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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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봉달이는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에도 저리 하품만 하고 말았지. 개구리야, 개구리야 너도 배우렴. 고작 얼음 깨지는 소리에 놀라다니, 더 긴 겨울잠이 필요해.
기지개를 켜며 입을 최대한 벌리고 크게 하품을 하고, 비가와도 눈이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고만 싶다.
봉달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카테고리 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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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소음차단용 헤드폰과 MP3 플레이어를 샀다. 행여나 소음유발자에 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볼륨을 조절해 가며 음악을 듣는다. 헤드폰을 쓰면 요다가 된다.
지금 MP3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노래는 ‘딱지 따먹기’이다. 브로콜리 너마저를 선물 받았고, flac으로 변환해 넣었다. ‘엄마 쟤 흙먹어’와 ‘ 저 여자 눈 좀 봐’, ‘브로콜리 너마저’중에서 밴드명을 고민했다는데 어떤 밴드명이었든 재밌었겠다. 만약 ‘딱지 따먹기’나 ‘아기는 밤에만’이었다면 이 밴드를 사랑했을 게다.
지난 몇 주간 회사에서 한 일은 블로그 스킨을 새롭게 한 거다. 집에 있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다. 더 바꿀 게 없어서 글을 쓰기로 했다. 굴욕 시!
씻는 문제 때문에 자전거출퇴근을 못했는데, 내주부터는 어떻게는 자전거를 이용해야지.
올해도 이유 없이 3월이다.


카테고리 Mon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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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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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라는 것을 감지한다고 했다. 이응준의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처음 “추억의 속도”라는 말을 만났다. ‘보았다’나 ‘읽었다’가 아니라, 만났다. 그 말에서 ‘사랑’ 역시도 낯설고 큰 우연에 둘려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그 시작이 종국에는 추억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실점 뒤는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애써 떨친 추억의 속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나희덕의 시 ‘기억의 자리’에서였다.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기억의 자리 – 나희덕

나는 퍽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걸었다. 점점 덮쳐오는 추억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어서 추억이 마음과 기억의 자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며 안도했을 때, 무심코 앞을 보았다. 그 앞에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돌고 한참을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발자국마다 하나의 기억들이 움푹 패 있었다. 조금씩 깊이가 다른 걸로 봐서 기억이라는 것도 무게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말의 무게였다. 기억의 자리마다 말들이 스미어 사과나무가 싹을 피우듯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지불한 말들이 발자국 언저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길은 반복되어도 다시 낯선 풍경으로 펼쳐졌다. 그 길에서 ‘사랑’이, 무수한 ‘우연’이 ‘또’ 시작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 오는 것일까’, 거스름돈 같은 것이 사랑이다. 무언가를 계속 지불하고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며 ‘아프게 나를 깨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 그리고 추억이 속도를 더할 때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아프게 귓가를 찌른다.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라는데, 사랑은 그렇게 항상 결핍된 존재로만 오나 보다. 그 추억 어디쯤에 말들은 이제 무성해져 사과 한 알은 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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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우아한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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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필요’로 대체하면서 헌사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필요하니깐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love) 부르짖으면서(call)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오랜 속성을 배제한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장미를 영원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러브콜’은 ‘영원’을 ‘순간’으로 모면하면서 더는 책임 따위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구애(求愛-love call)가 끝나는 순간 애(愛)는 따라서 소실’된다.
그러나 구애 이후 또 다른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즉 ‘사랑에 빠진’ 이에게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끝낼 수는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구애”라는 김영민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 스스로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라지만, 흔해빠져 널리고 널린 사랑. 하다못해 길에서조차 넘쳐 반라의 전단이 발길에 차이며, ‘사랑’이 더는 담론의 영역에서 머물지 못하는 때에 사랑의 심리학은 얼마나 우아한 부패인가.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에서 김영민은 반복의 구조를 유지하는 사랑의 메커니즘을 ‘물매(기울기)’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 사랑의 출발은 시소를 타는 것처럼 타자와 내가 비슷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면 시작은 됐지만 이어질 수 없다.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떨어진 타자로부터 나는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균형 속에서 동시에 매 순간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물매의 반복으로 ‘자의성’은 잊히고 기억은 타자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낮은 위치’에 있다는 비대칭으로, 이는 다시 상처로 자연스럽게 고착된다. 얼핏 기억, 상처, 결여, 비대칭 등등 사랑을 둘러싼 단어들은 치명적인 것들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환상을 통해 적절하게 ‘현실의 수위와 지평’을 조절한다.

그가 자서에서 말하듯 “사랑은 그 무엇보다 그 열정의 기울기에 따른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이다. 현실의 물매가 환상을 낳고 그 환상의 물매는 사랑을 번성케 하는 법.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만큼 당신은 어제처럼 내일도 사랑할 것”이다. 그치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시소음, 그것이야말로 ‘끝낼 수 없는’ 구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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