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never will giv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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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다급한 전화가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인천공항 보호소로 넘어갔고 곧 출국 당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주노조가 그의 단식 보도 자료를 프레시안에 냈을 때, 법무부에서 즉각적으로 그런 일이 없다고 대응한 뒤 바로 일어난 일이었다. 인천보호소로 몇몇 동지들이 확인을 했지만 출국했다는 답변만을 들은 게 다였다. 오늘이 돼야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공감의 변호사들과 이주인권연대, 설동훈 교수 등등으로 이뤄진 ‘보호소 인권 실태 조사팀’이 내놓은 보호소 내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전국의 모든 보호소가 어쩜 하나같이 불결하고 좁고, 운동을 할 수 없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그런 상황은 출입국 직원들의 태도에 고스란히 전이돼있다. 다시 얘기하지만 인천보호소에 있는 여성들의 경우 3개월 넘게 생리대를 지급받지 못했던 사실, 여성 보호자들에게는 여성 직원이 붙어야 한다는 출입국의 그 마저의 규정마저 무시한 채 여성 직원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단 한 번도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다는 사실, 출입국 공무원들과 공익들의 반말과 막말, 면회시간을 지들 멋대로 조정하는 것 등등, 이것들은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보호소 내의 인권 실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것에 대항에 크리스티앙은 단식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오늘 크리스티앙의 글이 이주노조 게시판과 그의 블로그에 올랐다. 그는 독일로 돌아갔고, 모든 것을 남겨둔 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방당했다. 그간의 정황을 설명했고, 투쟁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한 명이 추방당하면 10명이 그 투쟁을 이을 테고, 더 많은 동지들이 그의 싸움을 맞잡고 갈 것이다. 여기서도 그곳에서도 어디에서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Christian! Niemals Aufg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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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28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신촌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서, 풍경처럼만 자리한다. 조리개 값 1.2, 중앙에 초점을 맞춘 사진에서 맨 구석 희미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반 친구들에게 어쩌다 하고 싶은 말들은 혀끝을 맴돌다 이내 수그러든다. 말이 적은 편이었냐고? 말은 끊이질 않는다. 다만 소리가 되지 않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명동에서 어렵게 더빙해온 일본 판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국어 선생이 신촌 한 여관에 술이 떡이 되어 들어가는 모습도.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혼자서만 앙잘거릴 뿐이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모든 게 안 해도 될 말이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졸업을 한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었다. 그냥 수다를 떨고 싶었다. 필요 없는 말이면 어떠냐고, 그 말에서 다른 마음이 생길 줄 아느냐고, 그렇게 마음이 생기면 또 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어가고 싶었다.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고 어디선가 들려오곤 했다. ‘응, 중요하지 않아’ 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쓸데없다고 믿었던 말들은 성대를 울리지 못했고, 말들이 잊혀 졌고, 기억이 잊히고, 마음을 잃었다.
김종삼김민정의 시를 번갈아 읽는다. 김종삼의 시는 소리가 없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았지만, 피아노 반주도 변사도 없는 무성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래도 말은 그림이 된다. 김민정의 시는 끊임없이 조잘대는 말들이 좀처럼 여백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수다는 북적이는 선술집의 성가신 소음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에 무게를 두고 반짝이고 있다. 뻥긋하는 금붕어라니, 천만에 ‘반짝거리는 수다’이다. 이런 수다!
좀처럼 우아하지 않게 그러면서 말하기 거북했던 것들을, 쓸데없다고 믿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토해내고 있다. 옆자리의 통화를 엿듣는 모양새로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아니꼽살스럽다는 듯이, 말들은 확성기를 들이댄 야채장수처럼 소리 지르고 있다. 그의 말들은 가볍지만, 그로 상상력은 경계를 넘어 나긋하다. 겨울 햇살이 일요일 오전을 비추듯이, 손을 뻗으면 눈이 부셔 살짝 찡그리는 나긋함.
거기에서는 언어가 시를 통해서 새롭게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일상의 언어들의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비로소 나부대던 궁상들도 세계의 중심이 되고 더 이상 주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수다는 말로, 말은 마음으로 간다. 그렇게 엮여도 시가 되는 걸 알았다. 17년 전에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을 게다. “국어 선생이 말이지, 술이 떡이 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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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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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개인적으로 풍족한 달이었으나 관계를 두고는 판달랐다. 마음은 쉬이 가시질 않고 앙잘거리고만 있다.
