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네‘라고 짧게 뱉는 말이 한 주의 긴장감을 일순 풀어버리는 탄성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주 토요일, 좀 더 편히(여기서 얼마나 더 편해질 수 있을까 만은)쉬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보일러 공사를 구경 참견 세면 먼지를 들이마시며 얼렁뚱땅 보낸 견적이 43만원 이었다. 주말 비용치고는 꽤, 꽤? 좇나 많이 나갔지만 앞으로 아껴가며 잘 살아야지 위안하며 넘겼다. 겨우 넘겼단 말이다.
사흘 후 아랫집에서, 물이 또 새요,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옹송크려지더만 습관처럼 몇 날이 아프다. 오늘 드디어 토요일, 끔찍한 토요일, 다른 시공사를 찾았다. 견적 80만원(합계 123만원) “이것도 갈아야 하고 저것도 갈아야 하고…….” 이렇게 갈다간 가을에 풍년 나겠어 얼쑤. 300D를 포기하고 ‘그래 내 주제에 무슨 dslr이야’하며 D70이 나와도 ‘에잇 역시나 그림의 떡이야’ 하며 ‘내 주제를 알자 알아야해’ 하며 그렇게 이불 뒤집어쓰고 하며하며하며 꾹꾹 참았는데, 보일러만 멀쩡했어도 다 살 수 있었어. 설레고 행복에 겨워 ‘토요일이닷’ 탄성을 지르며 아무리 추워도 출사를 계획하고 ‘이까짓 세상쯤이야 다 찍어 버려’, 그렇게 깔봤을 텐데.
공사는 하루 종일 걸릴 것이래. 그래서 오늘 할 수가 없고 내일(내일? 일요일? 일요일은 빨간 날이잖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것 같데, 아랫집에 물이 흥건하니 오늘은 우선 보일러를 잠그라네. 온수는 더더군다나 써서는 안 되고, 오늘의 서울 날씨, 온도 최고-1℃, 최저 -7℃, 마음은 절대온도 0K,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아. 진공 상태가 된 머릿속을 수직 운동하는 단어를 멈출 수가 없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 머리를 뚫어도 좋으니 꺼져버리란 말이야. 훌쩍.
[작성자:] 부깽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 어슐러 르 귄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픽션의 운반 가방 이론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1986 (옮긴이 부깽)
초기 인류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 온대와 열대 지역에서는, 그 종(種)의 주된 식량이 식물이었을 것이다. 구석기, 신석기, 그리고 선사 시대에 이 지역에서 인간이 먹은 것의 65~80%는 채집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오직 극지방의 북극권에서만 고기가 주식이었다. 매머드 사냥꾼들은 동굴 벽화와 우리의 상상 속을 화려하게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남고 배를 불리기 위해 했던 일은 씨앗, 뿌리, 새싹, 줄기, 잎, 견과, 열매, 과일, 곡식을 모으는 일이었다. 거기에 단백질을 늘리기 위해 벌레와 연체동물을 더하고, 그물이나 올가미로 새, 물고기, 쥐, 토끼, 그리고 다른 엄니 없는 잔챙이들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그리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농업이 발명된 이후 남의 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농민보다 훨씬 덜 일했고, 문명이 발명된 이후 임금 노동자보다도 훨씬 덜 일했다. 보통의 선사시대 사람은 일주일에 약 15시간 정도만 일해도 꽤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15시간만 생계를 위해 일한다면, 다른 일들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서, 아마도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아기도 없고, 만들거나 요리하거나 노래하는 솜씨도 없고, 생각할 만한 흥미로운 거리도 없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매머드 사냥을 나섰을 것이다. 솜씨 좋은 사냥꾼들은 고기 덩어리와 상아 더미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돌아왔고, 그리고 이야기를 가져왔다. 차이를 만든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이야기였다.
내가 야생 귀리 낱알 하나를 껍질에서 씨름하듯 빼내고,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를 그렇게 빼냈다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란 어렵다. 그 사이 모기한테 물린 데를 긁었고, 울(Ool)이 웃긴 말을 했고, 우리는 개울가에 가서 물을 마시며 도롱뇽을 한참 구경했다가, 또 다른 귀리밭을 찾았다… 아니, 비교도 안 된다. 견줄 수조차 없다. 내가 거대한 털북숭이 짐승의 옆구리에 창을 깊숙이 꽂아 넣는 동안, 우브(Oob)는 거대한 상아에 꿰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피가 진홍빛 격류처럼 사방으로 치솟았으며, 매머드가 쓰러지면서 부브(Boob)를 짓눌러 곤죽으로 만들어버렸고, 나는 그 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을 꿰뚫어 뇌까지 관통하는 화살을 쏘았다는 이야기와는.
그 이야기에는 액션(Action)만 있는 게 아니다. 영웅(Hero)이 있다. 영웅은 강력하다. 어느새 들판에서 귀리를 줍는 남자와 여자, 그들의 아이들,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의 솜씨, 사색하는 이들의 생각, 노래하는 이들의 노래까지 모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영웅의 이야기 속에 징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훗날 『3 기니』로 완성될 책을 구상하던 시절, 자신의 공책에 ‘용어집(Glossary)’이라는 제목을 적어두었다.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용어집에서 heroism(영웅주의)은 ‘botulism(보툴리즘)'((식중독의 한 종류))으로, hero(영웅)는 ‘bottle(병)’로 정의되어 있었다. 영웅을 병으로 보는 것, 그것은 냉철한 재평가다.
