 거리 두기를 하는데, 모이가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페미니즘들 사이에서 부재한 ‘비판적 논쟁’을 끌어내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의 시간」에서 ‘차이’의 담화와 이에 대립하는 거울의 영상으로서 ‘평등’의 담화 그리고 이 모두를 극복하는 해체와 초월의 ‘제3의 공간(세대)’을 제시한다. 제3공간은-공간인 가운데 욕망을 갖는 정신의 공간으로- 모든 성적 정체성, 이분법적인 대립물, 모든 가부장적인 행태는 ‘형이상학’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토릴 모이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상당히 빚지고 있지만 ‘차이’와 ‘평등’이 단순히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평등’을 필수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했을 때, 차이와 평등의 페미니즘 논리 또한 해체 위기를 맞게 된다. 크리스테바에게 세 가지 페미니즘 공간들은 논리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모이는 크리스테바와는 달리 이 세 가지 입장을 한 공간에 모두 견지하고자 한다. 논쟁적으로 어느 한 가지 입장을 택하는 동시에 차이, 평등, 제3공간 페미니즘의 모순점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다. 가령 스피박이 『다른 세상에서』를 통해 보인 텍스트 전략-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 재생산에 대한 페미니즘적 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식민지 주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이 동시에 불거져 나와 갈등상태에 놓이게 된 것-처럼 “서로를 위기로 몰아 서로를 치명적으로 방해하는” 여러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잇달아 생기는 위기는 선형적인 연속성을 파괴하고 주체와 주체의 담론들이 탈중심화하려는 욕망을 도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존재론의 연막」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어떤 이론이든 한 입장에 서서 모든 영역의 이론을 완전히 포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입장을 택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틀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입장을 제시하고 전략적으로 특정한 주장을 발전시켜 간다는 것은 언제나 경쟁 위치에 있는 다른 입장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부정하며 배제한다는 데에서 페미니즘‘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단 하나의 ‘올바른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덧붙이 –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이론에 대한 개괄서로도 손색이 없는데, 좀 더 쉽게 접하려면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과 라캉(5장)에 관한 보론 격으로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듯싶다. 둘 다 매우 가벼운 책이다. 여기서 ‘가벼운’은 물리적 무게이다. 토릴 모이에 대한 다른 번역으로는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한신』에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문체」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가장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의 『타자인 여성의 반사경』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 하고 있지만 그 첫 장이 『현대문학 비평론/한신』에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마주 향해 바라보기」가 『영미여성 소설론/정우사』에 번역됐을 뿐이다. 더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방에는 없다. 제발 번역 좀 해주면 꼭 “새”책으로 사서 읽으마. 무수히 많은 전공자를 두고, 없는 능력 시간 쏟아가며 원서로 읽기엔 왠지 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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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정상적인 무료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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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끔찍하게 정상적인 (셀레스타 데이비스Celesta Davis 감독, 미국, 76분)
일시 : 2005년7월8일(금)
장소 : 광화문 미디액트(5호선 광화문역 5번출구 혹은 1,2호선 시청역 4번출구 프레스센터 방향 5분거리)
주최 : 10회 여성영화관객상기획단
주관 : (사)여성문화예술기획
더 자세한 내용은 여성주의영화 무료 시사회를 참고하세요. 아, 놀이방 운영은 안한다고 합니다.
지난 여성영화제에서 표를 구할 수 없어서 못 봤던 영화입니다. 이번엔 일찍부터 줄서서 꼭 볼 계획입니다. 오는 금요일 7시 30분 상영이고, 15분 전부터 표를 나눠준다고 하네요.
감독과 작품에 대한 소개가 궁금하시면 지난 여성영화제 홈페이지를! 보다 더 궁금하시면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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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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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mi-ring은 충분히 떠들썩하다. 이런 들썩임은 가벼운 얘기부터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 진중한 고민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가벼운’이라는 수사는 경망스럽거나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분주하고 좀 더 일상적인 것을 말한다. 챔피언을 쓰러뜨리는 것이 한방의 펀치가 아니라 무수한 잽이듯이 견고한 중심을 흔드는 것은 자잘한 주변의 분주함일 것이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우리의 ‘가벼운’ 일상 말이다.(그를 핑계 삼아 나는 당신들에게 잔뜩 귀 기울이고 있다.) 나는 mi-ring에 ‘쉽게’ 덜컥 가입한 쪽인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가입규약이 내 ‘입장’과 그닥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장이란 단순히 하나의 시각을 갖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당신의 젠더가 무엇이든 간에 그 고민이 삶 속에 지속적으로 녹아내린다면 어떤 가능성이든지 개연성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고, 하나의 시선을 넘어서 세계관이자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페미니즘’들’은 그런 것이다.
“나는 부깽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부깽은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의 요건으로서 생물학적 성이 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젠더가 요구된다고 본다. 이것은 ‘부깽은 남성이다’에 괄호를 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괄호 안의 ‘남성’은 남성/여성이라는 권력 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극단적 이분법으로만 읽혔을 뿐이다. 괄호 치기는 고정된 성별 정체성 바깥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읽어내고 권력화된 이분법과 투쟁하는 것이다. 이 권력에 대한 투쟁은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차이’는 더는 ‘~과 다름으로써’ 열등한 것, 부정적이고 분할적인 것이 아니라, ‘~과 다름으로써’ 지금과 다른 대안적 가치들을 생산할 수 있는 한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를 연다.
“나는 부깽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부깽은 페미니스트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이 ‘남성’은 새로운 성별로써 ‘다른 남성’ 또는 ‘다른 여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운명을 벗어난 ‘탈성별화된 인간’으로서 주체이다.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세계에서 여성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변화된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행동’을 통해 새롭게 표상된 세계 안에서 ‘차이’를 긍정하고 모든 상징적 소수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격과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모든 주변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발화의 사회적 지점을 떠나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 페미니즘’들’이 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하딩의 말처럼 필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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