적어두지 않으면 죄다 잊어버릴 것 같아서 언제고 시간이 되면 길게 늘여야지라고 쓴다.
3. 판타스틱 아시아 / 미친년 프로젝트
8. 끔찍하게 정상적인
13.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21. 인 디스 월드
30. 점거하라
31. 친절한 금자씨
하나하나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중립 – 롤랑 바르트
타이거 타이거 – 알프레드 베스터
여로의 끝 – 존 바쓰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 마종기
이다의 허접질
나는 전설이다 – 리처드 매드슨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 김민정
스키즈 매트릭스 – 브루스 스털링
로캐넌의 세계 / 유배 행성/ 환영의 도시 – 어쉴러 k 르 귄
연 – 로맹가리
비잔티움의 첩자 – 해리 터틀도브
텍사코 – 파트릭 샤마와조
피서를 겸해서 대부분 신간 sf를 주로 읽었고 그간 사놓고 쌓아두기만 했던 몇 권을 들추게 됐다. ‘텍사코’나 ‘여로의 끝’을 꽂아만 뒀더라면 지옥에서 만세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구 설레고 있는 것은 오늘 손에 잡은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바렌찐 라스뿌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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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니 힐』 그리고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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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판타스틱 아시아」전을 보면서 김인규 씨 얘기를 들었다. 나를 가이드 해주던 분이 친한 사이라며 혹 아느냐고 물었을 때, 몇 년 전에 누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던 교사정도로 기억했다. 실은 더 기억할 게 없기도 했다. 오늘 신문을 보니 대법원(주심 박재윤 대법관)에서 음란물 게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일부 유죄를 받아들여 고법으로 파기환송 했다.
존 클레랜드의 『패니 힐』은 1748년에 쓰였다. 클레랜드는 봄베이(뭄바이)의 동인도 회사에서 실직당한 후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몹시 궁색하여 여기저기서 돈을 빌어 쓰고, 결국에는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히고 만다. 감옥에 있을 때 한 출판사로부터 호색 소설을 쓰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쓴 것이 『패니 힐』이다. 서간체 형식의 『패니 힐』은 첫 번째 편지와 두 번째 편지가 각각 1748년과 1749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된다. 『패니 힐』은 간행되자마자 계속되는 매진과 함께 엄청난 호평을 받았지만 영국의회로부터 음란도서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 재판에서 재판장 존 알 크란빌이 내린 판결은 클레랜드에게 100파운드의 종신연금을 하사한다는 것이었다. 100파운드라면 아주 많은 돈은 아니지만 충분히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였다. 판결의 이유는 이 정도의 재능이 있다면 가난을 이유로 음란한 소설을 쓰지 말고 고상한 쪽에 활용하라는 배려에서였다.
곳곳이 삭제된 채로 판을 거듭해서 출판되곤 했던 『패니 힐』은 1963년 정식으로 발행이 허가된다. 당시에도 이런저런 재판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1963년 7월 뉴욕 주 최고 재판소 심의이다. 뉴욕의 순회 재판소에서는 『패니 힐』에 대해 “인간의 그 어떤 신체부분도 외설적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려 해금을 선고했다.
김인규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기준은 95년 마광수 『즐거운 사라』에 대한 판례와 알리시아 스테임베르그의 『아마티스타/열음사』가 기준이 됐고 적용한 법은 전기통신기본법위반이다.
“제48조의 2 (벌칙)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하여 음란한 부호·문언·음향 또는 영상을 반포·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전기통신기본법위반이라고 하면 01년 얼뻥한 검사가 영장청구에서 써먹었던 것에서 한 발도 못나간 것이다. 당시 검사는 “공공장소에서의 성기노출은 당연히 음란한 행위”라는 대법원 판례를 들며 “인터넷은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불특정 다수인이 접속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며 어떤 행위가 인터넷에서 이루어졌다면 이는 공공장소에서 “직접” 동일한 행위를 한 것과 동등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영장에 썼었다. 이 지지리 한 영장에서는 모든 콘텍스트가 사라지고 없다. 거기에는 미술도 창작도 없다. 창작자의 표현과 내용은 간데없고 오직 성기와 음란만이 있을 뿐이다.
나가봐야 해서 대강 마무리한다만, 이라크 전쟁을 생중계하던 것보다 100만 배는 건전하겠다.