이제 나는 제안한다. 병이야말로 영웅이다.
단순히 진이나 와인 병이 아니라, 더 오래된 의미에서의 용기,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다.
담을 그릇이 없다면 음식은 빠져나가 버린다. 귀리처럼 싸우지도 않고 꾀도 부리지 않는 것조차도 말이다. 손에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배에 채워 넣는다. 배가 첫 번째 용기니까. 그러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어떨까. 추운 비가 내릴 때, 몇 줌의 귀리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작은 움(Oom)에게도 조금 주어 조용히 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배 한 번 채울 만큼과 한 줌 이상을 어떻게 집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비 속에서 눅눅한 귀리밭으로 가야 한다. 아기 우우(Oo Oo)를 넣어 두고 양손으로 귀리를 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잎사귀, 박 껍질, 그물, 주머니, 띠 천, 자루, 병, 냄비, 상자, 용기. 담는 것. 받는 것.
가장 처음의 문화적 도구는 아마도 담는 그릇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론가들은 가장 초기의 문화적 발명이란, 채집한 것을 담아 둘 용기와 그것을 나르는 끈이나 그물 같은 운반 도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피셔는 『여성의 창조』(McGraw-Hill, 1975)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 멋지고 크고 길고 단단한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영화((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유인원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쳤던, 아마 뼈였던 그것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살인을 해냈다는 황홀감에 젖어 으르렁거리며 그것을 하늘로 던졌고, 회전하던 그것은 우주선으로 변하여 우주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세상을 수정시키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멋지고 아름다운 태아가 은하수 주위를 홀로 떠다닌다. 물론 남아이다. 이상하게도 자궁도 없고 어떤 모태도 없이 말이다.
모르겠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우리는 막대기와 창과 칼, 치고 찌르고 후려치는 그 긴 것들에 대해 충분히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담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담는 그릇,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위한 용기(容器).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래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니 분명 생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기보다 앞선 것이었을 것이다. 무기는 늦게 나타난, 사치스럽고 부차적인 도구다. 쓸모 있는 칼과 도끼보다도 오래되었고, 꼭 필요한 내리치기, 갈기, 파기 도구와 나란히, 아니 그보다 먼저였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감자를 캐냈는데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갈 그릇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에너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도구와 함께,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으로 가져오는 도구를 만들었다. 나한테는 말이 된다. 나는 피셔가 ‘운반 가방 이론’이라고 부르는 인간 진화 이론의 지지자다.
이 이론은 이론 속에 넓게 깔린 모호한 영역을 설명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론들로 가득한 영역을 피해 간다. (그 터무니없는 영역은 대개 호랑이와 여우, 그리고 다른 강한 영역성을 지닌 포유류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이론은 나를, 개인적으로, 인간 문화 안에 놓이게 해주었다. 그전에는 결코 그런 뿌리 내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문화가 길고 단단한 물건을 사용하여 찌르고, 내리치고, 죽이는 데서 비롯되고 그 위에 정교하게 구축된 것이라고 설명될 때, 나는 그 문화에 특별히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참여하고 싶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릴리언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문명의 결핍이라고 오해한 것은, 여성의 ‘문명에 대한 충성심’의 결핍이다.”) 그 이론가들이 말하던 사회, 문명은 분명 그들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완전한 인간. 내리치고, 찌르고, 쑤시고, 죽이는 인간. 나도 인간이 되고 싶어서, 나 역시 인간이라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조건이라면, 무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죽이는 것이라면, 나는 인간으로서 심각하게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그렇지, 그들은 말했다. 네 정체는 여자다. 어쩌면 인간(human)조차 아닐지 모른다. 분명 결함이 있다. 이제 조용히 해라. 우리가 계속 ‘영웅으로서의 인간(Man) 상승사’를 이야기할 테니.
그러시든가, 나는 말한다. 오트밭으로 걸어가면서. 슬링엔 아기 우우(Oo Oo)를 넣고, 작은 움(Oom)은 바구니를 들고 있다. 당신들은 계속 이야기하면 된다. 맘모스가 부브(Boob) 위로 쓰러졌던 이야기, 카인이 아벨을 쓰러뜨린 이야기,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이야기, 불타는 젤리가 마을 사람들 위로 떨어진 이야기((드레스덴 폭격)), 미사일이 악의 제국에 떨어질 이야기, 그리고 ‘인간(Man) 상승’((the Ascent of Man,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다른 모든 단계들을.
만약 무언가를 담는 일이 인간적인 일이라면, 그것이 유용해서든, 먹을 수 있어서든, 아름다워서든 원하는 것을 가방이나 바구니, 말아 올린 나무껍질이나 잎, 혹은 자기 머리카락으로 짠 그물이나 아무튼 무엇이든 간에 넣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 그리고 그 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더 큰 주머니나 가방, 사람들을 담는 그릇인 셈인데, 그렇게 담아 온 것을 나중에 꺼내 먹거나 나누거나 더 단단한 그릇에 넣어 겨울을 위해 저장하거나 약주머니나 제단이나 박물관, 신성한 것을 담는 장소에 넣어두고, 다음 날에도 아마 거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 만약 그것이 인간적인 일이고 그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인간인 것이다. 온전히, 자유롭게, 기꺼이. 그렇게 처음으로.
