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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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 분류를 꽤 잘해놓은 편이다. 밖에서도 어떤 책이든 꽂혀 있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고 뭔가 필요한 책이 있으면 전화를 해서 동생이나 어머니께 책의 안부를 묻곤 한다. 이 안부란 그 책이 과연 책장 어디쯤 지금 있느냐 없느냐부터 책의 저자나 출판사가 어딘지 번역자가 누구인지 등등 책의 전반적인 것을 포함한다. 『러시아 인형』에 대해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해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꽂혀 있어야 할 곳에 책이 없다. 남미 문학이 있는 곳을 주의 깊게 살폈는데도 찾질 못하고, 혹시나 싶어 대산 문학총서가 몇 권 따로 있는 곳을 찾아봐도 나타나질 않는다. 동생에게 혹시 가져갔느냐고 물어도 무슨 책 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대상이 명확히 기억나지 않을 땐, 주변을 떠올려 보곤 한다. 주변을 기억하는 것은 흡사 최면 같은 것인데 곰곰이 연상되는 것을 쫓아간다. 그건 색이기도 하고 소리이기도 하며, 때론 냄새이기도 하다. 러시아 인형을 산 날부터 시작해보자. 언제였을까? 날이 더워서 창문을 열어뒀던 것 같다. 왕파리가 날아들어 벽천장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격렬하게 몸을 들이박는 것이다. 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읽던 책을 침대맡에 두고 한참을 파리 잡기와 씨름했던 듯싶다. 그리고 책읽기를 계속 했는지 어쨌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이후부터 그 책의 행방을 잃었던 걸까? 찬찬히 며칠 전을 떠올려 보는데, 책장에 빈틈이란 분명히 없었다. 그럼 그 며칠 전까지는 분명히 꽂혀 있었단 얘긴데, 아니 어쩌면 그 즈음에 『러시아 인형』의 자리에 다른 책이 꽂혔을 수도 있다. 몇몇 단편의 줄거리가 기억에 있는 걸 보니 이후에도 읽었던 것 같다. 보다 뒤에 긴소매를 입고 다닐 적에 전철에서 책을 펼쳤던 기억이 난다. 뭔가 짐을 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빨래 더미였나? 빨래를 들고 갔다면 명동이었을 테고, 소란스럽고 역한 고기냄새가 있었다. 그럼 아마도 집에 오는 길이었을 테니 어딘가 밖에 흘렸을 리는 없다. 가방에 책을 넣고, 그 즈음에 메던 가방을 열어봤다. 텅 비어 있고 웬 유인물만 꾸깃꾸깃하다. 아니야, 너무 먼 시간이야. 요즈음에 방문객들이 잦았다. 그 중 몇은 책장에서 책들을 빼냈었고, 그때쯤일 수 있겠구나. 책이 빡빡이 꽂혀 있어서 내가 꼽겠다고 했던 책들이 몇 권 있다. 책상 위에 널 부러 놨는데, 그 틈에 있을 수도 있다. 책상 위에 온갖 잡동사니와 있던 책들은 대강대강 자리를 잡게 하고 한쪽 틈에 쌓아 두었다. 내 키를 한 뼘보다 크게 넘겼으니 족히 2미터는 쌓았나 보다. 찬찬히 제목을 본다. 없다. 이젠 슬슬 짜증이 치민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나중에 찾자 나중에 아침에 일어나면 보일 거야. 지가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한동안 침대 위에도 책이 뒤엉켜 있었다. 그렇다면 방을 치울 때 제일 먼저 침대를 청소하지 않았었나. 침대를 들어 올렸다. 벽면 쪽에서 황지우의 『나는 어느날…』이 먼지를 뒤집고 있다. 황지우는 그닥 반갑지 않다.
『러시아 인형』은 어디로 간 것일까?
황지우 시집의 먼지를 닦고 꽂으려는데 떡 하니 『러시아 인형』이 몇몇 소설들과 같이 뉘어 있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쌓였던 책을 침대 위 책장에 올려놓고는 말았었던 것이다. 다른 책 덮개에 가려져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냄새도 색도 소리도 필요 없다. 차라리 안경을 닦고 좀 더 침착해지면 그뿐이다.


카테고리 Mon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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