[정부의 인터넷 내용규제와 표현의 자유, 무엇이 문제인가]를 다운 받아 읽어보면 2001년 김인규 사건의 경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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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아르 면회

24

이상훈, 혹시, b님과 함께 아노아르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5월 말(24일?)에 면회를 다녀오고는 처음인데 많이 야위었네요. 그간에 눈병으로 고생이 심했답니다. 지내는 건 워낙 출입국과 많이 싸워서 이제는 아노아르 사정을 어느 정도 봐준다고 하네요. 주변의 다른 이주분들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노아르에게 얘기해서 무슨 해결사처럼 됐더군요. 지금은 중국인들과 같이 있어서 퍽 답답하다고 합니다. 방안에 몇 사람이 있는데, 서해 EEZ에서 고기를 잡다가 잡혀온 중국인 어부들이라고 합니다. 그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너무 떠들어서 잘 못 쉰다고 하네요. 보호소 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나라끼리 한 방에 있다고 합니다. 아노아르도 방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더니, 따로 독방을 줄까 묻더랍니다. 심심해서 싫다고 했데요. 말이 안통해도 몸짓으로 할 만큼은 소통을 한다고, 그게 그래도 혼자 있는 것 보다는 낫다고 하더군요. 🙂 아노아르가 청주 보호소에서 지낸지 벌써 2달이 넘었는데,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제스처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뭐랄까 국가인권위에서 보호해제 권고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렇게 될 경우 과연 법무부에서 받아들일지 미지수 입니다.
현재 인권위에서 몇몇 단체를 통해 보호소의 인권실태를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주인권연대, 아름다운 재단 변호사들, 설동훈 교수 등등으로 꾸려졌는데, 단속 할 때의 위법사항이라던가 보호소 내에서의 처우, 보호소 안에서 통역 문제 등등에 대해서 세세하게 조사하고 있는 듯합니다. 크리스티안 같은 경우 화성보호소에서 목동으로 다시 온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현재 목동은 실태조사가 끝났는데 화성은 아직 안했답니다. 그 보호소에서 뭔가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들을 빼돌렸다는 얘기지요. 크리스티안이 화성에 남아있으면 보호소 실태나 단속 과정에 대해서 출입국을 여러모로 귀찮게 할 여지가 다분한데 이를 미연에 방지했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것들. 동행한 분 중에 조사에 직접 참여하고 계신분이 있는데 조만간 자료가 나올 거라고 합니다. 그 와중에 인천 출입국에 대해서 들었는데, 짜증이 확 치밀더군요. 인천에 감호된 이주분들 중에서 3분의 1이 여성입니다. 법무부 규정상 여성 감호자들에게는 여성 직원들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인천 출입국에는 법무부 직원 중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조사하러 나갔을 때, 이주여성들이 조사자들 중 여성분들을 붙잡고 엉엉 울더랍니다. 들어보니, 지금까지 생리대는 지급받은 적이 한 번도 없고, 샤워 실은 남녀 공용이고, 윽박지르는 것 때문에 뭔가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사 자료가 나오면 얼마나 황당한 경우를 견디고 분노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청주의 경우도 방마다 cctv가 설치 됐다고 하는군요. 보호소 내의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이주 분들에게는 단 한 벌의 옷만 지급 됐을 뿐인데, cctv로 한 사무실에서 모든 방을 감시하는 것부터 화장실의 문 높이가 반 밖에 안 되는 것 등등 불편함과 수치심에 대한 얘기를 하더군요. 어서 조사 결과가 나오고 이런저런 문제점에 대해 인권위의 권고가 반영돼서 비인간적인 단속과 연행, 보호소 내의 처우가 바뀌길 바랍니다.