우선 분명히 해두자. 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싸움을 피하는 인간도 아니다. 나는 늙어가는, 화가 난 여자이고, 손에 든 핸드백을 세차게 휘두르며 불량배들을 쫓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나 다른 누구도 그런 일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들판에서 귀리를 계속 모으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빌어먹을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차이는 이야기가 만든다. 이야기가 내 인간성을 내게서 숨겼다. 맘모스 사냥꾼들이 들려준 그 이야기, 내리치고, 쑤시고, 강간하고, 살인하는 이야기. 영웅 이야기. 보툴리즘이라는 멋지고도 치명적인 이야기. 죽이는 이야기.((죽이는 이야기(the killer story)는 ‘멋진 이야기’(죽인다!)와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닌다.))
때로는 그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더는 전해지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이 거친 귀리밭, 이 이방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몇몇은, 옛 이야기가 끝날 때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함께 끝장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긴박감을 안고,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삶의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와 말을 찾아 나선다.
그 이야기는 낯설다. 죽이는 이야기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지나친 말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온갖 말과 방식으로 삶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창조와 변형의 신화, 트릭스터 이야기, 민담, 농담, 소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인 이야기다. 물론 영웅은 자주 그것을 장악해왔다. 그게 그의 제국적 본성이자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장악하고 거느리며, 그것을 죽이려는 통제 불가능한 충동을 통제하기 위해 엄한 선언과 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자신의 대변자인 입법자들을 통해 이렇게 명령해왔다. 첫째, 서사의 올바른 형식은 화살이나 창의 형식이어야 하며, 여기서 시작해 저기로 곧장 가서 퍽! 하고 목표를 맞히는 것이다(목표는 쓰러진다). 둘째, 소설을 포함한 모든 서사의 중심 관심사는 갈등이어야 한다. 셋째, 그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소설의 자연스럽고 올바르고 알맞은 형식은 자루나 가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고,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약꾸러미와 같다. 그것은 어떤 것들을 서로, 그리고 우리와 강력하고도 고유한 관계 속에 담아두는 것이다.
소설 속 요소들 간의 관계 중 하나는 갈등일 수 있다. 그러나 서사를 갈등으로 환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나는 “이야기는 전투로 보아야 한다”고 쓰고, 전략과 공격, 승리 따위를 늘어놓는 글쓰기 지침서를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운반 가방/배/상자/집/약꾸러미로 생각해본다면, 그 안의 갈등, 경쟁, 긴장, 투쟁 등은 전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 자체는 갈등도, 조화도 아니다. 그 목적은 해결이나 정지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영웅은 이 가방 안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무대나 받침대, 혹은 정상에 서 있어야 한다. 그를 가방에 넣어두면 그는 토끼처럼, 감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SF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이 크고 무거운 자루를 들고 왔다. 내 운반 가방은 겁쟁이들과 덜렁이들, 겨자씨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알갱이들, 그리고 공들여 풀어보면 그 속에 파란 조약돌 하나와 다른 세계의 시간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작동하는 크로노미터 하나와 생쥐의 두개골이 들어 있는 정교하게 짜여 있는 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끝나지 않는 시작들, 입문들, 상실들, 변형과 번역들로 가득했고, 갈등보다 훨씬 많은 장난과 속임수, 함정과 망상보다 훨씬 적은 승리가 있었다. 멈춰버리는 우주선들, 실패하는 임무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생 귀리 껍질을 벗겨내는 일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로 만들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 쓰기가 쉽다고 누가 그랬는가?
만약 SF가 현대 기술의 신화라면, 그 신화는 비극적이다. ‘기술’ 또는 ‘현대 과학’(이 단어들이 흔히 쓰이듯, 검토되지 않은 약식 표현으로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과 첨단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은 영웅적 과업이다. 헤라클레스적이며 프로메테우스적이고, 승리로 구상된 것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된다. 이 신화를 구현하는 허구는 (인간이 지구, 우주, 외계 생명, 죽음, 미래 등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야기일 것이고, 또한 (과거든 현재든 종말과 홀로코스트를 그리는) 비극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술 영웅주의의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이라는-(살상의)-화살 같은 방식을 피하고 기술과 과학을 우선적으로 지배의 무기가 아니라 문화적 운반 가방으로 재정의한다면, 그 부수적 효과 중 하나는 SF를 훨씬 덜 경직되고 폭넓은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프로메테우스적일 필요도, 종말론적일 필요도 없으며, 사실 신화적 장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의 한 장르로 볼 수 있다.
이건 기묘한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도 기묘하니까.
