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우아한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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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필요’로 대체하면서 헌사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필요하니깐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love) 부르짖으면서(call)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오랜 속성을 배제한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장미를 영원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러브콜’은 ‘영원’을 ‘순간’으로 모면하면서 더는 책임 따위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구애(求愛-love call)가 끝나는 순간 애(愛)는 따라서 소실’된다.
그러나 구애 이후 또 다른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즉 ‘사랑에 빠진’ 이에게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끝낼 수는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구애”라는 김영민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 스스로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라지만, 흔해빠져 널리고 널린 사랑. 하다못해 길에서조차 넘쳐 반라의 전단이 발길에 차이며, ‘사랑’이 더는 담론의 영역에서 머물지 못하는 때에 사랑의 심리학은 얼마나 우아한 부패인가.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에서 김영민은 반복의 구조를 유지하는 사랑의 메커니즘을 ‘물매(기울기)’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 사랑의 출발은 시소를 타는 것처럼 타자와 내가 비슷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면 시작은 됐지만 이어질 수 없다.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떨어진 타자로부터 나는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균형 속에서 동시에 매 순간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물매의 반복으로 ‘자의성’은 잊히고 기억은 타자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낮은 위치’에 있다는 비대칭으로, 이는 다시 상처로 자연스럽게 고착된다. 얼핏 기억, 상처, 결여, 비대칭 등등 사랑을 둘러싼 단어들은 치명적인 것들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환상을 통해 적절하게 ‘현실의 수위와 지평’을 조절한다.

그가 자서에서 말하듯 “사랑은 그 무엇보다 그 열정의 기울기에 따른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이다. 현실의 물매가 환상을 낳고 그 환상의 물매는 사랑을 번성케 하는 법.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만큼 당신은 어제처럼 내일도 사랑할 것”이다. 그치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시소음, 그것이야말로 ‘끝낼 수 없는’ 구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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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긋다

15
독학자-배수아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고는 이 책 어디에 밑줄을 그었을까 들춰본다. 짚이는 대로 빼어 든 게 배수아의 <독학자>이다. 독학자라니, 이왕이면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정도가 손에 잡혔으면 줄거리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바구가 됐을 걸.
한 때는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밑줄 긋기를 꺼렸다. 그냥저냥 낙서로 여겼을 뿐이며 어떤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으로 다가와 그쯤에서 책을 덥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헌책방을 다니면서 점점 낯모르는 이들의 밑줄을 쫓는 재미를 알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자를 대지 않고도 찍찍 밑줄을 만드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독학자>를 보자면 몽상은 관념에 뿌리를 내리고 숙주처럼 기생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한순간에 선명하게 나뉜다. ‘독학자’는 독한자이다. 흡사 박일문의 <살아남의 자의 슬픔>에 나오는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이처럼 여겨진다. 그 끝에 다다라서는 대체 몽상가이거나 관념론자가 되는 수 말고 다른 게 있을까. 물론 덕후(オタク)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죽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태도는 읽지 못했다.’ 이것이 독학자의 비운이다.
소설의 ‘내’가 ‘그려낸’ 마흔을 위한 ‘팬터지’, 그 지난한 밤과 주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는 어쩌다가 심심함이 지나쳐 죽을 것 같은 날에만 책을 본다. 게다가 대체로 혼자 잘 노는 까닭에 그닥 심심해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책은 일 년에 채 열 권을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쓸 수 없다. ‘쓰지 않겠다’와 ‘쓸 수 없다’ 이것이 소설의 ‘나’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쯤에서 다행인 건 <독학자>에서 밑줄을 발견한 것이다. 단 한 곳이지만.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라는 P교수의 근사한 말도 아니고, ‘나’의 노동과 삶, 혹은 마흔에 대한 멋들어진 독백도 아니다. 지울 수조차 없게 초록 색연필로 찍하고 그어진 밑줄.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사고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반복해서 다시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치밀하게 기록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편을 택한다. 범죄자는 그 행위, 범죄로부터 오직 도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도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망각이며, 망각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반복을 통한 무의식화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을 만치 그에게 이 밑줄을 들이밀고 싶다. 이런 걸 달리 습관이라고 하자. 범죄자의 습관이건, 페미니스트의 습관이건, 설사 ‘고도’를 기다리는 습관이라 해도 무의식적인 반복은 귀와 눈을 멀게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 도피는 조금 지나서는 자기를 망각하는데 이른다. 결국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치는 무슨 말과 행동을 했든 간에 그리 뻔뻔해질 수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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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츤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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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름다운 얘기든 근사한 말이든 써 재끼고 싶다. 허우적대는 분노가 그치면 녹색 색연필을 쥐고 또박또박 써나갈 게다.
‘이런 꿈을 꾸었다…….’로 시작하는. 그 꿈을 쓰는 날이면 손바닥에 별이 그려진 날과 손바닥에 별을 그린 날에 대해서, 배드민턴과 맞잡은 손가락 마디마디 바람이 지나던 때, 그 바람을 강풍이라고 고집하던 시간을 일러주겠다. 그 소소함이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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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시즌 2