늦었지만 오늘 2시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권 보장에 대한 결의대회가 있습니다. 비가 안 온다면 작은대안무역은 부스를 차리고 함께 할 계획입니다. 많이 응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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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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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크리스티안 면회를 다녀왔다, 마침 생일이라는데, 보호소에서 생일이라니, 축하는 듬뿍 해줬다.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뭐랄까 보호소에 있으면서 얼굴이 그리 좋아진 사람은 처음이다. 술로 가슴츠레하던 눈은 광채가 나고, 가슬가슬하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게 그간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다. 안 될 말이지만, 그 안에서 오래오래 투쟁해도 되겠더라. 크리스티안은 화성보호소로 갔다가 다시 목동출입국으로 오게 됐는데, 아주 특별한 경우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른단다. 아마도 마붑이 국가인권위에 낸 진정서 때문인 듯싶다. 진정서가 먹혔다기보다는 인권위에서 조사차 몇 번이고 다녀가야 할 텐데 지들 편하자고 그랬을 거란 추측이다. 대화 중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었는데, 거참, 출입국이 단속하는데 용역을 쓰는 거야 오래전부터 그랬다지만 학생들을 쓴다는 거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쓴다고 하더라. 하기야 지난 4월엔 군포에서 잡힌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단속에 협조하면 풀어준다고 해서 그의 동료 18명이 잡힌 사건이 있었다. 출입국이 뭔 짓이든 못할까.
수업받는 학생과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봤다. 용산 cgv에서 봤는데, 영화 시작도 예정보다 5분 정도 늦더니 한 1분 정도는 화면이 안 나오는 것이다. 결국, 왜 그들이 만나게 됐는지는 모른다. 영화는 부부싸움에 대한 얘기이다. 그렇게 싸우면 정들까? 별로 재밌게 보다가 끝에서 식상해버린 바람에 앞에 1분을 핑계로 환불받았다. 실은 매니저가 그 1분에 대한 사과를 당연히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사람들은 휙휙 나가는데 별말을 안 하는 게다. 가서 얘기했더니, 너무나 친절하게 고객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주겠다기에, 그럼 환불받겠다고 했다. 계속 생각했던 수위를 넘어서 미안해하는데 어찌나 나도 미안하던지. 고객님의 환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환불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심기 정도는 환불받으면 좋아지는 딱 그 정도다. 실제로 환불받으니까 좋아지던걸. 그나저나 브래드 피트는 어쩜 더 이뻐졌니.
월급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왔다, 어라 하고 좋은 게 아니라 이거 잘 못 된 거 아닐까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을까 그냥 확 다 써버리고 몰라라 할까 몇 초 심각하다가 전화를 해 봤다. 연차수당이 나왔단다. 얼쑤
금연한 지 어언 1개월하고 반이 지났다. 자전거를 못 타는 날은 달리기를 하고 있고 꽤 오래 멈추지 않고 달린다. 몸이 좋아진 게다. 하루 두 갑 이상의 담배를 펴댔는데, 한 달에 12만 원꼴이 나갔다. 자전거 할부금을 내고도 얼마가 남아서 여기랑 저기 후원금을 늘렸다. 저기서 갑자기 후원금을 올린 이유를 묻는데, 금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담배를 피우면 내리게 될 거라는 말은 차마. 여하튼 내년 2월까지는 안 피운다. 그리고 매닉! 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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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카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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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6일 고려대에서 라디카 동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염없이 게을러서(바쁘기도;;;) 이제야 녹취를 풀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서 올립니다. 389일간의 농성이 있었으나, 농성 해단식이후 농성투쟁단이나 이주지부(현 이주노조) 여타의 연대단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막 끝났을 즈음엔 연대단위로써 평가 같은 것을 쓰려고 준비를 하다가, 그보다는 이주 분들의 목소리로 농성에 대해서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라디카 외에 몇 몇 이주동지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냥 목소리만 잘 저장해 두고 있답니다. 😉 그 중 하나를 풀어 올립니다. 편의상 말이 짧습니다.
부깽 : 이주노동자는 남한사회에서 약자이다. 그 앞에 여성이 붙었을 때 이주여성이라고 했을 때, 일상이나 투쟁 중에 더 큰 불편이나 차별은 없었나.
라디카 : 농성 할 때 처음엔 같이 싸우러 왔는데 여성, 남성 느낌이 없었다. 농성하면서부터는 쪼끔 느낌이 있었다. 어디 갈 때나, 집에 갈 때나. 회의 할 때, 세 명이 있었는데 소하나, 링링.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남성들과 한국 사람들만 회의를 했다. 처음엔 그랬다. 우리한테는 한 번도 안 물어보고, 그래서 맘이 많이 다쳤다. 우리도 싸우러 왔다. 그러다 한 달 가까이 소하나하고 우리끼리 얘기했다.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우리는 당신들한테 말도 못하고 그런 얘기를 한 뒤 조금 바뀌었다.