제대로 이해된 SF는, 아무리 웃기더라도 모든 진지한 소설처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과 느끼는 감정, 그리고 사람들이 이 거대한 자루, 우주의 배, 될 것들의 자궁이자 지나간 것들의 무덤,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의 모든 것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묘사하려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인간(Man)을 그가 있어야 할 곳, 사물들의 질서 속 제자리 안에 두기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다. 들판에서 야생 귀리를 넉넉히 거두고 또 뿌릴 시간도 있고, 작은 움(Oom)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울(Ool)의 농담을 듣고, 도롱뇽을 지켜볼 시간도 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모아야 할 씨앗이 있고, 별들의 가방에는 여전히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끝>
예심 판사 앞에 선 열여섯 살 재봉사 엠마 리스
예심 판사 앞에 선 열여섯 살 재봉사 엠마 리스
베르톨트 브레히트
열여섯 살 재봉사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츠에서 예심 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혁명을 선동하는,
투옥이 따르는 전단을
왜 배포했는지 설명하라는 요구를 들었다.
대답으로 그녀는 일어서서 노래했다.
‘인터내셔널’을.
예심 판사가 고개를 저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소리쳤다.
“일어서시오!
이건 인터내셔널이오!”
DIE SECHZEHNJÄARIGE WEISSNÄHERIN EMMA RIES VOR DEM UNTERSUCHUNGSRICHTER
Bertolt Brecht
Als die sechzehnjährige Weißnäherin Emma Ries
In Czernowitz vor dem Untersuchungsrichter stand
Wurde sie aufgefordert, zu erklären, warum
Sie Flugblätter verteilt hatte, in denen
Zu Revolution aufgerufen wurde, worauf Zuchthaus steht.
Als Antwort stand sie auf und sang
Die Internationale.
Als der Untersuchungsrichter den Kopf schüttelte
Schrie sie ihn an: Aufstehen! Das
Ist die Internationale!
예심판사 앞에 선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이스
브레히트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이스가
체르노비치에서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요구받았다
왜 혁명을 호소하는 삐라를 뿌렸는가
그 이유를 대라고
이에 답하고 나서 그녀는 일어서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인터내셔널을
예심판사가 손을 내저으며 제지하자
그녀의 소리가 매섭게 외쳤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
김남주 번역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 1988)
레비나스
1. 레비나스에서 비극이 불가능한 이유.
필립 네모가 "어떻게 사유가 시작되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레비나스는 "이별이나 폭력적 장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의 단조로움에 대한 의식, 이와 같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나 망설임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고통, 비극이 바로 사유의 시작임을, 특히 레비나스적 사유의 시작임을 암시해 준다. 레비나스 고통의 철학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점에서 칸트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1) 변신론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2) 오직 도덕적 악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한계 안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며 (3) 윤리적 맥락에서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4)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 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변신론의 종말은 어떤 논리로 논박되었거나 또는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비합리적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특히 아우슈비츠와 같은 20세기 사건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신론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보고 있다.
변신론의 몰락으로 야기된 것은 (적어도 서양 전통 안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이제 어떠한 의미, 어떠한 유용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결국에는’ 좀 더 나은 선을 이룩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론이 변신론이었고 이것이 무너지자 이제는 고통의 의미, 고통의 유용성 자체가 또다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이렇게 못박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다. 고통, 비극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 비극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레비나스에서 윤리적 사실주의의 한계
레비나스의 핵심적인 윤리관 중의 하나는 "타인을 위한 나의 의로운 고통"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나의’ 고통 또는 ‘너의’ 고통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괴로워한 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한 무의미한 고통이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고통 또는 ‘우리의’ 고통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통을 뒤집어 놓는다. 그의 관심은 내가 받는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받는 고통에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관심은 타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물음에 관련해서 관심의 축을 ‘나’ 또는 ‘우리’로부터 ‘타인’으로 회전시킨 점에서 레비나스의 독창성이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관심 축의 전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받는 고통 중에서, 예컨대 아내나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가운데, 자기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각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발견의 과정은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고통 자체가 아무리 집단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고통 자체로서는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Dolls / 기타노 다케시
사랑은 단순한 신체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특히 대상을 열렬히 사모하는 경우에,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다. 또 사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증거하는 힘이기도 하다. – 메를로 퐁티
돌스 (Dolls) / 기타노 다케시 – 타자와 만나기, 사랑하기
영화는 메이도노 히캬쿠라는 분라쿠로 시작되고 있다. 이 분라쿠를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보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공연을 담은 영화를 보고 있다. 그보다 바깥에서 나는 이 영화 Dolls를 본다. 메이도노 히캬쿠가 끝나면서 인형극의 두 주인공인 추베에와 우매가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내 시선이 머물게 되는 곳이고, 나와 두 인형 사이의 간극(분라쿠와 그것을 공연장에서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것을 담은 영화를 보는 영화 속 사람들)이 허물어지는 곳이다. 간극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보일 몇 개의 짧고 진부한 이야기들이 영화 ‘속의’, 분라쿠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나도 현실에서는 이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담론은 시작된다. 타인과 만나서 엮이는 것 말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가는 마츠모토, 그는 앞으로 보장된 삶을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정신이 나간 옛애인(사와코)에게로 간다.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뒤 붉은색 끈으로 서로를 묶는다. 사랑을 위한 최초의 준비는 현재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에서부터, 나 ‘이외’의 것을 ‘나’와 묶으면서 시작된다. – 사랑의 관계로 묶인 타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당신에게 결핍된 단 하나의 존재이다.