13

이런 저열함. ‘여성주의’는 떼고 앞으로 기본만 말해야 한다. 그게 ‘여성주의’와 서로에 대한 예의이다. 그의 입에서 피스 피스 할 때마다 날 선 조각들이 튀어나와 누군가를 베고 있을 것만 같다.
도서출판 일다를 독자들에게 아무런 공지 없이 없애는 건 경우가 아니다는 글이 트래픽의 상위이다. 누가 왔다 갔는지는 알 바 없지만, 그 후에 도서출판 일다가 새롭게 링크됐다.
어쩌다 실수로 빠지거나 링크가 끊긴 게 아니라 없앴다가 다시 넣은 것이다. 애처롭다. 마스터 혼자 운영하는 동호회도 이렇게 막 굴진 않는다. 언제 도서출판 일다가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9월 5일 도서출판 일다가 사이트에서 사라진 걸 알았고, 9월 6일 글을 올리고 9월 9일 도서출판 일다가 다시 생겼다. mht 파일로 확인할 수 있다.
도서출판 일다
9월 5일 mht / 9월 9일 m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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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

17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오래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하룻밤을 푹 자도 잊히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훌쩍 넘어도 가시지 않는 것.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오멜라스다. 어슐러 k. 르귄의「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오멜라스’는 살렘(오리건)-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그 오멜라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난 것처럼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은 건조하지만 메말라 있지 않다. 스릴이 넘치는 것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지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아’하고 감탄해 버리는 그런 소설들이다. 당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오멜라스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며 여전히 오멜라스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면을 알기 전에는 퍽 괜찮다고 생각해 온 곳. 내게는 이전에 일하던 아드리(adli)라는 곳이 똑 그랬다.

오멜라스는 얼마나 멋진 이상향인가? 성직자 없이도, 군인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곳. 진실을 보기 전까지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곳이다. 오멜라스의 가장 외진 곳 지하에는 한 아이가 버려진 채로 고통받고 있다. 아이가 비참해지면 질수록 오멜라스의 겉보기는 더 화려해진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 그 모든 것은 아이의 처절함과 정반대에 선다. 진실은 오멜라스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직접 겪고도 ‘설마, 그럴 리가’라며 애써 덮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것쯤은 ‘사소하다’며 계속 오멜라스를 누린다. 혹은 떠나는 이들에게 ‘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 오멜라스는 뭔데?’라는 비난을 던진다.

“…….고통스럽다면 반복하라! 그러나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더는 할 말이 없다. 더는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즐거움을 축복할 수도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나듯 하루나 이틀 정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떠나기도 하고,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떠난다. 넷이 함께 떠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아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리고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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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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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자료는 mht로 저장하곤 해요. 여성주의 저널 일다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올 초 일다에 문제 제기를 했던 자게의 글이 없어졌고, 나중에 data.ildaro.com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조차도 없어졌더군요. 게다가 도서출판 일다 사이트(book.ildaro.com)를 아무런 공지 없이 없애버린 건 독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에요. 작년에 일다 출판호프를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와서 도운 건 다음 책을 기다리는 마음에서였을 거예요. 그러니, 왜 출판을 안 하게 됐는지, 그 출판기금은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지 혹은 사용했는지, 어째서 도서출판 일다가 사라졌는지 정도는 사이트를 없애기 전에 알려야지요. 왜냐하면, 그건 그냥 기본이에요.
일다를 나온 기자들의 문제제기 글과 함께 일다 편집진의 글, 비상근 기자라고 칭하며 달린 댓글, 개인정보를 담당한다는 오승원의 댓글 등등이 함께 지워졌네요. 부끄럽고 여전히 낯깍인다는 생각에 흔적을 지운 거면, 늦었지만 사과를 하는 게 맞습니다. 그게 순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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