부깽 : 투쟁 현장이라지만 여성과 남성의 독립된 공간이 없었다.
라디카 : 처음엔 우리가 들어갈 때 여성자리 나성자리 구분이 없고 같이 있었다. 그 땐 남자친구 있어서 3번 텐트에 같이 있었고, 링링도 남편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소하나는 링링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힘들었다. 불편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생활했다. 우리가 여러번 말했다. 우리는 여성이니까 우리 자리 따로 만들어야 돼. 그때 문제도 많이 생겼다. 잠 잘 때도. 그때는 머리 아프고 정신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중에는 4번 텐트는 여자텐트가 됐다.
부깽: 4번 텐트를 여성들이 이용하게 된 게 농성 반년이 훨씬 지나서다. 두 달 쯤 지나서 얘기했을 때 한국 활동가나 같이 농성하던 사람들의 배려는 없었나?
라디카 : 우리가 텐트별로 밤에는 회의를 했다. 그때 우리가 얘기했다. 제가 3번 텐트 네팔공동체에, 소하나 링링이 4번에서는 얘기를 하고. 그렇게 하다가 그 얘기가 상황실회의에서 얘기하고 그랬다.
부깽: 그 얘기 후에 바로 됐나?
라디카: 아니다. 그 안에서도 얘기가 많았다. ‘여기 투쟁하러 온 건데 여성 남성이 뭐가 중요하냐’ 그런 얘기가 많았다. 투쟁하는 것은 맞지만 여성들 우리 3명하고 한국 여성들도 같이 있잖아. 다 합쳐서 하면 괜찮을 텐데, 그때는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내가 얘기 하다가하다가 3개월 더 지나서 4번 텐트 여성이 이용하게 됐다.
부깽: 농성 초반에 단식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라디카: 처음 단식을 시작할 때 우리는 민주노총도 다 알고 하는 줄 알았는데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단식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민주노총에 가서 얘기하는데 그때 그분들(민주노총)이 ‘우리는 몰랐다 상황실이 우리에게 안 알려줬다. 그래서 몰랐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었다. 단식 시작 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왜 했냐? 단식하는 이유가 뭐냐?’ 단식하는 이유가 뭔지 선전을 하고 여러 단체에 알려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여러 단위에 알리지 않았고, 그거 알려줘야지 사람들이 관심가지고 연대했을 텐데.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금 그랬다.
부깽: 단식 이후에 몸은 어떤가?
라디카: 단식 있을 때 여기 골반부분이 이상하게 아팠다. 단식 시작하기 이주일 전부터 아팠다. 단식해서 약 먹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약 안 먹고 30일까지 단식하고, 한 달 동안 단식하고, 단식 끝나고 일주일 있다가 너무 많이 아파서 약 먹었다. 단식 할 때는 너무 아파도 참았다. 동지들 석방 할라고 약도 안 먹고 그냥 했는데. 근데 딱 끝나고 너무 힘들고 아파서 예전에 그때 의사가 준 약을 먹었다. 그때는 너무 늦었다. 단식 끝나고 안양에 가서 병원에 다니고 집에 왔는데 많이 아팠다. 한 달 넘어서 병원에 갔다. 여기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도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아프고, 내가 혼자 스스로 했다. 병원에 다니는 거,
부깽: 단식 2주 때 몸이 아프다는 것을 농성장에 알리지 않았나.
라디카: 텐트에 얘기 했다. 그때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근데 그 때는 내가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부깽: 단식 중단하라는 말은 안했나?
라디카: 그 말을 했다. 자주했다. 근데 아무 이유 없이 단식 풀어라 그런 얘기 많이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목적이 있는데 아무 결과 없이 어떻게 단식을 그만 두냐며 상황실장과 많이 싸웠다.
부깽: 처음에 단식 시작했을 때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말을 안했다 알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걸 단식하는 동지들이 알게 된 게 얼마나 지나서였나?
라디카: 아마 15일 넘어서 인거 같다. 보름이 지나서 민주노총에 갔었는데 말을 안 해서 우리가 단식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하는 말이 “너희들 언제부터 하는지 몰랐다. 안 말해줘서 몰랐다.”
부깽: 단식 날짜가 며칠이었나? 기간?
라디카: 2월 17일부터 3월18일까지 30일 가까이 했다.
부깽: 단식을 푸는 과정에서 식사는 어땠나?