추억의 속도는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다(dolls). 오직 묶인 끈만이 있다. 감독은 관객에게 당신들의 체험을 끄집어내라고 한다. 얼굴의 빈자리는 관객(사랑의 제3자)을 위한 자리이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무엇보다도 끈으로 엮인 유일한 존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얼굴(표정)을 잃는 것이다. 동시대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친다. 바람개비는 무심히 그러나 격렬히 돈다. 그리고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가면’인가. 교통사고의 상처를 안고 모습을 감춘 아이돌 스타 하루나. 그녀를 몇 년째 흠모하는 소년(누쿠이)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그녀를 찾아간다. 눈을 찌름으로써 소년은 ‘타인’에서 ‘타자’로 위치를 이동하게 된다. – 타인이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이라면 타자는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 감독은 계속해서 당신은 사랑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 사랑은 하루나(타자)와 누쿠이(나) 사이의 불공평에서 출발한다.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내 안에 가둘 수 있는 눈을 잃은 후에, 모든 주도권을 잃은 후에 현현한다. 누쿠이야 말로 하루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소통 가능한 타자이다. 우리는 ‘나’를 온전하게 알아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던가. 상호성이 더는 신기루나 오해 소강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된 순간이다.

도시락을 들고 30년 동안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료코), 추억은 멈추지 않고 거슬러 오래전 약속을 끄집어 온다. 문득, 자신을 끝까지 기다리겠다던 장소에 도착한 남자(히로) – 기억은 거짓말처럼 옛사랑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서로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랑은 모든 틈을 메우고 망각시킨다(고 믿는다.) 그(그녀) 역시 행복하다. 생애 어느 때보다, 그녀(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만으로 ‘가장’ 행복하다.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한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울림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인 것이다. 엄청난 우연들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구조 자체이어야 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단풍을 들이민다. 단풍은 사랑의 색깔이다. 아픈 시간들, 4월의 바람과 뙤약볕의 여름을 지나고 나서야 얻은 핏빛의 색깔 – 당신은 저 아름다운 단풍을 시들 때까지(시들지 않는 단풍은 없다.) 지켜보겠는가, 가장 붉게 피었을 때 박제시키겠는가? 사랑은 소멸의 시효를 가지고 있다. 소녀(하루나)와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누쿠이)은 사고로 죽는다. 그 죽음은 소년을 계속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지속시켜 준다. 그는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단풍처럼 시들지 않을 것이다. 옛사랑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야쿠자 두목은 킬러의 총에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만을 안고 죽음에 다다른다. 최고의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것이 설사 핏빛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음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킨다. 탐미적 수사 혹은 사의 찬미라고 말하며 ‘이것도 사랑일 수 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감독은 찬물을 쏟아 붙는다. 소년이 자신의 사랑을 동결하며 흘린 핏 자국을 그것이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비누거품으로 쓱쓱 문질러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이돌 스타와, 옛 애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 사랑은 주관적 사유만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관계의 끈으로만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남기마련이다. 그들의 행복만큼 ‘딱 그만큼’의 고통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 사랑의 그림자는 고통으로 – 타자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남는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환희는 없다. 
빨간 끈으로 서로를 묶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츠모토가 사와코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장소, 그들의 추억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장소)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반과거’ 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이다(하루나를 위한 하모니카, 히로를 위한 도시락, 사와코를 위한 목걸이). 사랑의 정경은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처럼 뒤늦게야 만들어진다. 하지만 토스카의 아리아가 울려야 할 시간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구속도 없이 완전하다. 이 사랑은 어떻게 보존되거나 혹은 되돌릴 수 있을까. 그들은 처음으로 손을 맞잡으면서 사랑(사람)의 얼굴(표정)을 되찾는다. – 이것이야말로 기타노 다케시의 대답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달갑지 않은 사명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똑같은’ 생의 무게를 요구한다. 함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아파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그 온전한 사랑은 아무런 목적(표정)없이, 엮었던 관계의 끈이다. 그 끈은 누구도 남아서 더 고통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고통(육체)을 지고 죽음까지 즉시 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김영하 / 무협학생운동

김영하의 등단 작품은 누가 뭐래도 95년에 발표한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어설픈 시뮬라크르와 나르시시즘 그리고 반전을 적절하게 섞여 나온 퓨전 소설. (제목도 그런가? 김이소의 ‘거울 보는 여자’와 ‘칼에 대한 명상’을 싹둑 잘라서 붙여 논 듯한, 김이소 소설이 나중에 나왔을까? 웃자고 한 말이니 패스 ^^)
김영하의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 남진우를 대상으로 한 거 아니냐는 의혹을 남겼던『흡혈귀』? 일그러진 욕망과 판타지가 뒤덮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니면 김영하 스스로 최고로 꼽는 『검은 꽃』? 무엇이어도 좋다. ‘김영하의 소설엔 서사가 없어’라는 평은 『검은 꽃』으로 시들었고, 도시에서 자라서 어릴 적의 경험이나 입담이 부족하다는 소설쓰기의 핸디캡은 도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다. 작가 후기가 소설 전체를 반전시켜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썩 개운하진 않지만, 『아랑은 왜』를 떠올려 봐라.
스스로 김영하의 팬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의 소설 아닌 것도 찾아서 읽어보고 그의 궤적을 쫒고 있겠지. 나름대로 전작주의자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김영하의 첫 번째 소설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등단 작이 첫 소설일까? NO
꽤 오래전 절판 되었고, 김영하의 이름이 한층 부각되면서 다시 찍어내자고 했다지만, 본인이 크게 탐탁지 않았다던 소설이 있다. 『무협 학생운동/ 김영하 / 도서출판 아침 / 1992』
이게 뭐야 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말하자면 80년대 학생운동을 무협소설의 형식으로 극화한 것이다. 그도 가능 하겠다싶은 것이 당시에는 군부독재라는 악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선의 이분법이 들어맞았으니, 즉 적과 아군이 분명했으니 꽤나 재미난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공안부 짜바리들이 그랬단다. “이젠 x발 무협지 읽으면서 니들 잡으러 댕겨야 하냐?”.
73억 꼼쳐뒀다 발각된 전두환은 전두마왕으로 노태우는 노갈, 안기부는 안기마귀, 백골단은 백건단, 주사신공의 그 최고 일절 자주권… 등등 얼핏 보면 아주 흥미롭지만 더도덜도말고 여기까지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도저히 ‘그 김영하가 이 김영하 맞아?‘ 라는 생각을 떨 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김영하는 잘 쓰는 정말 재밌게 말하는 작가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이 소설은 김영하를 통시성안에서 보게 해준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힘들었을 일이 주르륵 멋대로 연상이 되니 말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쓰면 늘기 마련이다’의 최고의 예가 될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
김영하는 진행형일까? 어디로?『무협 학생운동』 작가 후기의 끄트머리를 가져온다.
“…… 그리고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한 때는 같은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하였으니 지금은 자신의 등 뒤에 깔린 쇠사슬을 끌며 최루탄 연기 가득한 하늘로 날아간 영원한 이름, 한열이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
발굴지 : 일산 / 집현전 (약도보기)
헌책방 팁 1
헌책방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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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무때(주방용) – 책 표지를 닦는 게 가장 탁월한 세제 중 하나이며 냄새가 역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세제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닦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동네 ‘무조건 천원 코너’에 가시면 안경 닦는 천 비스름한 거 살 수 있습니다. 안경 닦는 천보다 두껍고 크죠. 이 두 가지가 준비되면 대부분 책을 새책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물파스 – 책 표지에 볼펜이나 사인펜 자국을 지울 때 물파스를 한 번 바르고 닦습니다. 아주 말끔해지죠. 가려운 데나 벌레 물린 데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입니다.
도서관 인장이 찍힌 책
– 책 위에 아래에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도서관 인장이 찍혀 있는 책을 만나면 아찔하죠. 유한락스를 이용합니다. 초보자에게 약간의 무리가 있어서 처음에 할 때는 두 명이 함께 하는 게 좋습니다. 우선 물러터진 칫솔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마른 헝겊. 유한락스를 콜라 뚜껑만큼 콜라 뚜껑에 담은 다음, 동생이나 집에서 노는 사람 아무나 데리고 와서 책을 꽈악 누르라고 하면서 칫솔에 유한락스를 발라 한번 살짝 쓰으윽 칠해줍니다. 바로 마른 수건으로 유한락스를 닦아 냅니다. 아주 적은 양을 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책이 울어버릴 수 있습니다.
책 첫 장에 도서관 인장을 도저히 ‘못 참겠다‘하시면, 그 뒤에 안 쓰는 종이를 데고 유한락스로 살짝 문질러 주면 됩니다. 종이를 대는 이유는 뒷장이 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등에 스카치테이프 자국
책이 삐까뻔쩍하다가, 한 부분만 누렇게 뜬 경우가 있죠. 안은 한번 펴보지도 않아서 새 책인데, 겉에 그 누런 자국 때문에 이걸 살까 말까 망설이는 분을 위해서 특별한 세제를 소개합니다. 홈스타(욕실용)을 사용해서 닦아주면 그 누렇게 오래된 절대 지워질 것 같지 않은 때가 가십니다. 홈스타 같은 경우는 책 전반에 사용하는 것은 안 됩니다. 세제 자체에 돌가루 같은 게 있는지 책이 긁힐 수 있습니다. 여하튼 누런 부분만 살짝!
사포 – 흔히 빼빠라고 하죠. 잘 이용해야 합니다. 잘 못하면 책 전체가 뚱뚱해지고 보기 싫어지거든요. 두 가지를 준비합니다. 알이 고운 것과 중간 정도를 이용합니다. 책 위아래의 먼지를 털어 낼 때 쓰는 게 좋습니다. 글씨 지우려고 하다간 책이 망가지기 십상이니, 어지간하면 먼지 정도만 털어내는 데 이용하세요. 먼지가 10년쯤 묶은 외서 하드커버에 아주 적격입니다. 종이의 원래 색깔을 찾아 주죠. 한 30장 정도를 단위로 사포 질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한꺼번에 하면 책이 싫어하겠죠.