라디카: 따로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농성장에서 식당에 나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돈 아까워서 어떻게 밖에 나가서 먹나, 나는 단식 풀고 안양 이주여성 센터에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치료 받았다. 시실라 언니가 많이 도와주고 그 뒤에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알아서 돈 달라고 해서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부깽: 농성장에서 따로 챙기지는 않았나?
라디카: 말을 했는데, 해준다고 했는데, 하루 이틀 정도만 챙기고 이후엔 안했다. 우리도 무서웠다. 단식이 처음이고 어떻게 식단을 챙겨야 하는지 몰랐다. 돈이 아까워서 농성장에 돈이 없어서 하루에 두 번 세 번 (챙겨) 먹어야 하는데, 돈 문제로 바깥에 나가서 먹을 수 없었다. 다른 동지들한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깽: 실은 이때 농성장에서 단식하셨던 분들이 편의점에서 혼자 죽 사먹는 걸 계속 봤다.
라디카: 농성장에 돈이 없었다. 우리가 미안해서 돈 달라는 소리도 못했다. 그래서 혼자 해결했다. 거기서 알아서 했어야 하는데, 우리도 말을 하다가 말았다.
부깽: 치료는 어떻게 했나?
라디카: 농성장에 있을 때는 의사들이 자주 와서 병원도 데려가고 그랬다, 그리고 몸에 병 있다고 약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단식하고 있어서 약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단식 끝나고 이후에 두 달 있다가 더 아팠다. 계속 참았다. 단식 풀고 일주일 있다가 약 먹었다. 먹을 때는 안 아프고, 그 담에는 조그만 염증이 생겼는데 그 뒤에 커져서 많이 아팠다.
부깽: 단식에 대해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라디카: 단식 끝나가지고 농성장에서, 솔직히 얘기하면은, 우리 단식했던 사람들 생각은 우리 병원에 데려가서 건강검진을 받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안했다. 상황실에서 준비한 게 아니라 연대단위에서 와서 텐트 안에서 (건강검진을) 한 게 다였다. 상황실에서는 여기서 하니깐 신경 쓴 것 같지는 않다. 거기서(상황실)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나하고 단식했던 사람들 화가 많이 나고 너무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때부터는 농성에 대한 희망이 많이 줄었다. 농성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단식 때 염증이 커져서 이렇게 된 거다. 지금까지 약을 먹고 있다. 일은 계속 못 하고 있다. 약은 3개월 정도 더 먹으면 된다. (라디카는 지금도 여전히 일주일에 3번씩 병원에 가고 있다.)
부깽: 농성장 내에서 갈등이 있었나? 사안에 대한 결정들이나 그 결정과정에 대해 이주동지들의 참여 문제를 들어보고 싶다. 다시 농성을 한다면 꼭 이건 준비하고서 하자고 생각한 거나, 이건 미흡했다고 생각한 게 있나?
라디카: 그때 우리는 농성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냥 ‘우리 권리 때문에 싸워야 돼’라고만 생각했고, ‘한 달 정도만 싸우겠지’라고 생각했다. ‘한 달 까지는 싸울 거야’ 그러면 우리 문제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농성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싶다. 여성동지들이 너무 힘들었다. 여성 남성 따로 독립된 공간이 있을 거라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소하나에게 농성에 함께 참여하자고 말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링링도 참여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농성을 다시 한다면 여성 공간을 따로 만들고 시작해야한다. 그걸로 많이 싸웠다. 소하나는 특히 많이 싸웠다. 혼자 힘들게 싸웠다. 나와 링링씨는 애인이 있었는데 소하나는 혼자였다. 소하나는 너무 힘들었다. 다시 농성을 하면은 이주노동자 말이 우선 됐으면 좋겠다. 지난 농성처럼 한국 활동가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가 돼야 한다.
부깽: 해단식 이후에 농성장을 떠나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때 어려운 점이 있었나?
라디카: 나도 다른 동지들처럼 방세 줄 돈도 없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도 못하고 너무 어려운 상태였다. 어려운데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래서 액세서리 만들어서 학생들이나 친구들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살았다. 나는 그렇게 했지만 나보다도 같이 농성했던 다른 동지들이 방도 없이 갈데없이 더 힘들었다.
부깽: 이런 생계 문제로 민주노총이나 상황실에 건의 하지는 않았나.