막강파워 절단기
누가 쓰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지만 가끔 실뜨기하듯 책을 깎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신집중하고 수양을 오래해야지 가능하죠. 책장에 묻은 오래된, 묶은 남모르는 자국, 누가 지거 아니랄까 봐, ‘94211-.. 어쩌고’하며 이름과 학번을 매직으로 써 놓은 책에 최고의 효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학교 앞 제본소 같은 곳에서 잘라달라고 하세요.
주의! – 대개의 책은 겉표지에 살짝 코팅이 됐습니다, 코팅이 안 된 책들도 있죠, 코팅 안 된 표지를 위의 세제를 썼다가는 아작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 있던데, 조심하시길. 코팅 안 된 책은 지우개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때를 끈질기게 지우개로 지워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죠.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
며칠 비가 추적거리는 게 몸이 한없이 늘어진다. 이런 날이면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다. 이따가 걷자며 곱살 진 마음을 달래는데 금세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앉는다. 한적한 길로만 여기던 곳도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번화가 못지않게 오가는 이들이 많아진다. 골목 끝을 돌자마자 헌책방이라는 녹색 간판이 섰다.
퍽 오래 전에는 버스를 타다 ‘헌책방’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면 무작정 내리곤 했다. 그렇게 들어선 곳은 먼지 쌓인 책들만 모로 즐비한 곳도 있는가 하면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들로 붐비는 곳도, 주인장은 책을 닦고 책 손 몇이 멀찍이 선 곳도 있었다.
이 녹색 간판의 책방은 어떨까 싶었다. 우산을 접어 문밖에 내려 둔다. 조금 빡빡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 냄새가 확 덮친다. 구석 백열등이 비추는 곳에 천장까지 빼곡히 누운 책들을 보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헌책방이 먼 데 있는 기억을 친다. 그때도 꼭 백열전구 아래 이런 냄새가 났다.
신촌 근방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사람들에게 치이는 곳보다 우산을 뱅뱅 돌려도 아무도 피해를 받지 않을 만큼 한산한 곳이 좋았다. 지금 홍대에서 신촌 방향의 길은 고작 서너 개 미술학원만 있을 뿐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 길 한쪽께 작은 헌책방이 있었고 학교가 파하면 늘 들르는 곳이었다.
한창 입시로 바쁠 때도 친구와 책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지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책을 뒤적이곤 했다. 세로로 쓰인 글을 따라가며 모르는 한자를 서로 묻고, 큰 소리로 떠들다 핀잔을 듣기도 했다. 책방 아저씨가 문을 닫는다고 말해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 읽은 책에 대해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통에 이바구가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해지나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파트너와 주로 ‘헌책방’에서 만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낡은 책 냄새는 상대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줬고, 좁은 공간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상대의 말을 터치해 가면서 잘 이어갈 줄 몰랐고, 어느 즘에 찾아온 정적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상대가 무슨 말이든 하길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런 내가 끊이지 않게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책’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읽은 책들 중 밑줄 그었던 부분을 기억해 책을 고르고 상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나만큼 그도 기뻐하고 그만큼의 감동으로 벅찰 것이라고 혼자만 믿곤 했다. 아주 나중에 그는 헌책방에서 만나는 게 달갑지 않으며, 책보다 하다못해 천 원짜리 핀이 더 감동적이라고 전했다.
헌책방을 순례하듯 다니던 시절, 인천의 한 헌책방의 주인장이 ‘헌책방이 뭐 같아요?’라고 물었다. 자주 들락거리며 낯이 익자 건 낸 말이지만 좀처럼 가늠할 수 없기도 했다. ‘멀리서 오는 거죠?’라고 되묻고는 ‘헌책방은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무대기 책을 산 날이면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책을 걸레로 닦고는 침대 옆에 두고 표지부터 찬찬히 살핀다. 저자 서문만 읽고 자자며 몇 장 들추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날을 지새운 날도 밤이 짧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낡은 책 한 귀퉁이에 이전 주인의 부스러질 것 같은 메모에 밑줄을 보탠 날은 그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 모든 ‘우연’이 주는 갈래를 헤매는 건, 흡사 시작과 끝이 닿아 끝나지 않는 산책과 같았다. 그 몽상의 시간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숨소리만 가빴을 것이다. 책 읽기가 뭔가 대단한 것을 머리에 꾸역꾸역 넣자는 게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허기진 마음이 채워지는 거지 싶었다.
출판사 – 컬리지언총서를펴내면서
헌책방에서 만난 출판사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까. 아직 동네서점 한 귀퉁이나 인터넷, 대형서점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출판사부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재미난 출판사까지. 책을 읽는 이들 나름대로 자신에게 특별한 출판사가 있을 텐데, 책의 내용을 떠나서 출판사가 책 구석에 슬쩍 적어놓은 글만으로도 정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걸 찾아 읽는 맛도 쏠쏠하다.
[새와물고기]는 헌책방의 끝간데없는 베스트셀러일 것이다. 물론 시집이나, 유머집 같은 다소 엉뚱한 걸 낸 적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 선이다. 보네거트와 코진스키, 마가랫 애트우드를 만날 수 있는 출판사였으니 말이다.
보네거트의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봐』의 첫 장 “새와 물고기는 힘들면 다시 보이는 요지경입니다”를 시작으로, 『고양이 요람』에서는 “새와 물고기는 전자파의 세상에 생긴 아주 작은 대피소입니다”, 『죽음과 추는 억지춤 또는 어린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서는 “새와 물고기는 둥근 것, 굽은 것, 물렁물렁한 것입니다”라는 짧은 글귀 들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풀린다.
코진스키의 『거꾸로 선 나무 – The Devil Tree』의 “새와물고기는 가장 처음에 있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입니다.”와 『눈먼 데이트』에서 “새와물고기는 세계로 향한 독자의 창입니다”는 조금 식상한 감이 있지만, 마가랫 애트우드의 『케잌을 굽는 여자 – The Edible woman』는 그 진부함을 뒤엎기에 충분하다. 갓 구워낸 케이크가 풍기는 신선함. “새와물고기는 이 세상에서 없어진 새들과 물고기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새와물고기]에 심심한 조의를 표할 따름이다. 참고로 보네거트는 모조리 절판되는 불운을 딛고 얼마 전부터 ‘금문’에서 새로운 역자를 만나 재출간 되고 있다. 나로선 좋은 소설이니 환영이지만 왜 그렇게 비싼 건지. : (
[프로젝트 409]출판사는 장석남의 『별의 감옥』이라는 시선을 낸 적이 있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 수록된 시와 별 차이는 없지만, 특이한 것은 매 페이지 요코(Yoko)의 삽화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빨간색 양장의 표지에 별의 감옥이라고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이 여간 촌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장석남의 시는 표지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반역이다. 의아한 것은 발행인이 이광호인 것인데(언제 출판까지 손을 뻗쳤단 말인가? 물론 더는 없으니 망한 거겠지? 😐 ), 그보다 더 재미난 것은 책의 맨 마지막의 카피다. “개와 JAZZ를 사랑하는, 휴머니즘과 프로페셔널을 추구하는 그룹-409!” 엽기 내지는 컬트랄 밖에.
[동문선]‘ 성종 때, 서거정이 편찬한 명문 선집(選集)’이라는 생각보다, ‘내 취향에 ‘딱’인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출판사‘라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혹자는 출판사 이름을 불문선으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농을 던지기도 하는데 여하튼 양서를 끊이지 않고 찍어내는 출판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문선이 가진 판권의 화려함과는 정반대로 번역의 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처음엔 짜증스럽던 것이 이제는 무서워지려고 한다. 과연 편집자가 있기는 있는 것인지.
오래전 동문선의 책을 샀을 때, 그 안에 덤으로 들어 있던 도서목록 같은 게 있었다. 책과 출판문화에 대한 여러 얘기가 있었는데, 그중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백과사전을 찢자’는 글귀였다. 대강의 요지가 찬장에 백과사전 꽂아두지 말고, 유용하게 쓰자는 말이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은 아직도 선명하다. “때 묻고 찢어지고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백과사전 한 번 구경해 봤으면 좋겠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바라 건데 처음의 반만이라도 닮아라. 책값도 따라서 닮으면 좋고 : )
[까치], 방안의 책장을 쭈욱 둘러보면 여기저기 분야별로 몇 권씩 꽂혀있다. 가장 이쁜 장정을 한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 2, 3』2쇄 이다. 1권은 노란색, 2권은 밝은 갈색, 3권은 파란색. 1쇄 때의 그 밋밋한 하얀색 표지에 색을 입히니 책꽂이에서 유달리 빛난다. 누가 까치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까치도 이제는 시류(?)를 쫓아 『아르센 뤼팽』 전집 이후에는 표지가 알록달록해지고 있지만. [새물결]의 출판사 카피가 “長江의 앞 물결이 뒷물결을 밀어낸다”라면 모든 [까치]책에 그들만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는 카피! “값/뒤표지에 쓰여 있음”
[이후]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게다. 헌책방보다는 큰 대형서점에 더 많이 꽂혀있는, 그보다는 학교 앞 작은 사회과학 서점 한 칸이 더 잘 어울리는 책들. 99년 여름이었나 보다 [공덕동/굴다리서점]에서 『신좌파의 상상력』을 샀다. 다 읽어낼 자신이 퍼뜩 들지 않았음에도 몇 장을 넘기다 책을 덮고 큰 숨을 들이쉰 것은 “컬리지언 총서를 펴내면서”라는 짧은 글을 읽으면서였다. 기형도의 ‘대학시절’로 시작되고 있었다. (내 군대 이등병 시절, 화장실벽 틈에 숨겨두고 틈틈이 보던 게 기형도의 수화였다.)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 그러다 난데없이 다른 시가 머리를 쳤다. (그 이등병 시절, 막 울음이 났던)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그러다가 [이후]의 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청년입니까? 들어본 지 오래된 말이라구요. 저도 불러본 지 오랜만입니다. 저희는 당신을 앞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쑥스럽다구요? 아닙니다….” 나는 듣고 싶었다.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해도 듣고 싶었고, 그날로 책을 다 읽어냈다.
한 권의 책을 통틀은 것보다 단 몇 줄로 더 큰 공명이 일 때가 있다. 이후가 이후에도 나날이 번창하기를 !
to be continued
2000-02-02 05:38:43 posted by antim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