라디카: 얘기가 나왔지만 나는 너무 열받아서 회의에 가지 않았다. 방도 없고 갈 데도 없는데 어떻게 해주세요. 이런저런 요구를 했는데 안 해줬다.
부깽: 제작년부터 작년까지 1년 넘게 농성투쟁을 했다. 다시 이렇게 하라면 할 수 있겠나?
라디카: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 농성할 때 부족한 것들 이주노동자들이 몰랐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많이 배웠다. 이 배운 것들로 새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깽: 농성투쟁 이전에도 투쟁 경험이 있나?
라디카: 아니 처음이다. 농성 시작할 쯤 집에 가려고 했었다. 단속이 너무 심해서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회의가 있었는데, 샤말타파를 만났다. 샤말타파의 말을 듣고, 회의에서 나온 얘기를 듣고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깽: 별 얘기 안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다음엔 진짜 맛있는 커피를 사겠다.
라디카 : 기대하겠다.
——————
고려대 근방에 아는 데라곤 보헤미안 하나였는데, 문이 닫힌 바람에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곳을 찾아 30여분을 헤매다 결국 다시 고대과학도서관(?)으로 돌아가서 자판기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눴다. 이후에도 라디카 동지를 여러 번 만났지만 아직까지 맛난 커피를 대접하진 못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녹취를 풀면서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라디카는 단식 얘기를 하면서 내내 울었다. 4명의 동지들이 단식투쟁을 했었는데, 라디카 외에 마숨과 단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까지만동지는 단식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대신했다.
한참 지난 뒷얘기 – 라니카는 그간 잠시 일을 했지만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지금은 피자매연대에 달거리대를 만들어 파는 것과, 비즈공예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가는데, 지금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는 상황이다. 가장 치열한 투쟁은 아주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것들,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들과 싸우게 된다. 우리의 구호와 연대는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또한 우리들의 사적 영역을 바꾸자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들, 사적 영역이 모인 것들, 그게 바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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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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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안녕하세요, 오늘! 토요일 홍대 아우라에서 작은 대안무역이 열립니다. 어제 자히드 가족과 마을공동체에서 옷을 보냈는데, 이번엔 큰 사이즈의 옷도 많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옷들 중 최고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오늘 아우라에서 새로운 예쁜 옷들과 액세서리- 카드, 팔찌, 목걸이, 귀걸이, 배지 등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엔 없지만 나시와 반팔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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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에 자수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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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를 놓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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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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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히드
그리고 지난 반전집회 때부터 네팔 라디카 동지의 비즈공예품을 함께 판매하고 있어요. 라디카 동지는 작년 농성 중에 30일간의 단식으로 지금까지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지속적으로 못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집에서 비즈공예품을 만들어 그 수익금으로 병원비와 생계유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라디카,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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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여성행진 때 라디카 동지
홍대 아우라 – 산울림 소극장 맞은편
Party Benefit & Jam (four!)
cover charge / 입장료 10,000 won
2005.7.9 / Saturday July 9, 2005 8 PM – 11:30 PM
{performing live}
PAUNA (modern rock)
Elephant 808 (electronica driven folk)
ANOKHA (high energy rock beat fusion)
Stop Crackdown (rock)_이주노동자밴드
일요일 평택평화행진 때 비가 오면 작은 대안무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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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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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린다. 희미하게 가로등만이 멀찍이 섰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길을 덮었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온통 습한 비린내가 폐를 진동한다. 숨이 급하게 가빠오고 팔이 올라가질 않는다. 간혹 지나는 이들의 눈빛이 성가셔도 멈추지 않는다. 조금만조금만 하면서 예까지 왔다.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정수리부터 송글거리던 땀이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다. 그것이 이마를 따라 눈에 고였을 때 눈물이 났다. 그렇게 아픈 날들은 아무리 쥐어짜도 안 나오던 것이 고작 땀 한 방울을 못 이기는 게 괜히 억울했다. 이참에 막 울어볼까 싶어서 멈춰 선다. 어두웠고, 여기는 지나는 이들도 없고, 한참 멀리 낚시꾼들만 졸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만히 섰는데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 울음으로 강물이 흔들리고 먼데서 빛들도 따라 흔들린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다시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집을 한디위 지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온 몸의 맥이 두근거리며 요동칠 때 모든 게 아팠다. 어느 한 구석 남김없이 아팠다. 한참 온 몸을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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